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일각돌고래라면 -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편견에 대하여
저스틴 그레그 지음, 김아림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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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고통받고 혹사에 시달리는 말을 보고 격하게 공감하다 정신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고 하니, 어쩌면 생전 한 번 정도 일각돌고래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봤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저명한 동물학자이며 돌고래류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인데, 특히 지능이 높다고 알려진 돌고래를 연구하다 보면 과연 인간만이 최고의 지성, 감정을 갖고 이 지구의 중심에 선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갖던 착각이나 선입견과는 아주 다른 실체를 갖거나, 생각도 못했던 어떤 심오한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랑우탄이나 고릴라 등의 행태를 보면 아득한 옛날, 이 책 p48 이하의 서술을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갓 나온 우리의 조상들(호모 사피엔스)이, 그보다 먼저 유럽에 도달했던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과 만나 항쟁하고, 일부는 교접하여 미량의 DNA를 남기기도 한 과정, 이 과정이 얼마나 척박하고 야만적이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지혜가 있었으며, 인간미나 도덕이 발휘되었을까요. 예의나 문명인적인 수치심은 극히 최근에 계발되었을 뿐이며, 그조차도 어떤 큰 의미가 있을지는 더 따져 봐야 합니다. 저 바다에서 평화롭게 장난치고 가끔은 인간더러 씩 미소까지 짓는 돌고래들이, 지금으로부터 2백만 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해양과 육지를 노닐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의 종에 행성을 지배할 배타적 자격이나 신분이 주어진 건 아닙니다. 2만 년, 십만 년, 이백만 년의 시간 단위는 인간 두뇌의 용량으로 참된 의미를 헤아릴 대상이 아니니 말입니다. 

한 시대 과학계의 대세, 다수설 비슷한 위상이었던 주장이라고 해도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면 논파, 도괴되기도 합니다. p76을 보면 19세기 미국 새뮤얼 모턴이 주장했던 다원설은 종교계와 과학계의 입장을 묘하게 절충한 듯하지만 결국은 폐기되어 지금은 조소의 대상일 뿐입니다. 과학은 때로 과학 외적인 이유에 의해 학설의 당부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이 역시 인간이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가끔 "고양이 입장에서 본 세상, 인간" 같은 코믹 짤을 보기도 하는데, 저자는 p79에서 "과연 자산 포트폴리오를 짤 때 전문가가 짠 치밀한 계획과, 우리 집 고양이가 멋대로 결정한 것 중 전자가 낫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많은 변수에 의해 움직이고, 우리의 두뇌는 그에 비해 용량이 빈약하니 배후의 이치와 원리를 다 깨닫기에 역부족입니다. 

사람도 본래 거짓말을 못하게 된 동물입니다. 거짓말을 진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면, 거짓말탐지기 같은 기계가 아예 전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지금도 제한적으로만 쓸모있지만). 저자는 원래 동물들은 정직하게만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합니다(p120). 거짓은 개체의 생존에 일시적으로 유리하지만 결국은 모두에게 피해를 주므로 없는 편이 나은데, 인간이란 동물은 어리석게도 해로운 잔꾀를 부리다가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개체 입장에서도 애초에 거짓말을 안 하는 편이 신뢰를 쌓을 수 있으므로 더 유리한 선택인데... 이렇게 한 치 앞을 못 보고 동물보다 못한 짓을 하면서 무슨 만물의 영장이겠습니까. "자연은 이미 동물에게서 헛소리를 최소화하는 체계를 만들어냈다.(p120)" 

우리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은 침팬지입니다. 침팬지는 과연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저자는 아마 모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야생의 공격에 경솔하게 노출되어 치명상을 입기 꺼리는 건 그저 감각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지, 죽음과 소멸에 대한 자각의 발로라고 보기 힘듭니다. 사람이 나머지 영장류와 결정적으로 차별점을 마련한 건,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부터라고 저자는 말합니다(p147). 구석기시대 사람들도 동굴 생활을 하며 종교, 예술에 대한 개념을 키우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통찰했다고들 주장됩니다. 

사람들이 타 동물들에 비해 도드라지게 갖는 특징이 모두, 진화에 필수적으로 요구된 자질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앞서 말한 거짓말하는 재주 같은 건, 그런 것도 만물의 영장이기에 갖추게 된 신성한 능력이며 단지 잘 쓰기만 하면 충분하다,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시스템상의 버그일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반면 죽음에 대한 각성은,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도구 개발의 필요를 더 절실히 느끼고, 위험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동료들과 더 긴밀히 소통하고(언어의 발달), 생명 귀한 줄 알아서 도덕성이 발달하고, 자손 남기는 게 영생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 여겨 성행위에서 더 쾌감을 느끼기(다른 동물의 교미는 매우 짧고 슬프기까지 함) 때문에, 이야말로 진화의 결정적 도약 단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우리처럼 공동주택에 살지 않기 때문에 정원, 잔디밭 가꾸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잔디밭을 가꾸는 건 크게 보아 지구에 해롭고 저자는 기후위기의 한 요인이라고까지 말합니다(본인도 여태 1000시간 이상을 쏟았다고 고백). 저자는 미국과 많은 걸 공유하는 캐나다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건데, 독자인 제 생각에는 조금 과장이라고 봅니다. 여튼 저자는 이를 예지적 근시(근시안적 예지가 아니죠!ㅋ)라 부르는데, 이런 인지부조화 때문에 결국 인간은 (어느 정도 현명한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멸망의 위기로 조금씩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본디 당장의 위기만을 모면하게 설계된 불쌍한 존재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페니실린이라는 항생제가 우연한 어떤 실수로부터 개발되었을 때 인류는 이제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20세기말에 슈퍼항생제로도 박멸이 힘든 슈퍼박테리아의 출현으로 고생했으며 지금까지도 딱히 대응책이 없어, 그저 항생제 처방 자제만을 되뇌는 처지입니다. 한국전 당시 미군들은 몸에 이, 빈대가 끓는 한국인의 몸에 DDT를 살포하며 미개인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럽, 미국에서 어떤 살충제로도 잘 안 죽는 베드버그가 나와 골칫거리입니다. "예지적 근시 때문에 인간의 인지 전략이 크게 몰락했다는 증거(p287)"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 제목에 니체가 왜 쓰였는지는 p314에 비로소 나옵니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소떼를 보고 사람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쓸데없는 궁리 끝에 자기 무덤을 파는 인간과 소 중 지구상에서 과연 누가 오래 살아남을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오히려 소만도 못하다고 했었습니다. 저자는 이에 착안하여 책을 쓴 것인데, 마치 동양의 노장 사상과도 통하는 듯한 저자의 결론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겠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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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열두 달 - 고대 이집트에서 1년 살기
도널드 P. 라이언 지음, 우진하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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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고전 원류는 보통 그리스, 로마를 꼽습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훨씬 앞서 선진 농경 문명, 중앙 집권 국가 시스템을 만든 곳은 지중해 맞은편의 이집트였으며, 이들은 또한 다채로운 신화 체계까지 창조하여 풍성한 정신 문화까지 항유했습니다. 그들 제국의 엄청난 위세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피라미드라는 유적을 통해 확인되며, 아직까지도 어떻게 이들 건축이 가능했는지 정확하게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이며 영감(inspiration)의 고향입니다(p299). 

p30을 보면 이집트의 행정구역이 설명됩니다. 저자는 적절하게도 이를 그리스의 노모스에 비깁니다. 우리가 이집트 관련하여 유념해야 할 것은, 위도상 북부, 즉 나일 강의 하류를 하(下) 이집트라 부르고, 남부 즉 나일 상류를 상(上) 이집트라 부르는 관행입니다. 하 이집트에 22개의 행정구역이, 상 이집트에 20개가 위치했다고 책에 나옵니다. 멤피스는 그리스식 이름이며 구약의 히브리 이름으로는 바로 "놉"입니다. 이곳은 하 이집트의 수도였으며, 테베(룩소르)는 상 이집트의 중심지였고 후기의 수도입니다. 두 도시 모두 현재는 관광지로 유명할 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후에는 알렉산드리아, 이슬람화 후에는 카이로가 새로 수도로 기능했습니다. 

p45에서 보듯 "모세"라는 어근은 파라오들의 호칭에서 자주 보입니다(p178, p185에서도). 이는 고대 이집트어 "물", 혹은 "출산"과 연결되었다고 추정됩니다. 히브리인들의 해방자, 신에게서 십계를 받았다고 알려진 모세도 이들 이름과 같은 계열이겠고 말입니다. 책에는 아멘호테프 파라오의 행적을 소개한 후, 역사 소설처럼 그의 구체적인 하루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라는 말이 있듯, 절대 군주 파라오의 삶이 마냥 향락과 권력 행사로만 가득했던 게 아니라 이처럼 책임감과 중압감도 그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입니다. 

예수의 12제자들도 상당수가 어부들이었지만 이보다 수천 년 앞선 고대의 이집트에서도 단백질원인 생선을 잡아 유통하는 직업(p70)이 널리 성행했었습니다. 책에는 가상의 어부 네페르가 등장하여 그 팍팍한 삶이 소개됩니다. 곡식은 어느 정도 보관과 유통이 가능했으므로 수탈의 대상이 되었지만, 어육은 어차피 상품화에 한계가 있으므로 상당부분은 본인이 소비 가능했고(비록 잉여의 부 축적은 어려웠겠으나), 삶이 비록 중노동으로 점철되었으나 적어도 배를 곯을 일은 없었겠습니다. 그래서 저 네페르도 자신의 처지에 저렇게 만족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paper라는 단어 자체가 그리스어를 거쳐 고대 파피루스(p99)에서 기원했습니다. 파퓌로스 자체는 그리스어이며, 정작 이집트어로 그 특산품(p99)인 종이(이후 많은 변천을 겪었습니다)를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54년 미국 영화 <The Egyptian>에도 나오듯이, 이집트는 풍족한 곡물 생산을 바탕으로 다채롭게 상업이 발달한 나라였으며 p100 이하에도 포도주 거래 등 재미있는 상거래 상황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혼인 잔치(p108, p280)는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의 가장 흥겨운 행사이며 이때로부터 수천 년 후 예수 그리스도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첫 기적을 행했다고 전합니다. 

먼 시골에 사는 이들은 가난하고 일상의 노동이 힘들었던 데다 정보가 부족해서 중앙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 주변의 백성들은 임금이 지근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혹 궁정에 변화라도 생기면 당장 이를 화제로 삼아 장래 정국의 향방을 점치곤 했겠습니다. 파라오가 붕어(崩御)하면 누가 제위를 계승할까? 그러나 이 책 주인공 중 하나인 어부 네페르(선한 자)는 "누가 파라오가 되든 나는 오늘도 내일도 고기를 낚겠지."라며 세상의 변함 없는 이치를 읊습니다. 

우리는 신라 지증왕 때 우경(牛耕)을 도입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농경이 시작된 이집트에서는 신라보다 수천 년 앞서 소를 길렀으며, 이 책에는 목동들이 소 기르는 일을 맡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피스라고 신성시되던 소는 미라(mummy)로 만들어졌다는 서술도 있습니다. 태양력을 채택했던 이집트는 그들의 책력으로 열번째 되던 달 보름에(이것만큼은 달을 보고 정함) 계곡 축제라는 걸 벌였는데, 우리의 주인공 네페르보다는 훨씬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이 축제를 가장 기다렸다고 하며(p245), 이야기 속에서는 여사제 마트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네요. 

동양이든 서양이든 하층민들의 생이 팍팍했고 중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이웃 나라와의 교역에 경제가 크게 의존했던 일, 장삼이사의 희로애락이 인륜지대사에 좌우되었던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이 재미있는 고대 이집트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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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없는 세상은 가능할까 10대를 위한 세상 제대로 알기 4
오애리.구정은 지음 / 북카라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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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자라날 세상에는 제발 질병, 자연재해, 대규모 살상사태 등이 만연하거나 빚어지지 않고 평화롭게 그들의 삶이 꽃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누구라도 마음에 품고 삽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쁜 경향이나 폭력성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세계적으로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빈발합니다. 과연 전쟁을 누리에서 뿌리뽑을 수 있겠으며, 그를 위해 우리는 무슨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당장 일체의 전쟁을 종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지혜와 인식의 공유라는 첫걸음은 떼어야 합니다.

2001년 9월 11일 지구의 경제 수도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 두 대가 충돌하여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었습니다. 세계를 충격 속에 몰아넣은 이 사건 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공격을 가하여 탈레반에 응징을 가했고 배후조종자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은 10년 후인 2011년 미국 측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탈레반은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세력을 넓혀 가다, 결국 다시 10년이 지난 후인 2021년 미국이 후원했던 정부는 붕괴하고 탈레반이 다시 권력을 쥐었으나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구 소련도 1980년대에 무리하게 아프간을 점령하다 한계에 달해 결국 공산주의 시스템 자체가 무너졌고, 미국도 20년 동안 막대한 재원을 투입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이 "제국의 무덤(p54)"으로부터 철수했습니다. 

시리아는 고대부터 지중해 무역의 한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던 나라였으나 알 아사드 부자(父子) 독재자가 수십 년 동안 철권을 휘두르면서 국민들의 생활이 매우 피폐해졌습니다. 어린이들의 낙서조차 관대히 보아넘기지 못하고 억압적인 조치를 취할 만큼 대단히 경직되고 폐쇄적인 정권인데, 이런 정부도 문제지만,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나 여성들의 목숨이 희생(p77)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 반정부군도 큰 문제입니다. 이 와중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까지 대두하여 죄 없는 시민들의 피해를 가중시키며, 특히 이들은 여성들에 대한 멸시, 가혹행위를 일삼아 전세계의 우려와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대체로 친 아사드 스탠스이며, 레바논도 이에 가깝고, 튀르키예는 자신들의 이해 관계(쿠르드 족 탄압) 때문에 현 정부를 편드는 형국이니 분쟁 해결의 경로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예멘은 겉으로는 하나의 나라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많은 부족들 간에 분쟁이 치열하여 하나로 모이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여기에 시아파, 수니파의 싸움까지 곁들여져, 마침내는 사우디와 이란이라는 두 종파의 맹주국까지 엮인 매우 복잡한 대결상이 벌어졌습니다. p93을 보면 2023년에 중국이 중재하여 두 대국 사이의 싸움은 일단 소강상태입니다만 언제 어떻게 대결이 재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몇 달 전 큰 인명피해를 빚으며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시작된 팔레스타인 사태는 수십 년 동안 곪아온 대립상이 마침내 폭발한 터라 세계인들이 우려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가자 지구를 다스리는 사람은 마흐무드 압바스이지만 p116에 나오듯 그는 요르단 강 서안만을 간신히 통치할 뿐이어서 현지의 혼란을 더합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도 막대한 돈을 썼으나 결국 성과가 없었고, 가장 심각했던 실패는 이라크에서였습니다. 1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했고 엄청난 양의 무기를 소진했으나 현지의 민심을 얻지 못했고 결국 나쁜 모양새로 발을 빼게 되었습니다. p161 이하에 나오듯 이른바 PMC라는 게 있어서 정부가 직접 나서지 못하는 전쟁터에 사실상 용역, 외주업체처럼 대신 나가 싸우는 병력, 기업체가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이런 조직이 있는데 작년에 큰 화제가 된 바그너그룹이 그것입니다. 

전쟁에서 끔찍한 짓을 누가 저질러도, 이를 그자리에서 제재하고 처벌하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전세계를 규율하고 질서를 세울 정부 같은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후적으로라도 누가 옳고 누가 반인도(反人道)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분명히할 필요(p183)가 있습니다. 그래야 비슷한 일의 재발을 막고, 시시비비를 가려 나중에라도 전범에의 단죄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 재판, 캄보디아 킬링필드 재판, 유고 내전 재판 등이 그 예입니다. 후세에 확실하게 잘잘못을 가려, 인류 역사가 조금이라도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확인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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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제가 가득한 챗GPT 프롬프트 길라잡이 - 한 권으로 끝내는 ChatGPT 입문!
이승우 지음 / 정보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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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라는 혁신 서비스가 샘 올트먼 CEO에 의해 개발되어 현재 전세계의 기업과 개인들에 의해 사용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엔진에 명령을 내리느냐에 따라 양질의 성과를 낼 수도 있고,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습니다. 본래 컴퓨터 서적은 예제가 많아야 학습자들이 읽고 잘 따라할 수 있지만, 특히나 주제가 챗GPT라면 책에는 프롬프팅의 예가 가득해야 도움이 되겠는데, 이 책에는 정말로 예제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또 저자가 운영하는 게시판에서 추가로 예제들을 다운받을 수 있는 점도 유익합니다.  

챗GPT에게 묻는 질문은 구체적일수록 좋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까다로우면 그 역시도 어려워할 수 있다고 합니다(p50). 생각할수록 놀라운데, 우리의 질문이 너무 높은 정확성을 요구하면 마치 자문을 받는 인간이 가끔 그러듯 그 성능의 발휘에 애로를 겪는다니... 책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것도 "너는 어떻게 추측하니?"처럼, 마음의 부담(?)을 낮춰주는 질문에 더 좋은 답을 내기도 한답니다. 물론 설계자가 그리 세팅을 했으니 그렇게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여튼 대단합니다. 

사람이 질문을 하면 챗GPT는 답변도 하고, 경우에 따라 추가 질문도 합니다. 이 책에는 사용자의 질문은 회색, 챗GPT의 답은 진연두색 바탕으로 처리하여 한눈에 구분되게 합니다. p117을 보면 사용자에게 식습관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는 요청에, 9가지에 걸친 추가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재요청을 하는 챗GPT의 긴 답변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챗GPT의 퍼포먼스가, 어떤 사람에게나 또 모든 경우에 일정 수준을 유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며, 우리들도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또 지금 성능의 챗GPT로부터도 뽑아낼 수 있는 건 다 뽑아내는 게 현명합니다. 

투자, 또 금융에 대한 질문은 사용자의 재산이 걸린 문제이므로 민감하기도 하고 난도도 높습니다. p152를 보면 사람이나 컴퓨터나 기 입력된 정보가 부족하면 뭔가 허술한 답이 나오는 건 닮았다고 생각되네요. 콩 심은 데 팥이 나긴 어렵습니다. 그 와중에도 질문이 더 특정된 수준이면 답변이 더 그럴싸해진다는 건데... p153에는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세 아파트 중(모두 그 실명이 나옵니다) 어느 것을 추천하겠냐고 프롬프팅하는 예가 나옵니다. 그에 대한 답은 꽤나 구체적인데, 답이 구체적인 것도 놀랍지만 정말로 사람이 손으로 발로 서치하고 사려깊게 상사에게 리포트를 올리는 말투라서 경이롭습니다. 

p167을 보면 사용자는 자산현황에 대해 묻는 어떤 폼을 써서, 그에 대해 답을 적은 다음 챗GPT에 입력합니다. 이렇게 해도 답이 나오나 봅니다. 답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챗GPT는 정말로 진지하게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컨설턴트처럼 "더 많은 정보를 알려 주시면 더 완전한 답을 해 드리겠다"는 듯, 구체적으로 폼까지 만들어 정보 입력을 요구합니다. 사람이라면 "내가 이 질문에까지 답을 해도 될까?"라며 망설이겠지만, 상대가 다른 마음 없는 기계라면 거리낄 게 없고 이 점이 챗GPT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 작곡가 김형석이 "AI가 이처럼 놀라운 성과를 내니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본인은 이미 평생 먹고살 돈을 다 벌었겠으나, 사람한테만 가능하리라 믿었던 예술 창작의 능력이 이미 기계로부터 충분히 증명되는 과정을 보며 어떤 신념, 긍지가 흔들리는 데서 나온 발언이겠습니다. p382 이하에는 그림 그리게 하는 방법이 나오는데, 책의 설명을 보면, 챗GPT는 이제 4.0 버전에서 달리 3가 채용됨에 따라 이미지 생성 기능도 (그전의 미흡하다는 평을 씻고) 훨씬 나아졌다는 반응이라고 합니다. 회사의 컨셉에 맞는 로고도 그려 주고(p386), p391 이하를 보면 심지어 그럴싸한 만화도 그립니다. 현재 한국은 세계적인 웹툰 강국으로서 이제 컨텐츠 생산에도 장점을 보이지만, 기술 발전 추세가 이런 걸 보면 대응책을 세워야 할 듯합니다. 

p191을 보면 콘텐츠 기획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챗GPT는 놀랍게도 사이트맵의 구조로 IA를 제시하는데, 아직은 이에 추가로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협업하여 세부 화면을 개발하는 단계가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 할루시네이션(p199)을 일으킬 수도 있으나, 원하는 수 만큼의 답변을 생성하는 게 기본이니 그 성능이 놀랍습니다. p366 이하를 보면 Replit을 이용한 코딩도 척척 해 내는데, 교육용 소프트웨어로서도 챗GPT가 탁월한 쓸모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여태 참조한 프롬프트 책 중에서는 내용이 가장 알차고 방대했던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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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는 편하게 살고자 하는가 라이즈 포 라이프 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요한 옮김 / RISE(떠오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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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나고 성장했으면서도 그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명철한 지성을 편히 쉬게 내버려 두지 않고 치열한 지적 모험에 몰두했습니다. "삶은 긴 죽음이다. 나는 왜 무수히 많은 이들의 생을 단축시켰고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지 못했던가? 왜 나는 냉정한 관객으로 죽는가?(p50)" 아우구스투스와 (바로 다음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최후는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맹렬하게 남의 고통과 시련에  공감하는 것도, 냉연히 그들을 관찰하는 것도, 정상적인 인간에게라면 사실 일관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죽음의 순간 미련이 남아 다시 몸부림쳤는데, 그에게 베개를 뒤집어씌운 건 일종의 coup de grace였는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이 악한 충동을 더 이상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으며, 세상은 이제 선(善)의 왕국으로 들어선 듯하다(p67)." 무슨 뜻일까요? 얼핏 보아 앞뒤가 모순인 듯해도, 중근세에 종교의 억압 때문에 욕망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며 과도한 죄의식에 시달리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그 무엇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더 편안히 세상만사를 대하게 되었다는 뜻 같습니다. 만취한 자가 거리에서 주정을 해도 단지 눈살을 찌푸리는 정도이지 누가 그에게 다가가 단죄를 하지는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공공장소에서 애정행각을 벌여도 그러려니하고 자기 갈 길을 갈 뿐입니다. 니체의 시대는 근 150년 전입니다만 이런 대세는 지금까지 큰 단절없이 방향을 잡은 듯도 합니다. 그러나 시대와 사람들이 이처럼 쿨해지는 것과 대조되어, 철학자와 사색가는 남들의 몫까지 더 괴로워하고 더 슬퍼합니다. 니체는 자신의 고뇌를 항상 "슬픔"에 포섭하는 게 독특한 태도입니다. 

선해 보일 뿐 내면까지 선해진 것은 결코 아니며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순백으로 거듭나기 무척 어렵습니다. 사람은 원래 모든 점이 불완전합니다. 다만 그 불완전함을 스스로도 싫어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p78에서는 시인의 예가 하나 소개됩니다. 이 시인은 스스로도 자신이 부족함을 알고 그의 작품을 읽는 대중도 그를 압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시인은 열정을 다해 무엇을 노래하며, 그런 몸부림이 좋아 대중은 그에게 환호를 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불완전함이 주는 매력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다면 그것은 신이며 신이 올림포스에서 내려와 예토에서 뒹굴 이유가 애초에 없습니다. 애쓰는 건 언제나 인간이며 그래서 인간들의 박수를 받습니다. 

니체는 신이 죽었음을 선언했던 사람이며 그 이전에도 그런 말을 한, 혹은 행동으로 표명한 사람들은 있었겠으나 유독 우리가 니체를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p86의 다음과 같은 서술이 인상적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주는 본래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에 온갖 불운을 다 갖고 태어난 사람, 혹은 대단히 부당하고 부조리한 사건을 볼 때 우리는 개탄하며 세상에 정의가 없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것이, 종교인들이 가르치듯 우리에게 신이 어떤 심오한 이치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결과 같은 게 아님을 강조합니다. 아무 의미도 부여할 것 없고, 우주와 세상이 본래 그처럼이나 무작위하고 부조리함을 그대로 수용하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하긴 세상의 모순을 있는그대로 이해할 때 어떤 바른 타개책이 더 눈에 바로 들어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재자(p146)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인가? 니체는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를 단순화하거나 호도하여 더 키우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는 듯합니다. 물론 세상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분쟁을 해결해야지, 어디 갈데까지 가보자는 식이 더 많다면 어디 싸움, 불화, 폭력이 그칠 날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히틀러도 이런 그의 말을 부분에만 주목하여 곡해하다가 그지경까지 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니체는 문제를, 현상을, 본연의 모습 그대로 봐야지 어떤 해석이나 프레임에만 기대면 발전이라는 게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자신을 어둡게 만들거나, 상대를 압도하거나 처벌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p202). 아마 이 대목을 히틀러는 안 읽은 듯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장점을 키우고 선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들어야 하며, 이런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할 때 공동체도 개인도 번영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 길은 결코 안일하고 평안하지만은 않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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