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카드 2 와일드카드 2
조지 R. R. 마틴 외 지음, 김상훈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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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 루이스 샤이너의 <포추나토의 길고 어두운 밤>을 보면 또다시 "조 매카시"가 언급됩니다. "그가 돌아왔어!" 확실히, 지난시절 증거도 없이 누군가를 지목하여 사상범이나 간첩으로 몰고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수법은 많은 이들에게 공포를 몰고 왔을 것입니다. 핵무기 개발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인도 고대 서사시의 한 대목을 소감으로 인용하기도 했는데 2권 p101에는 칼리 유가라든가, 바마 카라 등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예전 TV 영화 <스피시즈 4>를 보면 외계인이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손으로 두꺼운 책 표지를 쓱 스캔한 후 그 안에 든 지식을 모두 흡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포추나토의 "집중력"이 그런 구실을 합니다. 인간이란 종이 정해진 DNA 구조 속에서 아무리 옴치고 뛰어 봐야 그 높이의 한계란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런 상상 속에서 "더 적은 효율로 더 큰 효과를 낼 수 없을지"를 꿈 꿔 보는 것이겠죠.


p199에는 일종의 언어 유희가 나오는데, 역주에도 나오지만 잉글랜드의 전통 민요 "스카버러 페어"의 한 구절입니다. 또 예전에 사이먼 & 가펑클이 이걸 불러 취입한 적도 있죠. p193에는 어느 할머니한테 가서 담뱃불을 빌리려는 러미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얼마 전 60대 할머니에게 몹쓸 짓을 한 10대 불량배들의 사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2권은 조지 R R 마틴의 "막간"이 삽입되어 시리즈의 통일성을 더하며, 방금 인용한 여러 구절이 나오는 <땅속 깊은 곳에서>는 브라이언트와 하퍼의 공저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처럼 작가들의 개성이 다양한데, 작품은 마치 한 사람이 처음부터 단일한 기획 하에 집필한 것 같은 착각을 부릅니다. 이는 누구보다 조지 R R 마틴이 섬세하게 편집 개입을 한 덕이라고 짐작합니다. 1970년대 리버럴 진영과 젊은이들이 혐오했던 닉슨에 대한 언급이 작품에 수시로 나오며, 당대 히트작인 <대부>에 대한 allusion도 엿볼 수 있네요.


<꼭두각시>에 보면 기형적인 주민들이 우글거리는 거리, 빈민가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위생 조건이 불량하고 영양 공급이 불충분한 이들이 이런저런 질병에 걸려 안타까운 모습을 할 가능성이 높겠죠. 기형적인 주민이 우글거리는 장면이 나온 영화로는 폴 버호벤 감독의 <토탈 리콜> 같은 게 있는데 아마 그도 지금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수시로 묘사되는 공권력과의 내전과도 같은 갈등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고스트걸, 맨해튼을 습격하다>를 보면 유독 볼드체로 강조된 대목이 많습니다. 작가가 단지 그 단어를 강조하고자 했던 의도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그 단어 속에 각별히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독자들에게 좀 더 많은 생각, 집중을 하고 넘어가라는 당부가 담겨 있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제니퍼는 여기서 크로이드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하며, 앞서 언급한 <토털 리콜>에도 유독 여전사의 비중이 남자의 그것보다 큰데 SF 장르에서 이런 경향을 더 일찍부터 발전시킨 흔적이라고 저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부록인 <와일드 카드 바이러스의 과학>은 짧으면서도 여태까지 이 시리즈의 방향성이 과연 무엇을 향했는지 잘 요약해 주는 또하나의 멋진 단편입니다. 이 기획은 확실히 정치적입니다. 정치를 떠나 작품의 올바른 해석이 불가능할 만큼이죠. 또한 이 기획에는 풍자가 살아 있습니다. 남녀차별, 빈부격차, 정치적 폭력 등은 그저 일상과 생업에만 집중하려는 모든 소시민을 어렵게 만듭니다. SF의 외피 안에 현실의 모순을 이처럼 생생히 담았다는 점에서도, 불확실성 그 자체를 운행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의 위태한 행보는 적나라하게 까발려집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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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팩트 세대 - 차세대 기부자들의 기부혁명 사랑의 열매 나눔총서 5
샤나 골드세커 외 지음, 신봉아 옮김, 노연희 감수 / 교유서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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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층을 가리켜 MZ세대라고 보통 부르는데 나이만 젊다고 세대 이름이 따로 붙는 게 아니라 그에 걸맞게 다른 세대와 구별되는 행동 양태의 특징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저자들은 신세대는 필란트로피, 즉 기부나 자선이나 사회 참여에 있어서도 이전과는 다른 특징이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의 필란트로피>에서 과거와 현재 민주주의 사회에서 무상 급여와 관계된 필란트로피가 어떤 양상을 보였는지 살폈다면, 이 책에서는 미래를 책임지는 세대라 할 젊은이들이 자신들만의 필란트로피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지 중점적으로 고찰합니다.


아무래도 자선이나 기부는 그 본성상 "부자나 그 가족"에 의해 이뤄지는 게 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물론 돈이 없어도 재능이나 봉사, 노력을 기부할 수도 있고 그 역시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사회 현상, 제도를 통해 이뤄지는 필란트로피 중 주목을 받는 건 아무래도 금전을 통한 것이며, 이런 수단을 통하는 활동, 행동은 아무래도 부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죠. 책에서는 요즘 젊은이들의 필란트로피는 그 이전과 확연히 다른 패턴을 보이며, 이를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일단 모바일 혁신을 통해 소셜 미디어가 큰 작용을 하는 쪽으로 사회가 급변했고, 스타트업 중 매우 짧은 시간에 성장을 이룬 기업들이 많은 덕에 "젊은 나이에 부자가 된 이들"도 크게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관찰자들의 말을 빌려 "기부의 황금기"가 지금 도래한 상황이라고 평가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모바일 혁명과 급격한 사회 재편 덕에 부의 편차도 그만큼 심해졌고, 미국(한국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빈부의 차가 심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부의 패턴 변화를 보면 우려는커녕 이 분야에서만큼은 희망의 싹이 보일 정도라고 하는데, 전체 7% 비중밖에 안 되는 백만장자 가구가, 기부에 있어서는 50%를 차지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 역시 불충분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적어도 부유층이 미국 역사상 이 정도만큼이나 많은 기부에 동참한 것도 역사적으로 드물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책의 제목은 "임팩트 세대"이며 그 주제는 "임팩트 혁명"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그 전 세대보다 더 많은 돈을 손에 쥔 이들이 늘어났고(그 전에는 이미 부자 지위를 지닌 부모, 조부모로부터 특별한 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수준의 재산을 보유), 아무래도 돈이 있어야 누굴 돕는 기부가 가능한 만큼 이들이 전에 없던 수준으로 일단 기부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점도 놀랍지만, 이들은 어려운 이들들 돕는 방법에 있어서도 대단한 효율을 추구합니다. 책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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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예언, 시간의 종말 - 마야 문명의 신비로운 비밀을 풀어낸 미래예언서
에이드리언G.길버트 지음, 고솔 외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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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가 라틴 아메리카 어느 지역의 고대 문명이라는 정도는 알지만 구체적인 것은 잘 모릅니다. 아무래도 현재 이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은, 미래에 벌어질 문명의 종말이라든가 이런 신비한 이슈와 관련된 쪽에 초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특히 플라톤이 이야기한 "아틀란티스 문명"이 이 마야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데서 논의의 출발점을 잡습니다. 그가 남긴 모든 저작이 철두철미한 논리성으로 일관하고 있고, 아무래도 서양 철학의 아득한 개조로 봐야 할 그가 구태여 신비에 싸인(좋게 말해서 이렇다는 거고 솔직히 말하면 허황된) 아틀란티스를 거론했다는 자체에서 아직도 논의의 불씨가 죽지 않는 듯하며, 만약 다른 논자나 저자가 이 이야기를 꺼내어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아마 벌써 담론의 장에서 사장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야 문명 관련 가장 유명한 이야깃거리라면 아마 "인신 공희"일 것입니다. 영화 <아포칼립토>에서도 이런 점 때문에 마야 문명이 상당히 비판저적으로 묘사됩니다. 어떤 이는 제국주의의 시선으로 토착민 문명을 비하했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근거 없는, 비판을 위한 비판입니다. 서구 제국주의를 단죄한다고 해서, 토착 문명이 무작정 미화되어서는 안 되며 학문적으로 근거가 밝혀진 요소는 그것대로 팩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해당 영화(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인) 역시 고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겠고요.


마야 문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0의 인식입니다. 어떤 문명이건 0을 본격적으로 인식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기수법이 발달할 수 있고 올바른 수학적 개념이 싹틀 수 있습니다. 마야 문명이 이처럼 고대에 홀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 건 바로 이처럼 면밀하게 수의 관념을 인식했다는 데 크게 기인했다고 여겨집니다. 인도에서 이것이 최초로 고안되었다고는 하나 굽타 제국, 즉 한국으로 치면 신라 시대에나 들어와서의 일이죠. 많은 이들은 인도에서보다 적어도 기수법 체계의 일부로서는 마야가 더 앞섰다는 추정을 내어 놓습니다.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마야 문명은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히 큰 피해를 본 것은 아즈텍 제국, 잉카 제국이며, 마야 문명은 지배 세력의 지나친 호전성과 잦은 전쟁 때문에 국가 체제가 거의 와해되다시피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실속도 없는 전쟁이 지나치게 빈발하면 결국 국가 공동체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민족도 특히 조선 시대 같은 구간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대외 정세에 대응했는지를 두고 비판이 잦으나, 결국 전쟁을 최대한 피하면서 효율적인 통치 방식을 도모하려 했던 게 결과가 그리 되었을 뿐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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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평화 - 삼국지 이전의 삼국지, 민간전래본
김영문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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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선생은 교유서가(문학동네 임프린트)에서 여러 고전을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분입니다. 


<삼국지평화>는 저자를 알 수 없고 이 책에도 작가 미상으로 나옵니다. 원래 이처럼 민간에서 후한 말기를 대중적으로 쉬운 버전으로 풀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 전하던 걸 나관중, 모종강 등이 문학으로 정착시킨 것입니다. 그 내용 전개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삼국연의>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마치 대체역사를 보는 듯 즐거운 면이 있습니다. 물론 시기적으로는 이것이 앞서기 때문에 오히려 삼국연의를 대체물로 봐야 맞겠습니다만 말이죠.


KBS에서 제작 방영한 <용의 눈물>을 보면 군졸 출신으로 조영무가 태종의 처남 민무구 형제를 숙청하는 사건을 겪으며 충격을 받아 이에 "읍참마속"이라는 고사를 적용시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연의>는 영정조 연간에나 조선에 전해졌으므로 조선 건국 초의 공신인 조영무가 실제 저 말을 썼을지는 의문이 듭니다. 


일단 마속이 가정 전투에서 패하고 촉 군사 수뇌부에 의해 처형당한 사실은 정사에도 나오는 사항입니다. 또 지금 이 <평화> 역시 명초에 충분히 잘 알려졌으므로 설령 문학 버전으로 후한말 역사를 접했다 쳐도 어느 정도는 조영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마속이 과연 참형의 형식으로 죽었는가? 일단 이 대목 관련해서는 평화에도 연의와 큰 차이 없이 군사(軍師)인 제갈량이 마속을 참했다고 명확히 나옵니다. 그러니 마속의 죽음에 관해 "참"의 원형은 아마도 이 평화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살아생전 마속을 지극히 아꼈던 제갈량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고 공(公)을 높이기 위해 사(私)를 낮춘 예로 극적 효과까지 주기에 충분한 화소인 셈입니다. 


평화는 상중하 세 파트로 나뉘며, 아무래도 나관중 본 등과는 분량 면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연의 탐독자들이 한번 읽어 볼 만한 재미가 충분합니다. 사실 상당수 독자는 다른 역자의 책으로, 혹은 원문으로, 이미 읽어 본 내용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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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의 필란트로피 - 필란트로피의 역사, 제도, 가치에 대하여 사랑의 열매 나눔총서 6
롭 라이히.루시 베른홀츠.키아라 코델리 엮음, 이은주 옮김, 최영준 감수 / 교유서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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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는 philantrophy를 "자선"으로 번역하며, 영한사전을 찾아 봐도 이 외에 별다른 뜻은 잘 안 보입니다. 형태를 분석하면 phil-은 "사랑[愛]"이요, anthrop-는 "인간"이라는 어원을 지님은 고교 과정 정도에서 무난하게 다루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p8의 일러두기에서 편집진은 이 단어를 "자선"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에서 다양한 맥락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점을 고려하여 "필란트로피"로 그대로 놓아 둔다며 표기 태도를 밝힙니다. 이는 단순히 편집상의 한 지침일 뿐 아니라, 어느 정도 학제적 논문 모음의 성격도 띤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주제어, 키워드에 대한 큰 오해 없이 독해가 가능할지에 대해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도 있는 셈입니다. 


서문에서 저자들은 일단 필란트로피를 "정의(definition)"합니다. 자선, 아니 필란트로피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도 이처럼이나 다양한 관찰 방법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행위로서의 자선은 그닥 모호함 없이 비교적 쉽게 그 외연과 내포가 확정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거론하는 정의상의 난점 중 대표적인 것만 여기 적어 보자면 예컨대 기부금 입학 전형에서의 기부 같은 것도 과연 필란트로피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냐는 거죠. 대뜸 "무슨 소리?"라며 반문이 나올 만하지만 사실 미국 유수의 명문대에서 그 돈은 널리는 인류 전체를 위해 유익히 쓰인다 할 만큼 기초학문 연구 용도로 요긴히 활용됩니다. 기업으로부터 이뤄지는 지원은 어떤 명시적인 상품 개발에 연계되지 않을 경우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저 자신의 자녀에게 명문대 학벌을 얻어 주기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라고 해도 이를 쉽게 결격 판정 내리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p24 이하에서 저자들은 구조적, 설명적, 규범적 관점에서 필란트로피를 입체적으로 정의하려 애 씁니다. 개인적으로 독자인 저는 여태 규범적 관점 같은 것은 법학에서나 쓰이는 방법론인 줄 알았습니다만, 법학 역시 철학에서 그 여러 유용한 도구를 차용하는 입장 아니겠습니까. 여튼 이 서문 파트에서는 필란트로피의 기원, 제도적 형태, 도덕적 근거와 한계, 등을 고찰한다고 미리 밝힙니다. 이 세 가지 주제를 1, 2, 3부에서 각각 다루며 서문 후반부에서 소제목으로 뽑은 "과정"은 필란트로피의 과정이 아니라 이 책이 나오게 된 제작, 편집 과정을 가리킵니다. 책이 워낙 흥미로운 편제와 내용이므로 독자에게는 이 대목 역시 흥미를 갖고 읽힙니다. 또 필란트로피는 주로 중세 이래 귀족과 종교 단체 중심으로 이뤄진 행태, 제도였으나 이 책은 저자들이 미국인들인 만큼 미국적 관점에서 미국의 현실, 현상을 중심으로 논의한다고 역시 서문에서 밝힙니다. 하긴 기여입학 같은 것도 지극히 미국적인 시스템의 일환이긴 합니다.


미국 역사에서 이른바 라버 배론(robber baron) 즉 강도 나으리들의 행태는 당대에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천민자본주의의 전형, 나아가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 범죄와 윤리적 타락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19세기 미국 경제사는 암담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런데 당사자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그런 불리한 평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사랑하는 자손들이 앞으로 상속 받을 재산으로부터 별 무리 없이 기쁨을 향유하려면 자신들 살아생전에 어느 정도 조치를 해 놓고 죽을 필요가 있음도 인식하고 있었죠. 그래서 시작된 게 자선행위였으며 이 책 1부에서는 주로 이 점에 대해 역사적 개관을 진행합니다.


일단 자선이라 함은 공적(公的) 행위가 아니라 사적인 행위입니다. 법인의 경우 우리 법제에는 그저 재단법인, 사단법인 두 가지 형태만 있을 뿐이며 그나마 후자는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 등이 실질적으로 대부분을 이룹니다. 영국의 오랜 법제를 그대로 계수(繼受)한 미국에서는 종전에 여러 법인의 형태가 있었고 이들 중 일부가 상속재산 등을 관리하며 필란트로피를 본연의 기능으로 삼았다고 책에 나옵니댜. 영국식 시민법인과 자선법인을 합친 게 "민간 사단법인"이라 하여 미국 고유의 제도가 되었는데, 이에는 "공화주의 법인"이란 당대 미국식 개념이 그 기저에 자리했습니다. 책 저 뒤 p339 같은 곳에서 "공화주의적 전통", "공화주의 원칙" 등이 다시 거론되는 것처럼 이 개념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상위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대중 문학 작품인 <키다리 아저씨> 같은 곳에만 봐도, 코믹하게 사화사업가와 사회주의자라는 용어를 헷갈리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저 무렵의 미국은 "자기 일에나 신경쓰기(to mind your own business)"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와, 이에 대항하는 이타주의 내지 개입주의 사이에 매우 첨예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자선이란 개인이 개인에게 진정성 있는 선의로 행해야 하지, 어떤 전문 단체가 대횅하는 자선에 대해 깊은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p120의 "법인은 변종에 불과"라다거나,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다는 (역사적) 논의는 이런 맥락을 먼저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또 이는 "집단은 본래 책임이 없다"는 오래된 서유럽의 개인주의 책임 개념과도 통합니다. 반대로 p128 이하에는 재단 옹호론이 나오는데 사실 이런 입장의 대립은 우리 시대에서도 결코 효력이 다한 게 아닙니다.


이 저자들이 이런 논쟁의 역사적 정리(와 해석) 다음에 재미있게 덧붙인 건, 이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법인 제도가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의 논의입니다. p155의 표에는 도금시대(gilded age)와 현대의 "필란트로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가 잘 정리됩니다. p161에는 놀랍게도 필란트로피의 역사에도 1930년대에 "혁신주의" 운동이 일어났다고 기술합니다. 여기서 혁신은 주로 자선 시스템상의 비효율 제거 등을 가리킵니다. 또 이 지점에서부터 과학과 필란트로피 간의 결합이 흥미롭게 이뤄집니다.


5장부터는 애플의 CEO 팀 쿡이라든가, 혹은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처럼 현대적인 주제가 더 자주 거론됩니다. 우리도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CSR에 반대하는 입장이란 정도는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더욱 깊이, 그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분석됩니다. 앞선 장에서는 "필란트로피는 민주주의를 파괴한다(혹은 그럴 수 있다)"는 주장도 다각도로 분석되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가 이 책만의 재미(물론 학문적인 책이지만)가 돋보이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필란트로피가 시스템화하고 나아가 이익극대화의 원칙마저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들면 종래의 자본주의, 나아가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작동하겠냐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있는 거죠. 사실 깊은 연원을 따지자면 필란트로피는 중세 귀족제 사회라든가 신성 불가침의 영역을 유지해 왔던 가톨릭 등 종교단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필립 코틀러라든가 많은 학자들은 이미 CSR이 단순한 마케팅이나 PR을 넘어 기업의 이익극대화와 공존할 수 있다거나, 아예 필요조건이라는 입장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이 책 p224 이하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서, CSR은 기업의 재무가치를 감소시킨다는 건데.. 여기서 요즘 핫한 MSG에 대한 재고찰도 다시 등장하네요. 찬이든 반이든 일류 학자들의 논쟁은 실증과 통계에 바탕을 둔 것이라 그 추이가 참으로 볼만합니다. 데이비드 엥겔 같은 이는 기업이 "처벌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go away with) 수 있을 때에는 법을 지키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경제학에서 예전부터 완전경쟁시장이라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주요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건 "정보의 비대칭성 극복"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이 일정 집단이나 계층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책의 제7장에서는 도서의 저작권을 둘러씬 구글의 소송을 집중 분석합니다. 이는 법률적 관점에서 봐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과연 우리 시대 필란트로피의 한계와 근거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며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압축적이고 극적이며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또 이제 "필란트로피"의 개념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확장될 수 있는지도 독자들이 비로소 체감할 수 있습니다. "자선"이라 범주를 한정하면 이 사건은 논의 대상이 아니지요. 예전에 화제였던 카피레프트 이슈도 다시 떠올려 볼 만합니다.


경제학에서 또하나의 오랜 동안 치열한 논쟁거리가 바로 "무임승차자 문제" 혹은 외부 경제 이슈입니다. 8장에서는 바로 무임승차 문제가 집중 조명되며, 그동안 경제학개론 수준에서 피상적인 공부를 했던 이들은 비로소 이 문제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를 통째 흔들 수 있는지 확인 가능합니다. 요즘 진보 진영에서는 영리법인의 대안으로 "조합"을 자주 거론합니다. 또 이 파트(논문)의 저자인 에릭 비어봄 하버드대 교수는 p350 같은 곳에서 "국가의 이미지=상비군을 보유한 비영리단체"로 규정하곤 합니다.


"민주주의적 평등"은 어떤 개념 요소를 필수로 삼을까요? p369에는 이것이 보기 좋게 도시화됩니다. 사실 평등이라는 절대적 이념가치를 떠올리면 필란트로피, 비상 수단을 통해서라도 평등에 보다 가깝게 다가서려는 노력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인용되는 중 민주주의를 "시장민주주의"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무상공여를 심각한 체제 위협으로 볼 수밖에 없죠.


기부에 있어 기부자 자신의 "재량"이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책에서는 "재량적 관점"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특히 국제단체를 통해 기부를 실천하는 쪽에서 보면 무제한 재량은 도리어 필란트로피를 휘청이게 만듭니다. 아니 내 돈으로 내가 좋은 일 좀 하겠다는데 그걸 (돈을 직접 대지도 않는) 타인들의 의사 결정에 따라야 한다니 이런 불힙리가 있냐며 반발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꺼운 책 전체를 다 읽고 자선, 나아가 필란트로피의 문제가 순전히 미국으로 분석 대상을 한정하여 봐도 얼마나 복잡미묘한 문제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만큼, 이런 입장의 차이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지성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무엇이 도달 가능한 최상의 공동선인지 깊이 숙고하고 합의점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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