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일각돌고래라면 -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편견에 대하여
저스틴 그레그 지음, 김아림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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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고통받고 혹사에 시달리는 말을 보고 격하게 공감하다 정신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고 하니, 어쩌면 생전 한 번 정도 일각돌고래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봤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저명한 동물학자이며 돌고래류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인데, 특히 지능이 높다고 알려진 돌고래를 연구하다 보면 과연 인간만이 최고의 지성, 감정을 갖고 이 지구의 중심에 선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갖던 착각이나 선입견과는 아주 다른 실체를 갖거나, 생각도 못했던 어떤 심오한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랑우탄이나 고릴라 등의 행태를 보면 아득한 옛날, 이 책 p48 이하의 서술을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갓 나온 우리의 조상들(호모 사피엔스)이, 그보다 먼저 유럽에 도달했던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과 만나 항쟁하고, 일부는 교접하여 미량의 DNA를 남기기도 한 과정, 이 과정이 얼마나 척박하고 야만적이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지혜가 있었으며, 인간미나 도덕이 발휘되었을까요. 예의나 문명인적인 수치심은 극히 최근에 계발되었을 뿐이며, 그조차도 어떤 큰 의미가 있을지는 더 따져 봐야 합니다. 저 바다에서 평화롭게 장난치고 가끔은 인간더러 씩 미소까지 짓는 돌고래들이, 지금으로부터 2백만 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해양과 육지를 노닐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의 종에 행성을 지배할 배타적 자격이나 신분이 주어진 건 아닙니다. 2만 년, 십만 년, 이백만 년의 시간 단위는 인간 두뇌의 용량으로 참된 의미를 헤아릴 대상이 아니니 말입니다. 

한 시대 과학계의 대세, 다수설 비슷한 위상이었던 주장이라고 해도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면 논파, 도괴되기도 합니다. p76을 보면 19세기 미국 새뮤얼 모턴이 주장했던 다원설은 종교계와 과학계의 입장을 묘하게 절충한 듯하지만 결국은 폐기되어 지금은 조소의 대상일 뿐입니다. 과학은 때로 과학 외적인 이유에 의해 학설의 당부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이 역시 인간이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가끔 "고양이 입장에서 본 세상, 인간" 같은 코믹 짤을 보기도 하는데, 저자는 p79에서 "과연 자산 포트폴리오를 짤 때 전문가가 짠 치밀한 계획과, 우리 집 고양이가 멋대로 결정한 것 중 전자가 낫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많은 변수에 의해 움직이고, 우리의 두뇌는 그에 비해 용량이 빈약하니 배후의 이치와 원리를 다 깨닫기에 역부족입니다. 

사람도 본래 거짓말을 못하게 된 동물입니다. 거짓말을 진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면, 거짓말탐지기 같은 기계가 아예 전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지금도 제한적으로만 쓸모있지만). 저자는 원래 동물들은 정직하게만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합니다(p120). 거짓은 개체의 생존에 일시적으로 유리하지만 결국은 모두에게 피해를 주므로 없는 편이 나은데, 인간이란 동물은 어리석게도 해로운 잔꾀를 부리다가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개체 입장에서도 애초에 거짓말을 안 하는 편이 신뢰를 쌓을 수 있으므로 더 유리한 선택인데... 이렇게 한 치 앞을 못 보고 동물보다 못한 짓을 하면서 무슨 만물의 영장이겠습니까. "자연은 이미 동물에게서 헛소리를 최소화하는 체계를 만들어냈다.(p120)" 

우리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은 침팬지입니다. 침팬지는 과연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저자는 아마 모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야생의 공격에 경솔하게 노출되어 치명상을 입기 꺼리는 건 그저 감각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지, 죽음과 소멸에 대한 자각의 발로라고 보기 힘듭니다. 사람이 나머지 영장류와 결정적으로 차별점을 마련한 건,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부터라고 저자는 말합니다(p147). 구석기시대 사람들도 동굴 생활을 하며 종교, 예술에 대한 개념을 키우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통찰했다고들 주장됩니다. 

사람들이 타 동물들에 비해 도드라지게 갖는 특징이 모두, 진화에 필수적으로 요구된 자질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앞서 말한 거짓말하는 재주 같은 건, 그런 것도 만물의 영장이기에 갖추게 된 신성한 능력이며 단지 잘 쓰기만 하면 충분하다,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시스템상의 버그일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반면 죽음에 대한 각성은,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도구 개발의 필요를 더 절실히 느끼고, 위험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동료들과 더 긴밀히 소통하고(언어의 발달), 생명 귀한 줄 알아서 도덕성이 발달하고, 자손 남기는 게 영생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 여겨 성행위에서 더 쾌감을 느끼기(다른 동물의 교미는 매우 짧고 슬프기까지 함) 때문에, 이야말로 진화의 결정적 도약 단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우리처럼 공동주택에 살지 않기 때문에 정원, 잔디밭 가꾸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잔디밭을 가꾸는 건 크게 보아 지구에 해롭고 저자는 기후위기의 한 요인이라고까지 말합니다(본인도 여태 1000시간 이상을 쏟았다고 고백). 저자는 미국과 많은 걸 공유하는 캐나다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건데, 독자인 제 생각에는 조금 과장이라고 봅니다. 여튼 저자는 이를 예지적 근시(근시안적 예지가 아니죠!ㅋ)라 부르는데, 이런 인지부조화 때문에 결국 인간은 (어느 정도 현명한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멸망의 위기로 조금씩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본디 당장의 위기만을 모면하게 설계된 불쌍한 존재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페니실린이라는 항생제가 우연한 어떤 실수로부터 개발되었을 때 인류는 이제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20세기말에 슈퍼항생제로도 박멸이 힘든 슈퍼박테리아의 출현으로 고생했으며 지금까지도 딱히 대응책이 없어, 그저 항생제 처방 자제만을 되뇌는 처지입니다. 한국전 당시 미군들은 몸에 이, 빈대가 끓는 한국인의 몸에 DDT를 살포하며 미개인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럽, 미국에서 어떤 살충제로도 잘 안 죽는 베드버그가 나와 골칫거리입니다. "예지적 근시 때문에 인간의 인지 전략이 크게 몰락했다는 증거(p287)"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 제목에 니체가 왜 쓰였는지는 p314에 비로소 나옵니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소떼를 보고 사람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쓸데없는 궁리 끝에 자기 무덤을 파는 인간과 소 중 지구상에서 과연 누가 오래 살아남을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오히려 소만도 못하다고 했었습니다. 저자는 이에 착안하여 책을 쓴 것인데, 마치 동양의 노장 사상과도 통하는 듯한 저자의 결론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겠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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