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 : 옥구슬 민나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3
김여름 외 지음, 김다솔 해설 / 열림원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중산책(김여름)>. 아주 예전 정동에 "허리우드"라는 극장이 있었는데 대략 15년 전에 문을 닫고 서울아트시네마라는 시설로 바뀌었습니다. p7에서 언급되는 그 시설인데, 놀랍게도 작품 중에서 저 "허리우드"라는 극장이 언급됩니다. 할머니(p12) 정도나 되어야 아는 건 아니고 대략 60대 이상이면 개봉관 노릇도 했던 저 극장을 알 만합니다. 루(p13)나 나나 그렇게 나이 든 영혼은 아닌데, 다만 할머니 말대로 손녀딸과 함께 온 기억이 있다면... 안소니 만의 <분노의 강> 정도는 되어야 그 극장에 걸릴 만했겠죠? 물론 1980년대 <인디아나 존스2> 같은 것도 상영했겠지만... p25에서 나는 루가 사라졌다고 했지만 사실 죽은 건 자신입니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켜지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듯, 루와 나는 만났다가 헤어졌다가를 반복합니다. 결말에서 "투명해진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면서도 슬펐습니다. 시기도 그렇고 이름이 생각 안 난다던 그 프랑스 감독은 아마 에릭 로메르가 아닐지 독자인 제 맘대로 짐작해 봅니다. 

<블러링(라유경)>. 이상하지만 물이 맛있을 때가 있습니다. 꼭 명품 생수를 어쩌다 마실 때가 아니라(그런 경우는 아쉽게도, 맛이 잘 분간 안 됩니다), p31에 나오는 대로 특정 장소 상황에서 이상하게 물이 별나게 땡기고 맛있습니다. 물의 맛까지 분별될 때가 다 있는데, 너무나 친했고 잊혀질 리가 없는 사람이 잘 생각 안 날 때가 간혹 있어서 당혹스럽습니다. "텀블러에 넣고 액체를 가져갈 때, 그 액체를 죽이는 거나 다름없다(p33)."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짐작도 될 것 같습니다. 떠난 사람은 그냥 그대로 두어야지, 내가 내 마음대로 기억에서 가공하고 집착하고... 이건 그이를 다시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목의 블러링이 무슨 뜻일까 했는데 주인공의 직업이었습니다. 스트리트뷰 사진이 다 그렇지만 특히 교도소 근방이라면 이 작업이 더욱 필요하겠습니다. 언니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한 천미정을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는 주인공의 되뇜이 처음보다 나중에 더 공감되었습니다.   

<정글의 이름은 토베이(서고운)>. 확실히 순지라는 이름이 귀엽기는 합니다. 점 하나 더 찍었을 뿐인데 순자라는 보편적인 이름은 하나도 귀엽지 않은데 말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아니, 같은 일이 아니지만), 박준수는 수잔의 세 배 급여를 받습니다. 수잔이라는 새 이름은 순자의 아나그램이기도 하네요. 순자나 수잔이나 다 예스럽긴(p65) 마찬가지인데, 어차피 고객들은 상담직의 이름에 신경 안 쓴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외에 다른 나라들은 치안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 "토베이 아줌마"가 혹시 걱정하던 대로 기어이 마닐라에서는 테러가 터지고(물론 서로 지구 반대편입니다만) 아들은 그냥 장가를 보내기로 했는지 유학 계획을 접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 속에 변하는 게 뭐가 있을까 싶어도 뭔가가 조금씩은 변하고 있고 그러다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신경 쓰입니다. 이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체근무(성해령)>. "가끔은 아기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기도 하더라고요.(p99)" 아직 채 살아 보지도 못하고 갓난아기들이 죽는다는 게 너무도 부조리하지만 사실 죽음 앞에 가장 무방비로 노출된 게 아기들입니다. 어른들과 시스템의 보호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설에서 근무하는 단강 역시, 딴에는 각오도 있고 남들이 함부로 보지 못할 스펙도 쌓은 것 같으나 사실 취약하기 짝이 없는 신분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때로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동요합니다. 느닷 벌어진 혐오 테러(?)의 여파를 보며 단강은 가뜩이나 회의를 느끼던 자신의 처지에 대해 환멸을 절감합니다. 

<통신광장(예소연)>. 아무리 포털 네이티브라고 해도 유니텔이란 이름은 그 부모님 세대나 되어야 들어봤을 것 같습니다. PC 통신 대화라는 건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불륜드라마 어느 에피소드 재방송에서나 구경할 수 있을 것 같고 말입니다. 이런 가상공간을 "방"이라 부르는 것도 PC 통신 시절부터의 관행입니다. 여인1, 여인2, 어색한 "님"자 존칭... 막상 현실공간에서 서로 만나기라도 하면 실망에 표정이 찌푸려지다가도 티를 안 내려 기를 쓰고 관리를 합니다. 현실이나 가상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은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귀착하고, 접속이 종료된 마음은 "안락하면서도 동시에 안락하지 않은(p139)" 상태로 이만하면 해피엔드라고 타협합니다. 

"민나는 민나의 어머니보다 더 먼저 태어났다(p143, p155)." 원인보다 결과가 선행하는 건 이 3차원 세상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어떤 딸들은 엄마들보다 더 어른스럽기도 합니다. 민나는 호박벌, 도롱뇽 등 모든 자연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심지어 그들과 혈연관계인 듯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등바등 살고, 추한 모습으로 늙어가는 게 무슨 "득"이 된다고 이 난리통일까요? 자식이 아버지를 낳고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자연과 화합하여 무(無)로 돌아가기도 하는 게 우주의 섭리지만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가 의미없이 설정해 둔 규칙에 따라 삶을 소진합니다. 그 모든 게 다 무슨 득이랍니까. 알고 보면 온 우주가 작은 옥구슬 안에 들어갈 만큼 빤한지도 모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스널 브랜딩 피부 - 나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아름다움의 전략을 찾아라
남수현 지음 / 라온북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은 피부 상태, 얼마나 관리가 잘 되어 있는지도 그 사람의 역량, 실력을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하긴 나부터도 상대방의 그 부분을 보는데, 상대도 나한테 그 기준을 적용하는 건 당연합니다. 저자 남수현 원장은 이미 책을 몇 권 쓴 분인데, 이 책에서는 우리들이 일상에서 행할 수 있는 피부 관리 방법이 서술되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피부가 좋아지려면 행동과 습관이 바뀌어야 한다(p62)." p6에 안색이 좋아지게 하는 방법이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일단 수분이 충분하게 섭취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최소 1리터를 권하며, 적게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모든 습관 개선이 그렇지만, 자신의 피부 상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꼼꼼하게, 정직하게 기록하는 게 중요합니다. 자외선 노출에는 뭐 답이 없으므로, 차단 크림을 철저하게 바르고, 세안, 그리고 운동을 빠지지 않고 이어가는 걸 저자는 강력하게 권합니다. 

요즘 텔로미어 이야기를 주변에서 참 자주 하는데, p90에서 저자도 그 말씀을 꺼냅니다. 결론은 세포가 건강해야 피부가 좋아지고 나아가 내 몸도 건강해진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는 데는 2016년의 두 우주 비행사 사례가 있어서입니다. 참 신기한 게, 우주에서의 거친 습관이 중단되자 곧바로 텔로미어 길이가 정상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스트레스는 자율 신경계에서 관할하는데, 저자는 딥 브리딩(p98)이 매우 유익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습관이 된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항상 눈여겨 보게 되는 게, 어떤 음식을 먹어야 피부에 좋은 영향을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p136을 보면 효소, 유산균이 강조됩니다. 효소는 enzyme, 유산균은 probiotic이라고 영어로 쓰는데, 요즘은 하도 방송에서 자주 광고를 하니 일반인들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이어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첫째 장내미생물 균형, 둘째 면역시스템 강화, 셋째 염증 감소, 넷째 앞에서 말한 효소와 영양소 흡수 촉진입니다. 

또 우리가 뻔히 알면서도 소홀히하는 게 클렌징(p151)입니다. 클렌징을 빈틈없이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피부장벽 손상 방지, 탈수 예방, 민감도 감소(물론, 감소가 좋은 것입니다), 여드름 방지, 최종적으로 노화 예방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는 노폐물이 자주자주 제거되고, 탄력 역시도 더 강화됩니다. 세안 중에는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러빙(rubbing)하는 게 하나의 요령이라고 합니다. 오일 클렌저(1차), 폼 클렌저(2차)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p196 이하에 나옵니다.  

p170 이하에 나오는 피부 각질화 과정은 설명이 매우 잘 되어 있어서 교과서로 써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략 그 주기가 28일이라고 하는데 일러스트도 깔끔하게, 나와야 할 대목만 잘 나와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각질 주기도 얼굴의 부위에 따라 다 다른데, 관리 시에는 이 부분에 유의해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도 식단이 매우 중요한데, 식단 계획과 차림 시의 유의점에 대해서는 p172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반신욕(p187)은 절차가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탁월하여 많은 이들이 선호합니다. 얼굴 홍조, 몸에 열이 많은 이들, 하지정맥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특히 효과를 보는데 저자는 이 방법으로 1,000명이 도움을 받았다며 특히 힘을 주어 추천합니다. 그 외에도 "여자는 365일 다이어트 하는 존재"라고도 말씀하시는데, 이제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그렇게 하는 시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권말에는 많은 이들이 피부관리 관련해서 가장 많이들 물어 온 사례가 정리되었습니다. 이 대목도 공감하며 꼼꼼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오로지 피부에 대한 이야기들만 잘 소개되어서 유익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받는 이기주의자 - 나를 지키며 사랑받는 관계의 기술
박코 지음 / 북플레저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콤플렉스는 완벽하게 극복할 필요는 없다. 약점이 아무리 많아도 장점을 그 이상으로 보여 주면 그만이니까(p37)." 남들은 의외로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내 약점을 가리려고 애 써 봐야 본인만 피곤하지 다 헛수고입니다. 반면 내 장점을 키운다면, 그 장점은 어디서건 써먹을 수나 있으므로 이런 건 뭐가 남아도 남는 노력입니다. 저자 박코는 "콤플렉스를 인정하되, 콤플렉스만 바라보지는 말자"고도 합니다. 

호불호가 강한 사람은 보통 주변에서 싫어들 합니다(p76). 그런데 저자는 거꾸로, 호불호가 강한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호불호가 없을 수 있는가. 사면춘풍형 인간은 얼핏 보면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휴먼 엔지니어링에 능숙한 음모가일 수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화끈한 사람이 훨씬 든든한 동맹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괜히 쿨한 척 평소에는 연기를 하다가 나중에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더 징징거리는 인간이, 상대하기에는 더 피곤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단순행동과 지속행동이 있어서 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일회성으로 하는 말이 아무리 강하고 자신있더라도, 이런 걸로는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에, 혹 "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설마 거짓말이겠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알아서 호구가 되는 길(p111)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려면 "지속 행동"을 봐야 한다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자리에서는 티를 내지 말고, 태연하게 넘긴 다음에 차라리 뒤에서 욕을 하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게 바로 사람의 적응력(p117)을 보여 주는 척도이며, 그 정도 공격에는 눈도 깜짝않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상대를 거꾸로 동요시킬 수 있습니다. 또 상대의 말과 행동에 너무 빨리 반응하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반응이 빠르다는 건 그 사람이 그만큼 두뇌 회전이 빠르다는 증명(p135)인데, 그건 실제로는 별 효과가 없는 전략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반응이 빠르면 물론 머리는 좋겠으나 사람이 가벼워 보이며, 반대로 말 없이 묵묵히 응시하는 상대에 대해 "헉, 뭐지?"라며 더 긴장하게 된다는 거죠. 

이 책에는 텍스트 대화 시 괜히 이모티콘, 초성을 붙이지 말라고도 합니다. 쓸데없이 이러는 사람은 가벼워 보이고, 뭔가 관계가 진척 안 될까봐 초조하고 위축되었기에 이럴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또 저자는 이런 사람들이 "내적인 부정성이 어느 한계를 넘었"기에 이런 행동이 나타난다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저자도 이런 자신의 주장에 대해 비약이라며 반박이 들어올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하지만 꽤나 날카로운 지적이며, 100%까지는 아니라도 이런 진단이 맞을 부류가 꽤 높은 빈도로 존재할 가능성도 생각은 좀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이러한 말을 던졌는데, 왜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을까? 사람은 매우 다차원적인 존재(p123)라서라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나도 누가 이렇게 찔렀을 때 상대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는데, 상대라고 내 뜻대로 그렇게 고분고분 움직여 주겠습니까. 또 사람은 워딩 자체보다, 말을 하는 분위기, 표정 등에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어쩌라고?"라든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무책임합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더이상 당신하고 소통을 안 하겠다는 뜻이니, 정말 그럴 작정이 아니라면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합니다.
목차만 봐도 내용이 궁금해지는 멋진 주제가 많고, 살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는 예리한 통찰이 많았습니다. 남 앞에 구태여 나를 희생하면서 관계를 지속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전제 하에, 유익한 충고가 많아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가 일각돌고래라면 -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편견에 대하여
저스틴 그레그 지음, 김아림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니체는 고통받고 혹사에 시달리는 말을 보고 격하게 공감하다 정신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고 하니, 어쩌면 생전 한 번 정도 일각돌고래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봤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저명한 동물학자이며 돌고래류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인데, 특히 지능이 높다고 알려진 돌고래를 연구하다 보면 과연 인간만이 최고의 지성, 감정을 갖고 이 지구의 중심에 선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갖던 착각이나 선입견과는 아주 다른 실체를 갖거나, 생각도 못했던 어떤 심오한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랑우탄이나 고릴라 등의 행태를 보면 아득한 옛날, 이 책 p48 이하의 서술을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갓 나온 우리의 조상들(호모 사피엔스)이, 그보다 먼저 유럽에 도달했던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과 만나 항쟁하고, 일부는 교접하여 미량의 DNA를 남기기도 한 과정, 이 과정이 얼마나 척박하고 야만적이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지혜가 있었으며, 인간미나 도덕이 발휘되었을까요. 예의나 문명인적인 수치심은 극히 최근에 계발되었을 뿐이며, 그조차도 어떤 큰 의미가 있을지는 더 따져 봐야 합니다. 저 바다에서 평화롭게 장난치고 가끔은 인간더러 씩 미소까지 짓는 돌고래들이, 지금으로부터 2백만 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해양과 육지를 노닐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의 종에 행성을 지배할 배타적 자격이나 신분이 주어진 건 아닙니다. 2만 년, 십만 년, 이백만 년의 시간 단위는 인간 두뇌의 용량으로 참된 의미를 헤아릴 대상이 아니니 말입니다. 

한 시대 과학계의 대세, 다수설 비슷한 위상이었던 주장이라고 해도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면 논파, 도괴되기도 합니다. p76을 보면 19세기 미국 새뮤얼 모턴이 주장했던 다원설은 종교계와 과학계의 입장을 묘하게 절충한 듯하지만 결국은 폐기되어 지금은 조소의 대상일 뿐입니다. 과학은 때로 과학 외적인 이유에 의해 학설의 당부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이 역시 인간이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가끔 "고양이 입장에서 본 세상, 인간" 같은 코믹 짤을 보기도 하는데, 저자는 p79에서 "과연 자산 포트폴리오를 짤 때 전문가가 짠 치밀한 계획과, 우리 집 고양이가 멋대로 결정한 것 중 전자가 낫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많은 변수에 의해 움직이고, 우리의 두뇌는 그에 비해 용량이 빈약하니 배후의 이치와 원리를 다 깨닫기에 역부족입니다. 

사람도 본래 거짓말을 못하게 된 동물입니다. 거짓말을 진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면, 거짓말탐지기 같은 기계가 아예 전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지금도 제한적으로만 쓸모있지만). 저자는 원래 동물들은 정직하게만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합니다(p120). 거짓은 개체의 생존에 일시적으로 유리하지만 결국은 모두에게 피해를 주므로 없는 편이 나은데, 인간이란 동물은 어리석게도 해로운 잔꾀를 부리다가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개체 입장에서도 애초에 거짓말을 안 하는 편이 신뢰를 쌓을 수 있으므로 더 유리한 선택인데... 이렇게 한 치 앞을 못 보고 동물보다 못한 짓을 하면서 무슨 만물의 영장이겠습니까. "자연은 이미 동물에게서 헛소리를 최소화하는 체계를 만들어냈다.(p120)" 

우리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은 침팬지입니다. 침팬지는 과연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저자는 아마 모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야생의 공격에 경솔하게 노출되어 치명상을 입기 꺼리는 건 그저 감각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지, 죽음과 소멸에 대한 자각의 발로라고 보기 힘듭니다. 사람이 나머지 영장류와 결정적으로 차별점을 마련한 건,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부터라고 저자는 말합니다(p147). 구석기시대 사람들도 동굴 생활을 하며 종교, 예술에 대한 개념을 키우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통찰했다고들 주장됩니다. 

사람들이 타 동물들에 비해 도드라지게 갖는 특징이 모두, 진화에 필수적으로 요구된 자질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앞서 말한 거짓말하는 재주 같은 건, 그런 것도 만물의 영장이기에 갖추게 된 신성한 능력이며 단지 잘 쓰기만 하면 충분하다,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시스템상의 버그일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반면 죽음에 대한 각성은,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도구 개발의 필요를 더 절실히 느끼고, 위험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동료들과 더 긴밀히 소통하고(언어의 발달), 생명 귀한 줄 알아서 도덕성이 발달하고, 자손 남기는 게 영생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 여겨 성행위에서 더 쾌감을 느끼기(다른 동물의 교미는 매우 짧고 슬프기까지 함) 때문에, 이야말로 진화의 결정적 도약 단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우리처럼 공동주택에 살지 않기 때문에 정원, 잔디밭 가꾸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잔디밭을 가꾸는 건 크게 보아 지구에 해롭고 저자는 기후위기의 한 요인이라고까지 말합니다(본인도 여태 1000시간 이상을 쏟았다고 고백). 저자는 미국과 많은 걸 공유하는 캐나다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건데, 독자인 제 생각에는 조금 과장이라고 봅니다. 여튼 저자는 이를 예지적 근시(근시안적 예지가 아니죠!ㅋ)라 부르는데, 이런 인지부조화 때문에 결국 인간은 (어느 정도 현명한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멸망의 위기로 조금씩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본디 당장의 위기만을 모면하게 설계된 불쌍한 존재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페니실린이라는 항생제가 우연한 어떤 실수로부터 개발되었을 때 인류는 이제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20세기말에 슈퍼항생제로도 박멸이 힘든 슈퍼박테리아의 출현으로 고생했으며 지금까지도 딱히 대응책이 없어, 그저 항생제 처방 자제만을 되뇌는 처지입니다. 한국전 당시 미군들은 몸에 이, 빈대가 끓는 한국인의 몸에 DDT를 살포하며 미개인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럽, 미국에서 어떤 살충제로도 잘 안 죽는 베드버그가 나와 골칫거리입니다. "예지적 근시 때문에 인간의 인지 전략이 크게 몰락했다는 증거(p287)"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 제목에 니체가 왜 쓰였는지는 p314에 비로소 나옵니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소떼를 보고 사람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쓸데없는 궁리 끝에 자기 무덤을 파는 인간과 소 중 지구상에서 과연 누가 오래 살아남을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오히려 소만도 못하다고 했었습니다. 저자는 이에 착안하여 책을 쓴 것인데, 마치 동양의 노장 사상과도 통하는 듯한 저자의 결론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겠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의 열두 달 - 고대 이집트에서 1년 살기
도널드 P. 라이언 지음, 우진하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 문명의 고전 원류는 보통 그리스, 로마를 꼽습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훨씬 앞서 선진 농경 문명, 중앙 집권 국가 시스템을 만든 곳은 지중해 맞은편의 이집트였으며, 이들은 또한 다채로운 신화 체계까지 창조하여 풍성한 정신 문화까지 항유했습니다. 그들 제국의 엄청난 위세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피라미드라는 유적을 통해 확인되며, 아직까지도 어떻게 이들 건축이 가능했는지 정확하게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이며 영감(inspiration)의 고향입니다(p299). 

p30을 보면 이집트의 행정구역이 설명됩니다. 저자는 적절하게도 이를 그리스의 노모스에 비깁니다. 우리가 이집트 관련하여 유념해야 할 것은, 위도상 북부, 즉 나일 강의 하류를 하(下) 이집트라 부르고, 남부 즉 나일 상류를 상(上) 이집트라 부르는 관행입니다. 하 이집트에 22개의 행정구역이, 상 이집트에 20개가 위치했다고 책에 나옵니다. 멤피스는 그리스식 이름이며 구약의 히브리 이름으로는 바로 "놉"입니다. 이곳은 하 이집트의 수도였으며, 테베(룩소르)는 상 이집트의 중심지였고 후기의 수도입니다. 두 도시 모두 현재는 관광지로 유명할 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후에는 알렉산드리아, 이슬람화 후에는 카이로가 새로 수도로 기능했습니다. 

p45에서 보듯 "모세"라는 어근은 파라오들의 호칭에서 자주 보입니다(p178, p185에서도). 이는 고대 이집트어 "물", 혹은 "출산"과 연결되었다고 추정됩니다. 히브리인들의 해방자, 신에게서 십계를 받았다고 알려진 모세도 이들 이름과 같은 계열이겠고 말입니다. 책에는 아멘호테프 파라오의 행적을 소개한 후, 역사 소설처럼 그의 구체적인 하루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라는 말이 있듯, 절대 군주 파라오의 삶이 마냥 향락과 권력 행사로만 가득했던 게 아니라 이처럼 책임감과 중압감도 그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입니다. 

예수의 12제자들도 상당수가 어부들이었지만 이보다 수천 년 앞선 고대의 이집트에서도 단백질원인 생선을 잡아 유통하는 직업(p70)이 널리 성행했었습니다. 책에는 가상의 어부 네페르가 등장하여 그 팍팍한 삶이 소개됩니다. 곡식은 어느 정도 보관과 유통이 가능했으므로 수탈의 대상이 되었지만, 어육은 어차피 상품화에 한계가 있으므로 상당부분은 본인이 소비 가능했고(비록 잉여의 부 축적은 어려웠겠으나), 삶이 비록 중노동으로 점철되었으나 적어도 배를 곯을 일은 없었겠습니다. 그래서 저 네페르도 자신의 처지에 저렇게 만족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paper라는 단어 자체가 그리스어를 거쳐 고대 파피루스(p99)에서 기원했습니다. 파퓌로스 자체는 그리스어이며, 정작 이집트어로 그 특산품(p99)인 종이(이후 많은 변천을 겪었습니다)를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54년 미국 영화 <The Egyptian>에도 나오듯이, 이집트는 풍족한 곡물 생산을 바탕으로 다채롭게 상업이 발달한 나라였으며 p100 이하에도 포도주 거래 등 재미있는 상거래 상황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혼인 잔치(p108, p280)는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의 가장 흥겨운 행사이며 이때로부터 수천 년 후 예수 그리스도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첫 기적을 행했다고 전합니다. 

먼 시골에 사는 이들은 가난하고 일상의 노동이 힘들었던 데다 정보가 부족해서 중앙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 주변의 백성들은 임금이 지근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혹 궁정에 변화라도 생기면 당장 이를 화제로 삼아 장래 정국의 향방을 점치곤 했겠습니다. 파라오가 붕어(崩御)하면 누가 제위를 계승할까? 그러나 이 책 주인공 중 하나인 어부 네페르(선한 자)는 "누가 파라오가 되든 나는 오늘도 내일도 고기를 낚겠지."라며 세상의 변함 없는 이치를 읊습니다. 

우리는 신라 지증왕 때 우경(牛耕)을 도입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농경이 시작된 이집트에서는 신라보다 수천 년 앞서 소를 길렀으며, 이 책에는 목동들이 소 기르는 일을 맡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피스라고 신성시되던 소는 미라(mummy)로 만들어졌다는 서술도 있습니다. 태양력을 채택했던 이집트는 그들의 책력으로 열번째 되던 달 보름에(이것만큼은 달을 보고 정함) 계곡 축제라는 걸 벌였는데, 우리의 주인공 네페르보다는 훨씬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이 축제를 가장 기다렸다고 하며(p245), 이야기 속에서는 여사제 마트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네요. 

동양이든 서양이든 하층민들의 생이 팍팍했고 중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이웃 나라와의 교역에 경제가 크게 의존했던 일, 장삼이사의 희로애락이 인륜지대사에 좌우되었던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이 재미있는 고대 이집트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