우 선 출판사 인간사랑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인기 있는, 더군다나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유독 특수에 가까운 주목과 경탄의 대상이 되며, 철학자라기보다 록스타의 광휘에 값하는 시장가치를 향유하는 지젝이라고는 하나, 그 생산하는 글의 소화가 프링글스의 섭취나 코크의 음용처럼 간이한 작업일 수는 없고, 더군다나 그의 "리즈 시절" 풋풋함과 생경함, "덜 익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박사 학위 논문의 출간이란, 여간 큰 마음을 먹지 않고는 감행할 수 없는 작업일 텝니다. 지젝의 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현대 철학의 이단적 기린아 그 미미한(?) 시작이 어떠하였는지를 구경할 수 있는 좋은 문헌을, 이처럼 한국어판으로 읽을 수 있게 됨은 차라리 특권에 가깝습니다.

지 젝의 리즈 시절 그 족적을 엿볼수 있는 이 책은, 젊은 시절에도 뚜렷이 드러났던 그 특유의 독설, 비유, (간간히 드러나는) 독선과 과장, 재치, 그러나 이 모두를 관통하는 일관된 풍의 사항 장악 능력, 메타적 총괄과 비틀기, 낯설게하기의 현란한 테크닉, 전혀 다른 두 현상의 귀결적 일치, 일견 얼척없어 보이는 퓨전과 수렴의 레시피 시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엄하고 숭고한 위상과 아우라의 그 거인("유럽 철학이 그라는 샘물로 모여 들고, 이후의 모든 흐름이 그로부터 발원한")과, 무의식과 언어의 미심쩍은 중매인, 나쁘게 말해 포스트모던의 도살자인 자크 라캉과의 전혀 내키지 않을(헤겔 입장에서 그럴다는 거죠. 라캉은 아마 대환영이었을 겁니다. 프로이트에게마저 희극배우의 코스츔을 입힌 게 그이니까요) 앙상블, 랑데뷰를 논문 한 편, 아니 이정도로 두툼한 책 한 권에서 "주선"하고 있는 게 그입니다. 라캉이 생전에 이 재간꾼을 보았으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요(헤겔의 if 대입은 아예 상상하지 말기로 합시다. 국가를 이성의 최고 발현채(소위 "인륜")로 삼은 그 엄숙주의자에게 걸렸으면 지젝은 아마 아드리아의 검푸른 심연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밥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지젝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훤히 밝은 박식형 지성입니다. 이 내용을 한번 보세요.
지 젝은 정말 발칙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근본 없는 풍기 문란, 반달리즘의 폭거가 아닌, "알 거 다 아는 처지에서의 짐짓 광대짓"이므로, 도통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아닌 말로, 한다하는 포스트모던 진영의 논객들도 이 지젝에 대한 호불호가 극으로 갈립니다. 진영에 따라 깨가루가 되게 까이는 게 이 지젝입니다. 그런데, 그 각처의 백화제방식 입장, 입장 입장, 혹은 담론, 담론, 담론들도, 결국은 헤겔로 표상되는 이 이성지상주의, 엄숙주의, 관념론의 래디컬, 교조적 교주를, 유효하고 인문적인(?) 방법으로 전복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으니, 요런 지젝의 발칙하고 눈에 거슬리나, 결론과 파장 면에서 "이쁜 짓"이 되고 마는 이런 발랄한 개그를 용인하고, 나아가 동경할 수밖에 없는 거죠. 사실 지젝의 장난은 정말 재능이 뚝뚝 넘쳐 흐르는, 재롱이 예술로 승화한 케이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quid pro quo를 두고 "오인"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좀 아리송했는데, 바로 다음의 역주(왼쪽 페이지 아래를 보세요)에서, 그 상세한 해설이 이뤄집니다.
주형일 박사님의 명쾌한 해설이 아니었으면 책 독해도 어려웠고,
소중한 지식을 얻을 기회도 놓쳤을 겁니다.
저 는 책 제목만을 보고 과연 무엇이 전개될지 책을 받아볼때까지 예측을 전혀 못했습니다. 잘 디자인된 표지를 보고, 그제서야 아하! 했습니다(인간사랑 출판사의 창의인가요, 아님 원서가 저리 되어 있었나요? ).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는게, 히스테리 환자가 숭고한 거여, 이게 아니라, 역대 존재했던 그 많은 환자들 중에, 가장 숭고한 자("le plus sublime des hysteriques")가 바로 그 헤겔 대왕님이다. 저자는 이 소릴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숭엄한 철학의 大帝를 고작 히스테리 환자로 끌어 내리는 데에, 우리의 자끄 라캉이 도구로 활용되고 있구요. 참 민망한 일입니다.
그 간 지젝의 담론을 익히 읽고 친숙해진 독자라면, 이 까마득한 시초의 저작을 읽고서 이후의 과정과 발전을 역으로 더듬어 보세요. "아하, 이 사람의 재롱도 시기에 따라 이런 이런 변천을 거쳐 커가는 거였구나." 싶을 겁니다. 저는 또, 이 책을 헤겔 연구가들에게 권해 주고 싶습니다. 사실 그는 너무도 어렵고, 때로는 히스테리컬 마인드의 집요함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담론의 장벽으로 꽁꽁 무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마치 피카소가 12세 때 렘브란트처럼 붓을 놀릴 수 있었다고 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 헤겔에 대해 알 것 다 아는 자가 풀어주는 한마당 아니리입니다. 때로는 패러디를 통해, 정전의 진의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진지한 연구에 지치고 때로는 장벽을 절감하던 이에게, 에너지 음료처럼 청량감을 제공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단, 그런 분이라면 과용 과음은 금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