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 정본에 충실한 복원
범립본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이 번에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이토록 대중적인 고전이 아직도 그 저자 확정의 문제, 혹은 비평적 본문 정렬의 문제에서조차 많은 의심과 동요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당혹감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안과 불건전의 파동은, 단단하고 명확한 어떤 박학다식한 전문가의 시원시원한 분석과 개설을 통해 반작용마냥 탄력을 받아 상쾌히 해소되 는 것만 같았습니다. 왜 고전은 권위자의 손을 거친 저서로 읽어야 하는가, 텍스트의 기초적 확정 작업이 그리고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고전의 해의(解義)에는 어째서 그 몇 배 분량의 서브텍스트, 혹은 하이퍼텍스트적 배경 지식이 소요되는가, 이런 여러 질문들이 책 한 권의 독해를 통해, 모두 쓸려나가듯 해소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시 중에 명심보감은 여러 권의 번역서, 해석서가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학덕 높은 대권위자, 노장 교수님의 엄정한 필치로 고풍스러운 주석과 훈계가 가득 담긴 것들도 있고, 반면 그야말로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쉽고 캐주얼한 소프트 리더에 가까운 책도 여럿 나와 있습니다. 바로 이 신간이 나올 무렵, 다른 출판사에서도 휴대에 편한 버전으로 아주 작은 책을 시중에 내어 놓기도 했습니다. 요즘 같은 패스트푸드의 범람, 할로윈의 광란, 생각없는 원나잇의 불장난이 젊은 세대의 일상적 코드로 자리잡은 시대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고전 텍스트, 수신의 경전이 이처럼 출간 붐을 이루는 모습은 일견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한편으로, 사회의 한 축이 극단적 퇴폐와 향락의 폭주로 다음 세대의 정신과 영혼이 퇴폐 몰락하는 결과를 막기 위해 이처럼 애를 쓰는 모습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가 되기도 합니다.

책 한 권에 원문, 해석, 본문비평,

심지어 타 고전의 인용과 해설까지 다 들어 있는 백화점격 해설서입니다.


이 제, 그 많은 명심보감 중에 왜 신동준의 책이어야 하는지를 좀 언급하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명심보감은 그 내용 해설에 있어 엄숙주의를 고집하다면 한계도 없을 만큼 경직된 텍스트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가 주돈이, 양정(정이 정호), 그리고 주희의 강직하고 교의적인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기란 무리입니다. 신동준의 해설은,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일상과 도덕률에 적용하기에 조금도 무리가 없을 만큼, 완화하고 현대화하며 본의를 훼손하지 않는 의미에서 절충화한 흔적이 뚜렷한, 실제 처세에 적용 가능한 시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엄정한 지식 체계라고 하나, 실제 생활에 써먹지를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의가 있겠습니까? 신동준의 시야와 세계관은, 그의 기업인으로서의 이력과 체험이 충분히 반영된 덕에, 문자 속에서 죽지 않은 생활인과 치세경영자의 시각과 애티튜드가 잘 녹아  있다는 장점이뚜렷합니다.


다 음으로, 실용의 미덕으로 텍스트 해석의 엄정성을 타협,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에 이 책의 탁월함이 있습니다. 수신의 교과서를 읽고 바르게 사는 법만 배우면 되지, 자구의 정확을 미주알고주알 따져서 뭐하느냐는 항변도 상상 가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천만에요! 공자는 물경 2400년 전에 생몰을 거친 위인인데,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텍스트의 정확성을 보증할 개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두고 그의 말로 착각하거나, 그의 본의를 두고 시대의 변천과 풍화작용 탓에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한다면, 그런 공부는 차라리 안하느니만도 못하죠. 위인의 말과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숱한 기록 중에 무엇이 그의 말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는 일이 더 선행되어야 할 작업입니다.


신 동준은 문헌의 고증학적 확정 작업에 대단히 능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어느 판본을 두고 이러이러한 표현이 나왔으며, 다른 판본에서는 文言이 이만큼이나 차이난다며 대조를 거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추리소설만큼 흥미롭더군요. 인문 공부의 본체가 여기 있지 않나 생각될 만큼요. 물론 그 과정을 거쳐 도출된 도덕적 명제의 전개와 해설 역시 깊이가 넘칩니다. 논증과 분석을 위해 도덕 강의를 희생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마 지막으로 이 책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왜냐구요? 명심보감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다른 경사자집 수십 권을 읽는 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행렬이 너무도 유쾌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죠. 읽으면서 느끼는 지적 쾌강은, 아라비안 나이트나 돈 키호테의 피카레스크 내러티브를 좇는 듯 흥겹고 풍성했습니다. 제가 말한 이 세 가지의 장점은, 시중에 나온 다른 명심보감 판본이 쉽게 따라하지 못할 이 책만의 장점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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