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 : 옥구슬 민나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3
김여름 외 지음, 김다솔 해설 / 열림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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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산책(김여름)>. 아주 예전 정동에 "허리우드"라는 극장이 있었는데 대략 15년 전에 문을 닫고 서울아트시네마라는 시설로 바뀌었습니다. p7에서 언급되는 그 시설인데, 놀랍게도 작품 중에서 저 "허리우드"라는 극장이 언급됩니다. 할머니(p12) 정도나 되어야 아는 건 아니고 대략 60대 이상이면 개봉관 노릇도 했던 저 극장을 알 만합니다. 루(p13)나 나나 그렇게 나이 든 영혼은 아닌데, 다만 할머니 말대로 손녀딸과 함께 온 기억이 있다면... 안소니 만의 <분노의 강> 정도는 되어야 그 극장에 걸릴 만했겠죠? 물론 1980년대 <인디아나 존스2> 같은 것도 상영했겠지만... p25에서 나는 루가 사라졌다고 했지만 사실 죽은 건 자신입니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켜지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듯, 루와 나는 만났다가 헤어졌다가를 반복합니다. 결말에서 "투명해진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면서도 슬펐습니다. 시기도 그렇고 이름이 생각 안 난다던 그 프랑스 감독은 아마 에릭 로메르가 아닐지 독자인 제 맘대로 짐작해 봅니다. 

<블러링(라유경)>. 이상하지만 물이 맛있을 때가 있습니다. 꼭 명품 생수를 어쩌다 마실 때가 아니라(그런 경우는 아쉽게도, 맛이 잘 분간 안 됩니다), p31에 나오는 대로 특정 장소 상황에서 이상하게 물이 별나게 땡기고 맛있습니다. 물의 맛까지 분별될 때가 다 있는데, 너무나 친했고 잊혀질 리가 없는 사람이 잘 생각 안 날 때가 간혹 있어서 당혹스럽습니다. "텀블러에 넣고 액체를 가져갈 때, 그 액체를 죽이는 거나 다름없다(p33)."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짐작도 될 것 같습니다. 떠난 사람은 그냥 그대로 두어야지, 내가 내 마음대로 기억에서 가공하고 집착하고... 이건 그이를 다시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목의 블러링이 무슨 뜻일까 했는데 주인공의 직업이었습니다. 스트리트뷰 사진이 다 그렇지만 특히 교도소 근방이라면 이 작업이 더욱 필요하겠습니다. 언니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한 천미정을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는 주인공의 되뇜이 처음보다 나중에 더 공감되었습니다.   

<정글의 이름은 토베이(서고운)>. 확실히 순지라는 이름이 귀엽기는 합니다. 점 하나 더 찍었을 뿐인데 순자라는 보편적인 이름은 하나도 귀엽지 않은데 말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아니, 같은 일이 아니지만), 박준수는 수잔의 세 배 급여를 받습니다. 수잔이라는 새 이름은 순자의 아나그램이기도 하네요. 순자나 수잔이나 다 예스럽긴(p65) 마찬가지인데, 어차피 고객들은 상담직의 이름에 신경 안 쓴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외에 다른 나라들은 치안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 "토베이 아줌마"가 혹시 걱정하던 대로 기어이 마닐라에서는 테러가 터지고(물론 서로 지구 반대편입니다만) 아들은 그냥 장가를 보내기로 했는지 유학 계획을 접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 속에 변하는 게 뭐가 있을까 싶어도 뭔가가 조금씩은 변하고 있고 그러다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신경 쓰입니다. 이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체근무(성해령)>. "가끔은 아기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기도 하더라고요.(p99)" 아직 채 살아 보지도 못하고 갓난아기들이 죽는다는 게 너무도 부조리하지만 사실 죽음 앞에 가장 무방비로 노출된 게 아기들입니다. 어른들과 시스템의 보호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설에서 근무하는 단강 역시, 딴에는 각오도 있고 남들이 함부로 보지 못할 스펙도 쌓은 것 같으나 사실 취약하기 짝이 없는 신분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때로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동요합니다. 느닷 벌어진 혐오 테러(?)의 여파를 보며 단강은 가뜩이나 회의를 느끼던 자신의 처지에 대해 환멸을 절감합니다. 

<통신광장(예소연)>. 아무리 포털 네이티브라고 해도 유니텔이란 이름은 그 부모님 세대나 되어야 들어봤을 것 같습니다. PC 통신 대화라는 건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불륜드라마 어느 에피소드 재방송에서나 구경할 수 있을 것 같고 말입니다. 이런 가상공간을 "방"이라 부르는 것도 PC 통신 시절부터의 관행입니다. 여인1, 여인2, 어색한 "님"자 존칭... 막상 현실공간에서 서로 만나기라도 하면 실망에 표정이 찌푸려지다가도 티를 안 내려 기를 쓰고 관리를 합니다. 현실이나 가상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은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귀착하고, 접속이 종료된 마음은 "안락하면서도 동시에 안락하지 않은(p139)" 상태로 이만하면 해피엔드라고 타협합니다. 

"민나는 민나의 어머니보다 더 먼저 태어났다(p143, p155)." 원인보다 결과가 선행하는 건 이 3차원 세상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어떤 딸들은 엄마들보다 더 어른스럽기도 합니다. 민나는 호박벌, 도롱뇽 등 모든 자연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심지어 그들과 혈연관계인 듯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등바등 살고, 추한 모습으로 늙어가는 게 무슨 "득"이 된다고 이 난리통일까요? 자식이 아버지를 낳고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자연과 화합하여 무(無)로 돌아가기도 하는 게 우주의 섭리지만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가 의미없이 설정해 둔 규칙에 따라 삶을 소진합니다. 그 모든 게 다 무슨 득이랍니까. 알고 보면 온 우주가 작은 옥구슬 안에 들어갈 만큼 빤한지도 모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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