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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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당하게 궁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 P44

"그래도 사람은 개가 젤 낫아야."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 - P47

서른 넘어 친구 짖ㅂ들이에서 처음 위스키를 마셨다. 오크향은 달콤했고 목 넘김은 황홀했다. 마셔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술과 맞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한계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 전후의 한계와 여전히 맞서 싸우는 중이었고, 그사이 세상은 훌쩍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 P70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 P110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 P137

"지한테 득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민중이여.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은 폴쎄 틀레묵은 것이제."
늙은 아버지는 알았지만 젊은 아버지는 몰랐다. 그래서,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살기 위해서, 아버지와 그의 동지들은 입면 어느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 사회주의에 등을 돌린 민중들 또한 자신들이 살기 위해 악착같이 식량을 숨겼으므로 몇시간을 뒤졌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쌀 한 줌과 동지의 목숨을 맞바꿔야 하는 보급투쟁이었다. - P175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삶을 부러워 미웁기도 했던 것이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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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2023-05-2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임승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쓴 인문에세이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출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지만 딱히 홍보할 방법이 없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저자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 여러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승객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요). 갑작스러운 댓글에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여러 일로 바쁘시겠지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문득 제 신간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21세기 실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면서 생긴 독특한 인간관계와 에피소드가 있듯이, 두 딸의 아빠이자 반백살의 남성인 저도 30년째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삶을 견지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인생이라는 여행의 경로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다 보니 갈림길에서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글치였던 공대생 출신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선거 날 투표할 때면 지지율이 1%도 안 되는 후보에게 거침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뜬금없이 와인에 홀딱 빠져서는 대한민국 검사뿐만 아니라 노동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 경로는 명승지 투어 같이 잘 차려진 패키지 여행과는 결이 달라서, 오지 탐험에서나 맞닥뜨릴 돌발 장면들이 순간순간 펼쳐졌습니다.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여행 경로를 선택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경로를 선택했을 때만 접할 수 있는 풍경, 경험할 수 있는 사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이 여행이 제법 맘에 들어서 설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리라 기대한다면 과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지 탐험 여행서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리라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읽으셨다면 제 책도 ‘실사판’으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권의 여행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아래에는 출판사의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서 옮깁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인터넷서점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9181643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어있다. 일례로 전 세계가 주목한 코로나19 감염병 대처 방식도 지극히 사회주의식이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공공 재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감염병에 대처했으며 코로나 진단 검사와 치료를 누구나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건 의료 정책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공립학교, 국공립어린이집, 무상 급식, 공공 임대 주택, 부자 증세 등등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및 재분배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복지를 확대하길 원하면서도 왜 사회주의에는 유독 반감을 가질까?

저자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본격적으로 해소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대세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30년 차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또한 자본주의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해설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태생과 최후를 통찰한다.

사회주의로의 강요는 없다. 다만 질문이 시작될 뿐이다. 최악의 빈부 격차, 극심한 이윤 지상주의, 유례없는 환경 파괴,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나갈 것인지. 증오와 배척, 불평등와 불공정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삶의 지표에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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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 작가의 '긴긴밤'은 겨우 125페이지짜리 짧은 동화이다.

그마저도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일러스트 그림이 3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글로 채워진 페이지는 100페이지가 채 안 된다. 한번 손에 잡으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시간 안에 독파할 수 있는 책이다.


한 시간 안에 독파할 수 있는 동화책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쉽게 씌여진, 짧은 이야기 안에는 '나'를 찾아가기 위한 수많은 여정과 질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같이 독서 모임을 하고 있는 친구가 말하길, 세상의 모든 예술은 두 가지를 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다.

하나는 사랑이고, 또 하나는 '자아 찾기'라고 했다.


친구가 생각해서 만든 말인지, 그도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적어도 내가 접한 책과, 영화와, 연극들은 거의 모두가 사랑과 자아를 말하고 있었던 듯하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창희가 주구장창 이야기하더니, 내 '끼리'인 그 친구는 배운 사람이고 나 역시 배운 사람이라는 증명이 성립될지어다.


'자아 찾기'에는 어떤 공식이 있다.

첫째, 집을 떠나야 한다.

둘째, 온갖 고생을 해야 한다.

셋째, 반드시 집으로(혹은 사랑하는 이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신화의 오딧세이아도 독일의 헨젤과 그레텔고 집 떠나 개고생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가까이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무리도 무언가를 찾아 길을 떠나 개고생을 했고, 우리나라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이도 집을 떠나 온갖 고생과 모험을 하다가 급기야 나라까지 세우기도 하였다.

'긴긴밤'에서 집 떠나는 고생을 하는 건 흰코뿔소 노든과, 까만 점이 있는 정상적이지 않은 알 양동이를 든 펭귄 치쿠와 그 알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펭귄, 이 세 동물들이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코끼리와 함께 했던 코뿔소 노든은 제대로 된 코뿔소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코뿔소가 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내와 딸을 잃었고, 동물원에 갇혀 폭격을 맞기도 했으며, 그 폭격으로 절친한 친구 앙가부를 잃었다. 노든은 복수를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펭귄 알을 부화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을 맡은 치쿠라는 펭귄과 함께였다.


노든과 치쿠는 알을 위해 바다를 향해 걸었다. 사막을 지나고 풀숲을 지나면서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치쿠는 너무도 힘들었다. 부리에는 알을 잘 부화시키기 위해 알 양동이를 꼭 문 채, 윔보와의 약속을 위해 어른 펭귄으로서 알 펭귄을 탄생시키기 위해 맡은 바 막중한 책임을 다했다.

치쿠는 다음 세대 펭귄을 위해 책임을 끝까지 다하며 자신을 희생했다.

지금 우리는 펭귄 치쿠만도 못한 어른들 천지인 세상에 있다.

치쿠는 자신의 희생으로 알 펭귄을 탄생시켰는데, 사람 세상에는 요구하고 강요하고 가르치는 어른 사람이 가득하다.

치쿠의 죽음에 묵직한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코뿔소가 되기 위해 그리고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났던 노든은 자신의 목적은 잠시 잊고 갓 태어난 어린 펭귄을 바다로 데려다주기로 하고 둘은 바다로 가는 길을 향해 여행을 계속했다.

바다는 너무 멀었고 둘은 바다로 가는 길도 몰랐다.

바다로 가는 길에 둘은 수없이 많은 '긴긴밤'을 만났다.

여러 '긴긴밤'동안, 둘은 도망치기도 하고, 서로 보듬어 주기도 했으며, 밤새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를 찾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긴긴밤'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많은 '긴긴밤' 속에서, 노든을 잃을 것이 두려워 코뿔소로 살 테니 같이 있자고 말하는 어린 펭귄에게 노든은 어린 시절 코끼리 할머니가 했던 그 말을 어린 펭귄에게 말했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코뿔소로 태어나 펭귄으로 자란 어린 펭귄은, 어느 날 노든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순탄했던 코끼리 고아원을 떠난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고.

그때 노든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떠나본 사람만이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떠나본 사람이 '자아'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

떠나보지 않은 사람이 '자아'를 찾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직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자신이 없는 나는,

떠나본 사람인가, 떠날 사람인가

돌아온 사람일까, 돌아갈 사람일까


한번 읽었을 때보다

두 번 읽은 지금이 더 머리에 생각이 많아졌다.

세 번 읽으면 어떻게 될까?

네 번쯤 읽어도 되지 않을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책장 속 어린 왕자처럼, 두고두고 보고 싶어졌다.

내일 주문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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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범우문고 307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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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송에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방송에서 유시민이 나와서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책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평소 유시민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던 나는 이 책을 언젠가 꼭 한번 읽어보리라고 마음먹었다. 

나는 참여하고 있는 독서토론 모임의 50번째 책으로 '독일인의 사랑'을 선택했다. 우선 책이 얇아서 좋았다. 110mm x 174mm 문고판으로 겨우 172쪽의 두께였다. 가볍게 읽을 수 있겠지, 안일한 생각을 가졌다. 

책은 두께와는 반비례하였다. 문장은 수려했고 은유와 비유는 넘쳐났으며, 종교와 철학이 온갖 데 난무하였다. 책의 선정자로서 나는 난처해졌다.

독서토론 모임에서 책 선정자는 책을 가지고 토론한 논제를 발제해야 한다. 서정보단 서사를 선호하는 나는, 서정과 감상이 넘쳐나는 책에서 발제를 고르기 위해 책을 읽고 나서도 맘 편히 있지 못하고 인터넷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의 가사가 된 시를 지은 빌헬름 뮐러를 아버지로 둔 막스 뮐러는 원래 언어학자였다. 또한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연구도 많이 하였다. 독일에서 태어나 공부하던 뮐러는 1850년 영국 옥스퍼드로 유학 가서 아예 영국에 귀화를 하여 1900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영국에서 살았다. 뮐러는 언어학자로 살면서 평생 단 한 권의 책을 집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었다. 영국에서 살면서 언어학 관련 저서와 논문은 영어로 썼는데, 귀화한 영국인이 쓴 소설은 독일어로 독일인을 위해서 썼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국인의 사랑도 아니고, 왜 독일인의 사랑을 썼을까? 찾아본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뮐러는 1774년에 발간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온 우울한 사랑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 젊은이들에게 결핍되고 슬픈 사랑 대신  영혼이 충만한 사랑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 신학'이라는 종교적인 책을 바탕으로 하여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사랑을 하면 영혼과 마음이 가득 찬다는 내용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다. 

주인공인 '나'는 소년 시절 우연히 영주의 저택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병약하게 태어나 평생을 병상에서 지내는 마리아라는 여성을 만난다. 
이후 헤어진 두 사람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 철학과 사랑과 종교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서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병약한 마리아는 끝내 숨을 거두게 되고, 그녀를 평생 돌보던 노의사가 주인공에게 마리아의 죽음과 자신의 당부를 전한다. 


줄거리는 정말 간단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독일인의 사랑'은 발간 당시 독일에서 아주 인기가 많았다. 오히려 현대 독일에서는 인기가 시들하며, 독일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팔리고 읽히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 책을 줄거리를 따라 읽는 책이 아니다. 등장인물도 이름도 없는 주인공과 마리아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주인공과 마리아의 대화를 읽고 곱씹어 보는 데서 책의 묘미가 살아있다. 


어떤 옛 현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난파당한 작은 배의 조각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서 몇 개의 조각은 서로 만나 잠시 붙어서 다녔으나 잠시 후 폭풍이 덮쳐와 그 두 조각을, 하나는 서쪽으로 하나는 동쪽으로 몰로 가 버렸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운명도 이와 같다. 다만 그와 같은 커다란 난파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따름이다. - P29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도 확실한 사랑의 표시를 나타내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아내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기 스스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건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믿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65


마침내 마리아를 사랑하게 된 주인공에게 마리아는 묻는다. ​

"당신은 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시는 거예요?"


이때 주인공이 한 대사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문구이다. ​

"왜냐고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그가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느닷없이 다가오며, 태양이 있고 달이 뜨는 것처럼 자연의 섭리이자 운명이라는 것이 막스 뮐러의 주장인 것이,  이 책을 통해서 읽힌다. 


하지만, 이런 작가의 의견에 괜한 딴지를 부리고 싶은 나는 아직도 사춘기인 걸까?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운명이나 자연의 섭리라기 보다 줄리엣의 아름다운 미모 때문일 것이다. 성춘향의 파릇파릇하고 예쁜 외모가 이몽룡의 시선을 끈 이유였을 것이다. 작가는 환상과 경건의 세상을 동경하면서 그의 희망 사항을 소설로 쓴 것일 것이다.  즉, 사랑에는 남에게는 차마 밝히지 않는 어떤 속물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딴지를 걸고 싶다. 


독서토론 모임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독일인의 사랑'을 평생 읽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줄거리가 없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화와 감정만이 난무한 독일인의 사랑을 선택하고,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독서토론 모임이 자랑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읽기 보다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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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범우문고 307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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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엔 누구나 그 나름대로 신비와 경이를 가지는 법이다. 하지만 누가 그걸 표현할 수 있으며 그 뜻을 풀어서 말할 수 있겠는가? - P13

그날은 우울한 날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집에 돌아오셔서도 내가 버릇없이 굴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날 밤 나를 잠자리까지 데려다 주셨고, 나는 기도를 드렸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좋아해서는 안된다는 그 남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자주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25

어떤 옛 현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난파당한 작은 배의 조각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중에서 몇 개의 조각은 서로 만나 잠시 붙어서 다녔으나 잠시 후 폭퐁이 덮쳐와 그 두 조각을, 하나는 서쪽으로 하나는 동쪽으로 몰로 가 버렸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운명도 이와 같다. 다만 그와 같은 커다란 난파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따름이다. - P29

나는 나의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38

어떤 사람이든, 포플러가 서 있는 단조롭고 먼지 낀 길을 걸어가며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시기가 일생 중에 있게 마련이다. 그런 시기에 대한 회상이라면 자기가 무척 먼 길을 걸어왔으며 나이가 들었다는 슬픈 감정밖에는 아무런 추억도 남지 않게 마련이다. 인생이라는 강물이 조용히 흐르는 동안에는 그 강 자체는 항상 동일한 강이고, 변하는 것은 오직 양쪽 언덕의 풍경뿐인 것처럼 생각된다. - P41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도 확실한 사랑의 표시를 나타내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아내기는 참으로힘든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기 스스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받고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건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믿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P65

"창조주이신 아버지시여,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땅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제게서도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중략...
신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하찮은 일도 네게 일어나지 않으리라. - P108

인간은 어찌하여 삶이란 것을 장난으로 여긴단 말인가. 그리고 어찌하여 하루하루가 자신의 최후가 될 수도 있으며, 시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영원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과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미를 하루하루 뒤로 미룬단 말인가. - P110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먼 바다까지 헤엄쳐 나가서 팔에 힘이 빠질 때에야 비로소 돌아올 것을 생각한다. 그는 허겁지겁 급히 파도를 타지만, 감히 멀리 있는 해안을 쳐다볼 원기가 없고, 한 번 팡을 저을 때마다 힘이 다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 않고있다는 것을 느낀다. 드디어 그는 목표도 잃고 거의 의식도 잃고 경련을 일으킬 지경에 이른다. 그대 갑자기 가의 발이 굳건한 땅을 딛게 되고 팔은 해안에 있는 최초의 돌을 잡게 된다. ...중략...
하나의 새로운 현실이 내게 마주쳐 왔고, 내가 당했던 고통은 하나의 꿈이 되었다. 인간의 생애에서 그런 순간은 별로 많지 않으며, 그런 환희를 맛보는 살마도 별로 많지 않다. 처음으로 아기를 팔에 안아 보는 어머니, 전쟁으로부터 명예롭게 귀환한 외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 동포로부터 환호를 받는 시인,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따뜻한 손길을 받는 젊은이......이런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 꿈이 현실이 되는 그 기분을. - P114

그대의 오빠가 되든,
그대의 아버지가 되든,
그 무엇이든 되어 주리라.

‘그 무엇이든‘에 대한 올바른 이름이 찾아져야만 했다. 세상은 이름 없는 것은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 P149

왜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속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해명하려고 애를 써야 된단 말인가? 결국 자연계에 있어서나 인간에게 있어서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서나, 설명할 수 없는 것만이 우리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것이다. - P149

아침이 되었다. 나는 그 여자 앞에 섰다. 정말로 그 여자 앞에. 오, 육체 없는 정신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지 마라! 완전한 존재, 완전한 의식, 완전한 기쁨은 정산과 육체가 하나가 되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육체화된 정신이며 정신화된 육체다. 육체 없는 정신은 없다.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유령일 뿐이다. 정신 없는 육체도 없다. 있다고 한다면 그건 시체일 뿐이다. ...중략... 진짜 삶은 어디에서나 육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삶이며, 진짜 향연은 어디에서나 육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향연이요, 진자 함께 잇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다. - P156

"그런데 당신은 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시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아직도 결단의 순간을 망설이는 듯 나직이 물었다.
"왜냐구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그가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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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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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잘 대접받게 하라고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시대의 축소판이요 짧은 연대기이기 때문이오. 죽은 후 당신의 묘비명이 나쁜 게, 살아 생전 배우들의 험담보단 나을 것이오. - P85

종종 우리들 탓이지만, 경건한 외모와 신성한 행동으로, 우리가 악마조차 달콤하게 만듦은 너무 흔히 입증되는 사실이다. - P93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 P94

높은 자들의 광기는 방관하면 아니되오. - P101

결심이란 기껏해야 기억력의 노예일 뿐,
태어날 땐 맹렬하나 그 힘이란 미약하오.
그 열매가 시퍼럴 땐 나무 위에 달렸지만,
익게 되면 그냥 둬도 떨어지는 법이라오. - P111

칼 같이 말하지만 칼을 쓰진 않을 테야. 내 혀와 내 영혼이 이 점에선 위선자길. - P120

죄의 참된 본질이 그렇듯, 병든 내 영혼에겐 사소한 일들이 커다란 불행의 전주곡 같구나. 죄의식은 서투른 걱정에 가득 차서, 엎지를까 겁내다가 스스로 엎지른다. - P151

사랑의 불길 속엔 그것을 약화시키는 일종의 심지나 검댕이 자라는 법이며 언제나 꼭같이 좋은 것도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좋은 것도 넘치면 홧병처럼 제풀에 죽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픈 일 하고플 때 해야 돼. 왜냐면 <하고픔>은 말이 많고 손이 많고 사건이 많은 만큼 변하고 줄어들고 지연되며, <해야 됨>도 한숨이 피 말리는 것처럼, 누그러지면서 우리를 헤치니까.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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