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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란사 - 조선의 독립운동가, 그녀를 기억하다
권비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7월
평점 :
엄혹했던 시절 분연히 일어나 민족의 자존과 대의를 추구한 분들은 정말 존숭받아 마땅합니다. 이분들을 향한 존경과 사랑이 멈춘다면, 그건 아마도 민족이나 국가 단위가 이미 소멸해서일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들과 우리 자손의 숨통이 붙어 있는 한 독립 우국 지사들은 영원히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이 소설에서 계속 란사라 불리는 주인공 분은 실존인물 하란사, 혹은 김병훈 선생의 딸로 태어난 김란사님입니다. 그녀는 과연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음이 소설 초반부의 여러 일화를 통해 독자에게 전해지네요. 식민지 시대는 아직 그 직전의 봉건 잔재가 극복되지 않았기에 특히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여성들은 성차별, 민족차별, 재능 억제 등 삼중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점기의 민족 시련사는 남성보다 (뛰어난) 어느 여성에 의해 더 극적으로 부각되곤 합니다.
"난 내 성씨가 싫어." "그냥, 그리고 서양에서는 남편의 성을 따르잖아? 난 곧 미국에 갈 거니까."
오히려 성을 타고난 성이 아닌 남편 성으로 바꾸는 걸 진취적인 선택이라 여긴 난사(낸시)의 의식 구조가 재미있게 보입니다. 큰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많지만 부모 성을 함께 쓰는 현대 한국의 일부 여성들(극히 일부 남성도 포함)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라면) 오히려 더 타당한 근거를 갖추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국에서 두 성씨를 함께 쓰는 건 남편 성, 태어날 때의 성(이 경우도 출생 가문이 상당한 명망을 갖췄거나, 자신이 결혼 전 일정 사회적 지명도를 얻은 경우에 대체로 한정)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란사는 나날이 빛이 났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가꾸려는 노력이 제 명을 재촉하는 길인 줄 알았더라면 화영은 어떻게든 란사를 말렸을 것이다."
여기서 화영이라는 인물은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이며, 이화학당 시절부터 내내 하란사의 절친한 벗이었던 걸로 세팅됩니다. 기생 출신이었다는 화영은 본처에게 걸려들어 호된 봉욕을 겪는데 이때 하란사가 나타나 본처(그닥 신분이 번듯해 보이지는 않는)의 폭력으로부터 구해 줍니다. 근 백 이십 년 전의 일인데도 시앗다툼은 현대 대한민국의 그것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아마도 현대 작가의 필치 끝에 나온 작품이라 그런 듯합니다.
아무튼 빼어난 재주를 갖고 태어난 여성(그렇게 착각하는, 뭔가에 씌어 사는 이상한 여성이 아니라)이,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는 과정(과 결과)에서 오히려 피해를 본다는 건 참으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판에 다시 성별로 갈라치기를 해서 인재 풀의 절반을 탈락시킨다는 게 얼마나 민족과 국가를 위해 큰 손해이겠습니까.
사실 하란사도 인생의 초장마저 겉으로 드러난 그 역정만 보면 가혹한 비극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늙은 재력가한테 시집을 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남편 하상기 씨가 배울 만큼 배웠고 깰 만큼 깬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소설 속에는 "남편 덕에 그녀는 나날이 꽃필 수 있었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 소설에서 전반부에 주인공처럼 각광 받는 인물은 차라리 하상기이며, 실존 인물로 "김란사"라 더 널리 알려진 이분에 대해 구태여 하란사라 제목이 붙은 건 작가의 이런 생각이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소설 속에서 하상기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아내 대하기를 마치 팬이 스타 대하듯 아끼며, 유학을 보내 주는가 하면 낳은 딸 자옥도 사실상 부친인 그가 키우다시피하는데 요즘도 이런 남편은 아마 보기 극히 드물 듯합니다. 그래서 소설 중, 오히려 어미가 딸 간수를 소홀히하여 일찍 죽었다며 과하게 란사가 욕 먹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어려서 죽은 자옥은 가락지로 마치 화체한 듯(p157) 이후 어머니의 몸에 내내 따라다닙니다.
"이화학당을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 당신이 생명을 그리 여기는 건 모순 아니겠소?"
나이도 어리고 사실 생각도 채 여물지 않은 란사를, 남편은 이처럼 능숙히 설득합니다. 생각이 더 완결돤 분이 그렇지 못한 어린 상대를 차분하게 설득하고, 당사자의 생각이 더 무르익게 도우면서도 자신의 의도도 관철하니 이 얼마나 뿌듯한 광경입니까.
"란사는 1908년 서른 여덟이 되던 해에 고종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다(p73)." 그런데 1907년에 고종 황제는 이미 퇴위를 했으므로 만약 국가에서 주는 훈장이라면 고종이 아니라 순종 황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고종도 당시 태황제 신분이었으니 태황제가 수여하는 다른 영전체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또 p6에는 의친왕이라는 호칭도 널리 쓰기에 비록 일본식 호칭이지만 혼용한다고 하셨는데, 의친왕은 애초에 일본식 호칭이 아닙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러일전쟁 발발 전에 받은 작위인데 어째서 그게 일본식이겠습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널리 써도 됩니다. 역사적 진위가 명백히 가려지는 문제인데 한때 일본식으로 간주한다는 대중의(?) 합의(착각)가 있었다고 해서 흑이 백으로 바뀌겠습니까.
"참 장한 일이나 가슴이 아프오." "전하가 걱정되니 당분간 피하셔야겠습니다.(p191)"
하란사는 소설 속에서 의친왕을 밀접히 모십니다. 소설의 상상이 많이 가미되었으나 유능하고 총명한 그녀가 의왕에 대해 긴밀한 보좌를 해 왔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강(소설 중에서 자주 본명으로 일컬어집니다)과는 신분의 차이가 크나 하란사가 더 누나 뻘이기도 합니다. p177에 나오듯 란사는 황족들에 대해 마냥 숭배하는 태도는 절대 아니고, 이강 같은 특별한 경우에나 그리 존대를 하는 거죠. 물론 p165에 나오듯 이강은 파락호, 난봉꾼 같은 면모도 분명 있었습니다.
"아줌마, 나도 그 애국이라는 거 하면 안돼요? 어떻게 하면 애국할 수 있어요?"(p216)
"쓸데없이 연애질이나 하며 청춘을 허비하면 안돼. 우리 한 명 한 명이 다 애국자가 되어야 해."(p62)
후자의 대사는 아직 어렸을 적, 자신보다 훨씬 어린 동생들에게 란사가 하던 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렇게 당찼으니 성인이 되어 그런 활약을 펼칠 수 있었죠. 전자는 병수가 강씨 아줌마한테 하는 말입니다.
<관산융마>는 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화영을 첩으로 둔 영감님이 이 곡을 거론하더니(p63), 한참 뒤 기미독립선언 무렵 의왕이 학선에게도 청하네요(p234). 소설은 이처럼 독립지사 여성투사 하란사의 건조한 일생만 다룬 게 아니라(그녀의 일생은 결코 건조하지도 않았지만) 당대의 다양한 풍속과 이야깃거리가 곁들여져 더욱 내용이 풍성하고 재미있습니다.
"정말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저는 전하의 심복이지 여사님(란사)의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이 구더기 같은 놈, 네놈이 전하를 잘 못 모셨으니 이 사달이 난 것 아닌가?"(p314)
"구더기 같은 X, 어디 붙어먹을 데가 없어 일본 놈하고 붙어먹어?"(p67)
이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 소설 속에서의 하란사 여사님은 대단히 직정적이고 입이 건 편입니다. 여튼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어느 신여성의 기개와 장한 행적이 이 소설에는 잘 묘사되어 있고, 마지막이 (이제는) 늙은 기생 화영의 조용한 회고로 마무리되는 것도 감동적이네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