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 신라공주와 페르시아왕자의 약속
이상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란은 현재 미국에 의해 국제 말썽꾸러기 나라로 찍혀서 이미지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만 원래는 세계 문명을 주도하던 엄청난 대국이었습니다. 우리가 서양 문명의 초기 대표 주자로 아는 그리스(스파르타, 아테네를 비롯 이후의 알렉산더 제국에 이르기까지)와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바로 그 나라이며 당시의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였죠. 이후에도 사산 조 페르시아가 등장하여 로마 제국과 내내 자웅을 겨루었습니다. 이 소설 중에도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아들 부시 당시 "악의 축" 3국 중 하나로 꼽힌 과거가 언급됩니다. 


이란은 지금처럼 신정 체제가 등장하기 전 팔레비 샤한샤가 다스릴 때 막 근대화에 열심이던 한국과도 긴밀힌 관계였습니다. 이 소설에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화려한 풍경의, 세속화, 서구화한 기조의 도시가 빛나던 과거 왕정 체제의 이란을 회상하는 구절이 많이 등장합니다. 중동 여러 나라는 건설 근로자의 진출 때문에 한국인들이 익숙해자지만 이란은 그것과는 또 좀 다른 경위였습니다. 팔레비 왕도 당시의 한국처럼 일종의 개발 독재 시스템이었고 그래서 지금 많은 곤궁에 시달리는 이란 국민들이 "그때가 경제는 좋았다"며 회고하는 게 다 그 때문입니다. 비슷한 처지라서 국가 수반끼리 뭐가 통하기라도 했는지 그래서 우리 수도 서울에는 테헤란로가 있고 저쪽에도 그 비슷한 거리 이름이 있죠. 이 소설 중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원래 석유 파동 때문에 1970년대 초반에 괜찮다가 인플레 때문에 고생하고, 이후 유가가 안정을 찾자(폭락까지는....)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져 댜규모 소요 사태가 터지고 그 와중에 황실이 무너져 이슬람 신정 체제가 들어선 거죠. 


저자는 우리 역사의 빈 구석을 매혹적인 상상으로 채우며 이 소설을 진행시킵니다. 소설 속에서 "그런 미개한 나라를 왜?"라고 캐릭터 현철은 말하지만 페르시아는 엘람 문명을 일찍부터 발전시켰으며 이 문명은 기존 4대 문명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논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또 무굴 제국의 창업자 바부르나 그 후예들도, 본인들은 몽골의 후예를 자처했으면서 궁정이나 정부의 운영 체제, 나아가 문화적 전통은 한사코 페르시아풍의 그것을 고집했습니다. 영토인 인도 고유의 문화는 한없이 경멸하면서 말입니다. 아마도 일 칸국의 유산을 존중한다는 명분도 있었겠고, 호라산 일대의 유목 민족들의 분위기를 계승해서일 수도 있지만 여튼 널리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페르시아풍의 권위는 매우 높은 것이죠. 액자 밖의 주인공 희석도 이를 강조하며 설득에 성공합니다. 


머리말, 또 p28의 각주 등에서 저자가 밝히듯 이 소설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의 내용에서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 먼 옛날 신라의 공주가 페르시아의 왕자와 어떤 로맨스로 엮였다는 건 이게 아무리 문학 작품 속의 내용이라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작가도 "우리 역시 사료의 부족 때문에 <삼국유사>를 보조 근거로 인용하듯, 저 페르시아의 서사시 역시 역사의 일부가 못 될 바 없다"는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뭐 문헌에서 작은 단서라도 빠짐없이 활용하여 상상의 극한을 펼치는 작가의 솜씨라서 이 장편 소설을 읽는 재미는 차고 넘칩니다. 


원효 대사는 출신 성분의 한계 때문에 좌절을 겪었으나 대신 불교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구법 유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역사를 바꿀 명저를 저술하여 당과 왜에서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에도 등장하여 요석공주와의 숨은(?) 사연을 더 털어놓는데, 그 아들 설총 역시 천재적 두뇌를 타고나, 무려 페르시아 문자의 영향을 받아 표음 문자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이두를 만들었다는 건데 기왕 하시는 것 좀 더 창의력을 발휘하셔서 그 당시의 문헌이 더 풍성히 남게, 또 더 표음성을 살리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전란의 영향이 컸지만 말입니다. 페르시아는 저 당시라면 고유 문자를 썼겠죠. 지금은 종교 때문에 아랍 문자를 다소 개량해서 쓰는 처지지만. 


여튼 소설 속에서 설총이 이두를 창제한 것도 아비틴 왕자와의 밀접한 교류 덕분이었다고 나옵니다! "원래 우리는 바실라라 불렀지만 여기서 신라라고 하니 그리 부르도록 하자." 그런데 독자로서 이 대목 읽으면서 아니 신라보다 바실라가 훨 나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애초부터 신라의 이름은 바실라가 아니었을까요? 고유어로 무슨 뜻이 따로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문무왕의 동생이 요석 공주이고 문무왕의 딸이 프라랑 공주이며 이분이 아비틴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얼마나 매혹적인 설정입니까. 소설 초반에는 우리 주변에 유독 서양인처럼 코도 높고 피부도 뽀얀 사람이 가간혹 보이는 게(주인공 희석 포함) 다 이때 페르시아인들이 혈통을 남긴 흔적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이란인뿐 아니라 (고려 때까지 교류한) 아랍인도 어족은 멀지만 크게 봐서 코카서스인들의 갈래이니... 


지금도 중국이 골칫덩이이지만 당나라 때도 마찬가지였죠. 물론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인 원죄가 있지만 의자왕 때 백제는 잘 추스려진 국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자주 침공하여 거의 망국 직전까지 몰아넣었습니다. 이 역시 진흥왕이 성왕을 배신한 게 더 먼저이긴 하지만... 여튼 당나라는 (소설 속에서) 신라와의 당초 약조를 깨고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 등을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병탄하려 드는데 이 책략의 주체는 측천무후라고 소설 중에 나옵니다. 많은 TV 사극에서 그리 설정하기도 하죠. 


희한하게도 사산 조 페르시아가 아랍인들에게 멸망했고, 이 아랍인들은 그 기세를 몰아 서남아시아를 휩쓸었고 탈라스에서 마침내 당나라와 맞서기까지 합니다. 당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실크로드의 패권을 잃었는데 하필 이 전투의 패장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였고 이 소설에서도 기막히게 아비틴과 페리둔 등과 인연을 맺습니다! 그러니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아랍인들의 제국에 맞서 신라, 고구려, 당나라, 페르시아 등이 모두 연합을 이룬 셈이죠 ㅎㅎ 우리도 망국의 설움을 자주 겪은 나라인데 하필 이 시점에서의 페르시아도 망국으로 굴욕을 겪던 처지(p268)이며 고구려는 멸망,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위협을 겪던 시가라서 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정말 놀라운 건 중국사에서는 천하의 역적으로 꼽히는 안녹산(원래 중국계 아닌 소그드 인이었다고 하죠)이 여기서는 페리둔 왕자의 신하를 자처하며 같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후 이를 바탕으로 아랍으로 쳐들어가 페르시아 제국을 재흥시키자고 합니다. 그 와중에 고선지 장군도 ㅎㅎ 동맹 아닌 동맹이 된 것입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작가님 상상력이 참 기발하다 싶었습니다. 


우리 역사는 문헌이 불충분하게 전하며 중국 측 문헌은 왜곡이 있기에, 왜 이 시점에서 뭔가가 크게 허전할까 싶은 대목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 우리의 허전함을 이 소설이 비록 허구와 상상으로일망정 넉넉히 잘 채워 준 것 같습니다. 페르시아, 즉 이란도 형제의 나라(p18)일까요? 뭐 아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형제의 의를 맺어 나쁠 것도 없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