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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투 원 (리커버) - 스탠퍼드대학교 스타트업 최고 명강의
피터 틸.블레이크 매스터스 지음, 이지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10월
평점 :
사회에서 부를 쌓은 사람들을 보면 상위 0.1%와 1% 사이에, 격차가 그렇게나 크게 납니다. 또 수능 성적 같은 것도 마찬가지라서 1%라고 하면 엄청 잘하는 것 같지만 0.1%하고의 사이에는 그야말로 넘사벽이 존재합니다. 차라리 1%와 7% 사이의 격차가 더 유동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경영의 세계는 좀 다른 듯합니다. 물론 여기도 예를 들어 재벌서열 상위 10위까지와 20위권 사이의 그룹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하죠. 그런데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못 가진 제로에서 바로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게 너무도 힘든 반면, 일단 이 단계만 넘어서면 어느 정도는 견적이 나오긴 합니다. 그러니 무에서 유를 일단 만들고 보는 게 시장 진입자에게는 관건입니다.
저자는 먼저 글로벌화와 기술 진보 둘을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p17에서, 닉슨과 그의 국무장관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해 국교를 텄을 때 기술 발전은 많이 진척되었을망정 아직은 글로벌화가 미진했다고 합니다. 1971년 이후에는 글로벌화는 빠르게 진전되었으나, 기술 발전은 (이 부분이 중요한데) "IT를 제외하고는" 그리 크게 나아가질 못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맞는 말 같습니다. 의료 기술 발전은 그 당시 시험관 아기다 인공 심장이다 하는 게 처음 나왔지만 그 이후로 큰 어떤 진보가 체감이 안 되고요(물론 현장에서는 엄청난 발전이 있었으나 일반인의 체감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반면 IT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기기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절절히 느낄 것입니다. 그 엄청난 진보의 정도를.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의 부모 세대는 더 나은 미래가 절로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달에서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으며, 에너지 가격은 공기처럼 낮아지고... 우리는 (IT 기기의 놀라운 발전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 주변이 (여전히) 구식이라는 사실을 잊게 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에 만들어진 <백 투 더 퓨처>(특히 2편)를 보면 2010년대 중반에 어떤 환경에서 우리가 살게 될지 미래를 그린 장면이 있습니다. 그 중 상당수는 아직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데, 저런 영화를 보면 부모 세대가 30년 후의 미래를 얼마나 (근거 없이) 낙관했는지 약간은 실소가 나올 만큼이죠. 요즘은 오히려 환경 오염, 핵전쟁으로 엉망이 된 디스토피아물, 좀비 영화가 더 많이 나오며 세계관도 훨씬 비관적입니다.
또 IT의 (지나친?) 발전 때문에 여전히 주변이 구식이라는 점도 잊게 된다는 저자의 지적 역시 동감합니다. 사실 코로나19 같은 새로운 질병이 만연해도 어쩐지 의료, 약학계는 그에 적절한 처방을 빨리 내놓지 못하며 각종 부작용에 대해서도 명쾌한 이유를 설명 못하는 것 같습니다. 코비드19는커녕 십수년 전에 유행하다 갑자기 없어진 사스도 마찬가지며, 암 치료는 1980년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표적항암제다 면역항암제다 말은 많지만 주가를 올리기 위한 사기극 같고, 심지어 주가 스캔들이 벌어지고 나서도 그게 사기인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주가조작이 큰 규모로 일어나면 검찰이 칼 같이 잡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저자는 특히 정실자본주의(p26)가 휩쓸던 동남아시아를 1997년 금융위기가 강타한 사실, 또 2000년 닷컴 버블이 잠시 커졌다 곧바로 터진 사실 등을 지적하며, 전세계에 만연한 비관주의가 "그럼,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해 보자"는 분위기를 일으켜 인터넷 경제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ㅎ 좀 말이 그렇긴 합니다만 여튼 인터넷 경제의 큰 호황과 저런 시대 분위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맞물린 건 사실입니다.
저자는 화려한 표현력을 자랑합니다. p31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 예입니다. "벽돌에서 클릭으로의 이행(오프라인 매출에서 온라인 위주로의 전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투자자들은 다시 벽돌(주택 공급)과 브릭스(글로벌화)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전자가 책에 나오는 대로 1990년대에 있었던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표현은 절묘합니다. 여튼 그 결과로 부동산 버블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여튼 저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2000년대 초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벤처기업, 스타트업들, 이들은 대부분 0에서 1을 만들려고 했던 도전자들이었고, 0에서 1을 만드는 건 바로 "(신)기술의 힘"입니다. 확실히 그 당시의 신생 기업들은 일찍이 없던 걸 세상에 새로 내놓으려고 했습니다. 실리콘 밸리 자체는 이미 1980년대 이전부터 있었으나 당시는 소프트웨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책 처음부터 강조하기를, 0에서 1을 만들어내는 건 누가 뭐라 해도 기술의 힘이며 기술 발전 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그런 기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학사상 최고의 서두가 톨스토이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으나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그 문장으로 흔히 꼽히죠. p49에서 저자도 이 문장을 인용하는데 행복한(?) 기업은 제각각의 이유로 행복해지지만 실패한 기업은 "독점을 이루지 못했기에", 이 이유 하나로 불행해진다고 합니다. 저자도 말하지만 이 책에서 논하는 "독점"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독점 기업과는 그 의미가 제법 다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독점기업은, 말하자면 대체 불가의 기업으로서 모든 소비자들이 그 물건(서비스)이라면 그 기업에만 의존해야 하는 그런 걸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바로 구글이죠. 구글은 그야말로 맨손에서 시작해서 오늘날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기업이 되었는데 그 걸린 시간이 불과 이십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제로 투 원입니다.
영어에는 at the drop of a hat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저자는 p61에서 <햄릿>의 한 구절을 또 멋있게 인용하며 명예가 걸린 싸움에서는 달걀껍질만한(이건 저자의 표현입니다) 명예라도 그걸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게 참 용기라고 하는 그 대사를 들려 줍니다(물론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햄릿은 그러지 못했지만).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싸우려거든 아예 한방에 적을 죽여 놓거나, 못 그러겠거든 합병이나 인수 등 다른 적절한 방법을 찾으라는 겁니다. 비즈니스에서 가장 나쁜 건 바로 경쟁이다, 이게 저자의 핵심 요지입니다. 경쟁을 하지 않고 독점을 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 당신 기업만의 기술이다 이거죠.
p44에는 구글 CEO 에릭 슈미트의 말을 저자가 "해석"한 게 나오는데, 구글은 (법에서 말하는) 독점 기업이 아니라 "연못에서 언제 다른 물고기에게 잡혀 먹힐지 모르는 불쌍한 또하나의 물고기"라는 겁니다. 애초에, 항구적인 독점 기업 같은 건 없으며 언제든지 추격자가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경쟁기업 중 하나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거죠. 여튼 독점기업으로서 머무는 시기를 가능한 한 늘려야 하며 만약 산업 자체가 이미 성숙기로 접어들었다면 미련 없이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유럽, 영국이 사양산업을 일찌감치 중국에 떠넘겨 저가 생산기지로 삼았으며 중국이 나라로는 많이 규모가 커졌으나 국민 삶이 그닥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지 싶죠.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1106/pimg_7735611893181123.jpg)
경쟁기업은 일단 이윤이 박하며 (그러기에) 피용인의 임금을 가차없이 줄이는 등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피폐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점기업은 어떠한가? 구글의 예에서 보듯 직원 후생과 복지가 최고 수준입니다. 독점 기업은 경영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덩달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거죠.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니 너무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가 실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는 이미 독자들에게 다 접수가 되니 말입니다.
이베이는 한국의 옥션을 가진 기업이지만 사업 모델은 좀 다릅니다. "일반 상품은 사실 경매 방식을 꼭 도입해야 할 영역은 아니며 이런 건 아마존에서 사는 게 낫고(p77), 이베이는 좀 다른 영역에서 특화한 독점기업이다, 따라서 2004년 당시 사람들이 기대한 만큼 크지는 못했다", 뭐 이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저자가 만약 한국의 옥션닷컴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기업상은 "완전히 독보적이라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점기업"입니다. 그래서 혹 누가 나중에 시장에 진입해서 선두를 추격할 수 있는 그런 시장이다 싶으면, 먼저 들어가서 개척한다고 땀을 뺄 것이 아니라 아예 나중에 들어가는 라스트 무버가 되라(p80)고 합니다. 여기서 저는 1994년 당시 현대그룹이 프로야구 시장에 가입하려다가 다른 기업의 반대로 벽에 부딪히고 묘한 방법을 써서 외곽을 때려 기어이 1996년 리그 진입에 성공한 예가 생각납니다. 팬들 입장에서는 팀이 늘어나면 좋지만(수준 저하라며 반대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기존 참가자들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얌체가 얄밉겠죠. 물론 가입금도 따로 받긴 하지만 말입니다.
어떤 스타트업을 만드느냐는 미래를 어떻게 보냐는 관점에 달려 있습니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건 같으나 그 확신 강도에 차이가 있는 건, 확신에 가득찼던 과거의 미국, 그리고 뭔가 믿음을 잃은 현재의 미국이 그렇다고 합니다. 반면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도 차이가 있는데 확신을 갖고 부정적으로 보는 중국, 그 정도는 아니지만 미래가 좋지 않다고 보는 게 유럽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중국 지도자들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며 국민에게 채근하듯 주의를 촉구하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그들이 목표("세계를 다 잡아먹자')를 너무 높이 세운 탓에 매사가 심각한 분위기를 지적합니다. 맞는 듯도 합니다.
저자가 미국 사람이라서인지 책에서는 미래를 긍정적으로는 보되, 뭔가 불확실성이 크게 개입한 세계를 상정합니다. 어떻습니까? 한국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중국처럼 강박적으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뿐일까요? 걱정은 많이 해도 대체로는 "그래도 나아지겠지"하는 기조가 더 강하다고 봅니다. 만약 "지금 이렇게 애는 쓰고 있지만 어차피 나빠질거야"라고 믿는다면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니라 차이니즈입니다 ㅎㅎ
주식 투자를 할 때에도 거듭제곱의 법칙에 따라 초기 성장을 이루는 벤처기업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왜 이미 성장의 풀이 꺾인 대기업에 투자하냐는 겁니다. 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이른바 분산 포트폴리오는 결국 다 시원찮은 것만 잔뜩 담는 다이X(이것 자체는 우리 나라 투자자들이 즐겨 쓰는 속어이지만)가 되기 쉽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식으로 말하면 코스피 하지 말고 코스닥 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전문가 중에 운OO 같은 분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아니 대형주를 사서 안정적으로 굴려야지 왜 위험이 큰 코스닥 하냐고 말이죠. 이건 뭐 누구 말을 무조건 따를 게 아니라 잘 생각해서 본인 취향, 적성에 맞는, 후회 없는 투자가 필요할 듯합니다. 여튼 잘나가는 스타트업 초기에 투자해서 대박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 자체는 사실입니다. 그걸 알아보는 우리 눈이 부족해서 문제이지만요.
저자는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p158)"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에 걸맞게 저자는 "내 편을 많이 만들라"는 조언을 독자에게 해 줍니다. "특전에 목숨 걸지 않고 그저 우리 회사가 잘 맞다 싶어 찾아온 작당 공모자(신입)를 모으고, 분명히 구분된 책임을 지우고, 광신도처럼 일하게 하며, 아무도 찾지 못한 비밀(p125)을 설레는 마음으로 찾는 기업을 만들라"는 겁니다. 하루하루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하고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꿈으로 무장한 기업만이 대체 불가능의 "독점" 기업이 될 수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