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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의 일기
엘리 그리피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나무옆의자 / 2021년 8월
평점 :
책 뒤표지에 보면 <커커스 리뷰>라는 매체에서 "누가 이 아름다운 고딕 이야기를 거부할 수 있으랴!"라고 평했다고 나옵니다. 확실히, 스릴러나 미스테리 장르와 고딕만큼 궁합이 잘 맞는 관계도 없겠으며, 이 작품은 소설 속 소설인 <낯선 사람>(이 작품 중에서 가상으로 지어진, 고딕 문학의 고전이라고 하네요)이 점점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템포와 멋지게 호흡을 맞추며 전개됩니다. 그러나 이 작품 자체는 고딕이 아니며, 물론 살인 사건이 중반부까지 두 번이나 벌어지지만 이야기 자체는 우리네 이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감정, 티격태격하는 관계, 지극히 인간적인 교류 등이 어우러집니다. 고딕풍처럼 앙상하고 살벌하며 싸늘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따스한 느낌마저 듭니다.
미스테리를 읽을 때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숨어 있는 소소한 단서를 찾아 논리적으로 범인이 왜 그/그녀일 수밖에 없었는지 깔끔하게 밝혀내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하지만, 이 작품은 1/3쯤 읽고 범인 찾는 노력은 포기했습니다. 세 명의 1인칭 화자가 번갈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형식인데(역자 후기를 읽어 보니 고딕의 컨벤션상 이 3이라는 숫자가 여기서도 의미를 갖는다고 하네요. 물론 본문 중에도 '고딕에선 세 번 되풀이해야 제맛'이라는 클레어의 대사[p176]가 있지만), 뭐 같은 사건을 세 명의 다른 시선으로 리프레이즈해 주니 단서가 더 늘어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에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냥 코지한 탈것에 몸을 맡긴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만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일단 클레어가 화자가 되어 들려 주는 이야기에선, 남 보기에 정작 클레어가 어떤 스타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2부부터 우리의 주인공 하빈더가 등장하여 그 사건 그 만남 등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여 주고 나서야 아 이분이 그런 외모를 가졌구나, 하면서 어느 정도 그림이 잡히기 시작했네요. 하빈더 카우어의 표현에 의하면 "그녀는 누구에게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전반부에 등장하며, 저 후반으로 가면 사이먼(클레어의 전 남편)과 플뢰르를 같이 만나곤 "대체 왜 저런 남자한테, 괜찮은 여자 둘(클레어와 플뢰르)이 모두 끌렸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는 하빈더의 대사가 나오는데, 그걸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가 동성애자인 겁니다. 동성애자의 정의(!)가 그런 거죠. 반대로, 어떤 게이 우먼(즉 레즈비언)을 두고 "저렇게 괜찮은 여자가 왜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괜찮은 남자를 안 만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이성애자를 떠올려 본다면... 아무튼 여기서 클레어한테 강렬한 감정을 유발당한 이들 중에는 자신도 포함된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낸 건데, 그래도 이런 부분은 대놓고 결코 말을 안 하는 게 그녀(화법)의 매력입니다. 경찰은 경찰 업무에만 집중하자! 미스테리 장르물은 (에로티시즘 아닌) 미스테리에만 집중하자! 이거죠. 참고로 저는 p111에 나오는 "처음부터 클레어 캐시디가 싫었다"는 왠지 하빈더가 자신을 속이거나 남 들으라고 하는 말 같습니다.
클레어는 확실히 매력적인 여성인 게... 이런 건 본래 딸이 가장 잘 판단합니다. 조지(아)가 엄마와 함께, 교사 엘라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갈 때 "웬 모델과 노숙자가 함께 간다"고 할지 모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딸이 엄마한테 열등감을 느끼면 그건 틀림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생긴 열등감 말고 어떤 억압, 세뇌, 암시 이런 건 다른 문제고요. 클레어는 심지어 딸에게 백 번 들려 줘도 해롭지 않을 "공부해라, 명문대 가라" 같은 흔한 충고도 의식적으로 삼가고 조심할 만큼 딸의 의사를 존중하는 엄마입니다. 반면 딸 조지아는 아무리 (어린) 자녀로서의 특권이 있다 해도, 전통적 가치에 대해 "그 쓰레기 같은 소리"란 말을 쉽게 입에 올릴 만큼, 좀 선을 자주 넘는... 클레어가 아닌 다른 엄마라면 그리 자랑스럽게 여길 딸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처음에 얘를 용의선상에 올렸다는...)
클레어는 아주 부유하거나 귀족적인 가문에서 출생한 게 아닌데도 그 외모 때문에 남들에게 그런 인상을 주지만, 정작 자신은 상류층에 대해 거부감을 갖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1부 내용만 봐서는 이 여성이 어떤 이미지로 타인에게 다가오는지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그건 클레어가 적어도 자신이 풍기는 이미지와 진짜 내면이 꽤나 차이가 나는 유형이라서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클레어는 지적이고, 대단히 창의적인 타입이 아닐지는 모르나 전공인 영문학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그 이상으로 보입니다만) 아주 깊은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전공과 지적 소양에 대해서도 적절한 자부심을 갖고 있죠. p245 같은 곳을 보면 딸한테 "영문학과에 가려면 성적이 좋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영미에서는 사실이 그렇죠.
이 소설은 고딕물뿐 아니라 그야말로 영문학상의 온갖 상징, 명언, 작가와 작품 이름들이 줄을 지어 레퍼런스되는 잔칫상과도 같습니다. 에드가 상까지 받은 장르물의 모범이지만 미스테리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이 재미 때문에 읽어 볼 만한 이유가 하나 뚜렷이 생깁니다. 고전뿐 아니라 영국 작가 수 타운센드가 지은 <비밀일기>라든가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라든가(p98), P G 우드하우스라든가(p71)... 그런데 하빈더는 클레어의 말에 의하면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사람" 같다는 건데, <비밀일기>의 주인공 에이드리언처럼 (어린) 남성우월 인종차별주의자하고 어떤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지 말이죠.
업무 파트너인 닐 윈스턴은 대체로 호감을 부르는 인상이라는 것 외에 (아직) 비중이 적습니다. 경찰은 실제로도 두 명이 조를 짜서 다니지만 이 작품 중에는 <스콧 앤 베일리>라든가 <캐그니와 레이시> 등 TV 프로그램이 언급됩니다(p346). BBC 드라마 <셜록>에서는 홈즈와 왓슨을 애봇 앤 코스텔로에 빗대며 조롱하는 대사도 있었죠. 이 작품에는 <스트릭틀리 컴 댄싱>(p34를 비롯 아주아주 자주 언급)부터 해서 p57의 <유니버시티 챌린지(한국 mbc의 <퀴즈 아카데미>가 이 포맷을 많이 참조했죠)>, 포스트게임쇼인 <매치 오브 더 데이>(p278) 등 TV 프로그램들이 정말 많이, 인물들의 대화 중에 환기됩니다.
책 앞날개에서도 그렇고 역자 후기(중 p506)를 봐도 이 작품은 발표 당시(2018)에는 "독립적인 작품(스탠드얼론)"이었을 겁니다. 저는 읽으면서 작가 엘리 그리피스가 어느 정도까지 하빈더 카우어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었을지가 궁금했습니다. 이제는 속편이 나왔고 역자분도 p506에서 이 작이 시리즈의 첫 인스톨이 되었음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처음에 저는 읽으면서 하빈더의 정체성이 참 천천히 드러난다 싶었습니다. 클레어도 PC스러운 조심성 때문인지 첫만남에서의 하빈더에 대한 인상 표현이 무척 절제됩니다. 하빈더의 온전한 모습은 중반 이후에나 편안하게 우리 독자들에게 공개되는데 이를테면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카레를 만드는데 뭐하러 식당에 가서 사먹는..." 같은 대사(p170)가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서 두 번 직간접 언급(p13, p201)되는 푸아로(=포와로)도 그리 잘생긴 외모가 아니며 이방인 벨기에 출신인데, 하빈더가 그런 점에서는 닮았습니다. 연령과 성별 면에서는 거리가 있지만.
하필이면 모교("똥통"이라고 작중에서 두 번 정도 비하됩니다)관련 벌어진 살인사건을 맡게 된 그녀는 아주 성적이 좋지는 못했으나 영리한 학생이었다는 평판은 남깁니다. 학창 시절에 그녀를 가르친(최소한 기억하는) 교사도 아직 있고, 잠시 감정을 나눴던 친구(!) 한 명도 현직 교사로 일하는 모교... 수업은 안 듣고 뒤에서 제임스 허버트의 공포 소설을 즐겨 읽던 학생(p232)이었지만 범죄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영감은 누구못지 않습니다.
다시 클레어로 돌아와서, 그녀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를 논하던 중 삐에르와 나타샤의 로맨스에는 무관심했다고 할 때 왠지 공감이 크게 되었습니다. 그 대하소설에서 삐에르도 외모가 시원찮은 남주였죠. 이처럼 영문학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고전도 언급이 되는데 예를 들면 역주에서 친절히 설명이 되듯 p183에서의 "나는 이보다 더 심한... "는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한 구절입니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콘숨마툼 에스트"는 기독교 신약 복음서의 한 구절(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뤘도다"라고 한 것)을 라틴어로 쓴 거죠.
아무리 논리적인 범인 추리를 포기했다고 해도 독자로서 "마구 때려맞히는 재미"마저 놓아버릴 수는 없습니다. 독자가 실력이 없어서 작가와의 게임은 GG를 쳤지만 읽어가면서 OOOO, 혹은 OOOO이 범인이 아닐까도 잠시 생각했으나 만약 그 둘 중 하나라면 이건 너무 싱겁죠. 그리 빤히 의심 받는 작자들이 결국 범인이라면 아마 에드가 상을 못 받았을 테고(ㅋ), 개인적으로는, 결말에서 진범으로 드러나는 OOOO도 아닐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건 반칙 아닌가... 헌데 그렇다고 해서 좀 맥이 풀리더군요. 뭐 사정을 읽어 보니 또 그럴 만도 하겠다 싶기도 하고, 좀 더 힌트를 많이 주거나 비중을 늘렸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남자라서인지 저는 하빈더 말고 클레어가 계속 나오는 시리즈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뭐 그건 힘들지 싶습니다. 길게 이어질 속편 중에서 가끔이나마 안부 전해주길요~~
*네이버 책좋사 카페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제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