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요즘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제 일순위가 '여행'이라는 답변이다. 그리고 은퇴 후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냐는 질문에도 거의 매번 '여행'이 상위 순위를 랭크하고 있다.

여행은 사람들에게 로망을 여전히 남기고 있고 일종의 구원의 이미지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이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억압과 구속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누구나 여행을 좋아한다. 나도 여행을 참 좋아한다. 대한민국 성인 남여의 평균 여행 횟수는 휠씬 넘게 여행을 다녀봤지 싶다. 국내든 국외든 말이다.

   여행을 다닐때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행을 기록한다. 누구는 가는 곳곳마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면서 건물도 찍고 풍경도 찌고 그 예쁜 건물과 장엄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자신을 더 많이 찍는다. 낮에 찍은 사진을 저녁에 숙소에서 쫘악 훑어보면서 내가 못나온 사진을 삭제한다. 그리고 대개는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그 기록을 되새김하지는 않는다. 사진은 고대로 휴대폰이든 카메라에 고스란히 봉인된채로 아무도 다시 들쳐보지않는 기록물이 된다.

   많지는 않아도 요새는 감상을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이도 증가하고 있다. 일종의 노출증인지 인정병인지는 애매해도 나 여기 왔다, 내 이렇게 잘 살고 있다. 날 좀 부러워 해라는 메세지를 주로 전할 목적으로 사진과 감상을 남긴다.

 

   나는 주로 그 여행에서 쓴 돈의 내역을 기록으로 남긴다. 주로 해외여행의 경우 이런 습관을 들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목돈이 들어가는 여행이다 보니 예상된 경비안에서 지출을 하려다 보니 첫 여행부터 이런 습관을 들이게 된 것 같다. 비행기티켓부터 숙소, 매일 매일의 식대, 입장료, 간식을 얼마나 사먹었는지, 교통비 등 해외 여행을 다녀오면 모든 영수증과 그날 그날 메모한 사용내역을 정리하여 엑셀파일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곤 나의 꼼꼼함과 계획성과 알뜰성에 뿌듯해하며 타짜의 정마담이 '나 이대나온 여자야~'라며 학벌을 뽐내듯이 '나 이정도의 돈으로 장기간의 해외여행 다녀온 사람이야'라는 자부심을 뿜어내곤 한다.

   대신 상대적으로 해당 여행지에 대한 감상을 남기질 않다보니 여행을 다녀와서 뭘 봣는지 뭘 느꼈는지가 여행을 다녀온 후 애매모호할 때가 있다. 물론 다녀와서 아, 참 좋았다. 이쁘더라, 한 번 가볼만 하더라는 정도는 말할 정도는 되지만 단지 그 뿐. 어떻게 좋앗는지 얼마나 이뼜는지 어째서 한 번 가볼만한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할 정도의 감상과 후기를 가지지는 못한다. 단지 얼마나 돈을 아껴서 잘 사용했느냐가 내겐 남을 뿐이다.

   그러나, 풍경와 자연과 건물의 아름다움외에 다른 사건과 사고가 있었던 여행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여 다른 사람앞에서 입에 침을 튀겨가며 리바이벌이 가능하고 글로 써서 기행문을 쓰라면 바로 작수할 수 있을 정도이다. 10년 전 홍콩을 갈 때 케세이퍼시픽 비행기가 돌풍을 만나 공중에서 2시간 떠있으면서 하늘위의 바이킹을 탔었던 경험, 제주도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나 비행기가 김해공항까지 왔다가 착륙하지 못하고 다시 제주도로 돌아간 경험, 호주에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뱀의 출현으로 일본에서 하루밤을 머물러야만 했던 경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한 정거장을 빨리 내려서 막차를 놓칠 뻔했던 경험 등등.

   우리는 일상의 고뇌와 불안을 잊기 위해 여행을 가지만, 고뇌와 불안이 없는 아무일도 없는 여행은 기억에서 오래 보관되지 않는다. 불안과 사고가 있었던 여행이 온전히 내 것으로 기억에 남아 기록으로 치환될 수 잇는 것이다.

   때로는 나도 부지런을 떨어서 이런 여행의 경험과 감상을 요즘의 많은 SNS노출애호가들처럼 나도 남겨둬야지 맘 먹지만 나의 게으름과 막상 떠오르지 않는 첫문장으로 인하여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김영하는 글을 잘 쓰는 작가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의 소설보다 이런 에세이류의 글이 더 좋다. 소설보다 더 깔끔하고 진솔하다고 생각되며 답답하게 막힌 혈관 어딘가가 그의 글을 읽을때는 막힌 부분이 뚫리면서 내 몸속 피가 지리산 피아골 계곡물처럼 힘차게 잘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영하씨는 느낀 그의 여행 체험과 감상의 내 것과 크게는 다르지 않다. 내 말은 세세한 경험 하나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같은 것이 그렇다는 거다. 감상과 느낌은 비슷하나 나는 '여행의 이유'같은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했다. 이 지점이 부럼움과 질투와 반성을 가지게 하는 포인트다.

 

   아주 오래되었던 최근의 여행이든 김영하가 남긴 여행기를 보면서 그의 섬세함과 감수성에 다시금 반하면서, 나의 여행를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여행을 그려보자 다짐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는 홧병이라고 알려진 다른 나라에는 없는 질병이 있다. 특히 주부들과 직장인들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나도 대한민국 주부이고 직장인 생활도 20여년을 넘게 했기에 생활 속 울화를 종종 겪고 품고 사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짜증이 쌓이고 화가 치미면 마음속으로 욕을 하는 것으로 일정 부분 해소를 하곤 했다. 욕이라는 것이 묘한 것이어서, 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속으로나마 욕지거리를 하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은 확실했다.

모든 종류의 중독은 시간이 갈수록 강도가 세지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나의 마음 속 욕도 차츰 강도가 세진 것은 당연한 일 일터. 마음 속 욕으로는 울화가 해소가 되지 않는 것이다. 화가 가슴속에 쌓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곤, ‘! XXX !@#$#^#$&$&~~~~!’며 입 밖으로 터트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단계가 되었다.

급기야 이제는 남이 안본다고 생각되면 작은 소리로 욕을 직접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면 순간 주위에 사람이 있어도 작은 소리로 ㅅㅂ, 지가 뭐 잘났다고 지랄이야 지랄이. AC~~~’같은 말을 입 밖에 내곤 하는 것이다. 물론 딴에는 주위를 확인하고 속삭이며 몰래 한다!고 자신했다.

사건은 친언니들과의 여행에서 발생했다. 동유럽으로 자매들끼리-나는 2명의 언니가 있는 막내다- 89일 여행을 갔다. 패키지 여행이라고 해도 나이 50이 훌쩍 넘은 언니 둘을 모시고(?) 빡빡한 일정의 여행을 다니다 보니 말미에는 몸이 많이 지쳐갔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언니들보다 젊고 영어를 좀 한다는 이유로 자유시간이 주어지거나 식당엘 가거나 쇼핑을 할 때 늘 언니들과 동행을 했고 많은 뒤치닥꺼리를 해야 했다. 여행 초기 봉사정신으로 무장한 나의 상냥한 말투와 솔선수범한 행동은 여행의 후반기 즈음엔 나 살기가 힘들어 더 이상 상냥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외에서 쇼피은 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울 언니 둘은 글쎄 나와 정반대이지 않은가! 하긴 어릴적 같은 방을 쓸 때도 서로 스타일이 달라 티격태격(하고 싶었으나 막내로 당하기 일쑤였다.)했으니 머리가 허~연 중년이 되어서야 말해 무엇하리.

이런 저런 일들로 짜증이 쌓이고 울화가 차곡 차곡 단전에서부터 쌓여가고 있던 어느 날 식당에서였다. 주문을 하고 큰 언니가 막내야, 저 가서 이것 저것 좀 갖고 온나. 내는 다리가 아파 좀 쉴란다.’ 하는데 그만 거기서 쌓여있던 울화가 뇌를 거치지 않고 중독증상인 욕지기로 교환되어 입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언니가 요구한 물건을 가지러 가서 주섬 주섬 챙기면서 ㅅㅂㄴ, 지만 피곤하나. 나는 더하거든! 저거들 수발한다고 피곤해 죽겠고만. 에잇 ㅅㅂ!!!’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는데 뒤돌아보니 언니가 바로 내 뒤에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ㅅㅂ, 됐다!’는 생각이 들다. 그런데 언니는 내 말을 못들은 건지 아니면 못들은 척 하는건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계속 서있었다.

이 순간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딱 그 꼴이었던 것이다.

나는 언니들보다 많이 배웠고 많이 읽었다. 가족들도 친구도 나를 일명 배운 사람취급을 해주었고 나름 동네 엘리트라고 자타가 인정해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앞과 뒤가 같은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 그것이 친언니를 욕하는 나쁜 사람도 되고 맘 속에선 온갖 짜증과 불만을 터트리는 몹쓸 막내도 되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선생님머리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훌륭해지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것처럼, 나도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머릿속을 훌륭한 생각으로 채워도 나 스스로가 훌륭해지지 않으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 이었다.

소세키의 <마음>속 선생님이 과거 친구 k에게 한 행동들이 이런 이유로 나는 이해가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 물길과 같아서 어디로 흘러갈지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와 차단하고 은둔의 삶을 살았던 소세키의 선생님과는 달리 나는 다이내믹한 대한민국 사람이라 책도 읽고 외부와 접촉하며 조금이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려고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20-08-01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저도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이랍니다.
일본에서 1955년에 만든 2 시간짜리 흑백 영화도 아주 훌륭하더군요.
이번에 그 영화를 바탕으로 『마음』을 소개하는 동영상도 만들어봤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한번 구경해 보세요~
https://youtu.be/NH-SEki-JEE

hikelly 2020-09-11 14:17   좋아요 1 | URL
네, 영상 꼭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좀 더 앞으로 나아가면 내가 기대하는 것이 언젠가 눈앞에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렸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 대해 젊은 피가 이렇게 고분고본하게 돌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P24

인간에 대한 선생님의 그런 생각은 어디세 온 것일까? 단지 냉철한 는으로 자신을 돌아보거나 현대를 관찰한 결과일까? 선생님은 앉아서 생각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선생님 같은 머리만 있다면 앉아서 세상을 생각해도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가 나오는 것일까?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만은 않았다. 선생님의 생각은 살아 있는 생각 같았다. 불에 탔다가 차갑게 식어버린 석조 가옥의 윤곽과는 달랐다.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 확실히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 사상가가 정리한 주의(主義)에는 강력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자신과 분리된 타인의 사실이 아나라 자기 자신이 통절하게 맛본 사실, 피가 뜨거워지거나 맥박이 멈출 만큼의 사실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 P51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부류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그렇게 틀에 박은 듯한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평소에는 다들 착한 사람들이네. 다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거네. 그래서 방심할 수 없는 거지." - P83

"...난 그들한테서 받은 굴욕과 손해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짊어지고 살아왔네. 아마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살겠지.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복수하지 않고 있네. 생각하면 나는 실제로 개인에 대한 복수 이상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들만 증오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일반을 증오하고 있거든...." - P88

그때는 흔히 한방에 두세 명이 책상을 나란히 놓고 지내곤 했네. K와 나도 둘이 한방을 썼지. 산에서 생포된 동물이 우리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바깥을 노려보는 것 같았을 거야. - P189

그의 지향점은 나보다 휠씬 높은 데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나도 그걸 부정하지 않네. 하지만 눈만 높고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간단히 불구가 되지.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네. 그의 머리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훌륭해지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지. - P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로 오랜만에 시원 시원한 책을 만났다. 문체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얼마전 막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보고는 내가 좋아하는 문제가 아니어서 조금 실망하고 낮은 평점을 주었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어느 분이 독서법관련해서는 쾌락독서가 더 자기에게는 나은 것 같다는 말을 하길래, 얼른 일게 되었다. 그 분이 '책은 도끼다'를 언급한 내용이 내 생각도 비슷하길래 그렇다면 나도 쾌락독서는 좋게 느껴지지 않을까 해서.

 

책벌레 문유석 판사가 지난 세월동안 읽어온 책들을 짧막 짧막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펼쳐놓은 글이다. 여기에는 책을 가까이 하게된 연유, 학창시절의 책 읽기, 책 고르는 나름의 방법, 좋아하는 책 종류, 반대로 싫어하는 책 종류 등등 책에 대한 문판사 개인의 대부분이 담겨 있다.

 

그런데, 문 판사가 쭈욱 나열해 놓은 책과 관련된 느낌이나 추천 책을 보면 나랑 참 많은 부분이 유사한 것을 보고 읽는 동안 절로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 졌다.

어릴 적 숱하게 많은 책을 읽었지만, 상대를 신비화하는 연애물인 '녹색의 장원', 치정복수극의 거의 끝판왕 '몬테크리스토 백작', 부자들에 대한 동경과 빈부/계급 격차로 인한 울컥함이라는 양가 감정을 지닌 '소공자' '소공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는 점에서('어린 시절의 책읽기') 우선 그랬다. 나도 어릴 때 시골 없는 집에서 책 있는 친구들 집을 전전하면서 이것 저것 많이 줏어다 읽었는데 위에 언급된 책들은 읽어도 읽어도 너무 재미있고 갈등이 해소되거나 주인공의 진짜 정체, 신분이 상승되는 시점이나 정체가 밝혀지는 데에서는 정말 온 몸이 짜릿하고 전율이 느껴저 손을 몇 번이나 오므렸다 폈다를 하고 허리를 구부렷다 폈다를 반복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런 책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신분상승의 판타지가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앞에서 이거 너무 감동이었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조금 부끄러워하곤 했었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사춘기 호르몬 영항으로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꼼꼼히 훓어 보았다는 ('호르몬 과잉기의 책읽기') 곳에서 나도 내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는 언니가 둘있었는데 나보다 3살, 5살이 많았으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언니는 각각 고등학교, 혹은 직장인이었다. 큰언니는 상고를 졸업 후 바로 건설회사에 취직하여 월급외에도 눈먼 돈(당시 80년데 건설회사였다!)이 쏠쏠하여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여성대백과를 풀 세트로 장만하였다. 언니는 그것이 혼수품이라고 미리 준비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언니는 쏠쏠한 눈먼 돈으로 논노니 조이너스니 하는 의류 카타로그를 받고 의류 실물 체험에 집중하느라 전집들은 빨빨 새거인 체로 좁은 집 장농위에 자리를 잡고 전시품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채로, 나는 심심하여 할 것이 없으니 그 책을 하나하나 읽었다. 그런데 이 웬 새 세상인가! 여성대백과에는 옷 입는 법, 요리하는 법과 함께 첫날밤 보내는 법을 설명하면서 상세히 그림까지! 곁들여져 있어서 중학생 여자아이의 성교육을 책임졌다. 김동인의 감자, 배따라기, 모파상 여자의 일생등에서도 당시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에로티시즘을 느끼고 전집 구석구석을 훑게 되었다. 모름지기 독서란, 좋은 것이었다.

 

나에게 만화책은 한국 음식에서 간장 된장과 같은 내 정신의 기본 베이스이다. 만화책를 보는 습관은 한창 유행하던 만화방이 없어지고 웹툰으로 대체되고, 육아로 도저히 물리적 시간이 안될때 명맥이 끊길 뻔 했지만 요즘은 웹툰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아무 양념이 안된 시절 베이스를 깔았던 만화책과 이미 갖은 양념이 다 되고 참기름 깨소금까지 얹어진 요리에 만화는 당연히 수용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순정만화-유리가면, 굿바이 미스터블랙, 아르미안의 네 딸들, 북해의 별, 별빛 속에 등등 ('순정만화에 빠지다')은 내 정신과 마음의 기본 베이스 양념들이다. 어쩌면 세계문학, 한국문학, 동화책보다 더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내 감수성을 복돋아 주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물론 가끔은 공상도....) 소중한 콘텐츠들이다. 성인이 되어서 이런 책들에 대하여 공감을 나눌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대학때도 직장에서는 물론 당근. 이런 만화책들에 대한 추억은 오롯이 나만이 가지고 가끔식 다시보기로 몇 번 곱씹는 홀로 추억이 된거다. 그런데, 나보다 나이많은 아저씨가 그것도 판사아저씨가 이 책들이 그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으며 아주 감동적이라고까지 말해준 것이다. 이 장을 읽으면서가 제일 행복했다. 블랙과 아르미안과 별빛은 정말 나의 최애 작품이라 다시 또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 조만간 '놀숲'에 갈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에피소드들에서 공감을 받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고 행복했다. 나도 뭔가 판사 비슷한 것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봐라~ 내가 읽고 감동받은 책이 문유석 판사도 억수로 좋았다잖아~~!! 내 이런 사람이라고!'

책을 읽고도 뭘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서 오래 그 책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자 이렇게 감상글을 쓰고 있는데 이 '쾌락독서'와 같이 독후 감상이 술술 나올 때, 정말 기분좋다. 행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줄의 문장, 또는 한 단어가 기억에 남아 있다면 내게 그 책은 그 한 줄, 또는 한 단어다. 만약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책을 읽던 시간과 장소의 감각이 되살아난다면 내게 그 책은 그 감각이다. - P15

카프카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쳐서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는 거냐며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일갈했지만, 수사법은 수사법일 뿐, 책은 도끼일 수도 있고 심시풀이 땅콩일 수도 있고 잠을 재워주는 수면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책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용법이 있기 마련이다.

‘책이 길면 길수록 더 좋았던 시절‘ 중에서 - P8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은 문제는 새로운 문제로 대체되는 것이 낫다. 완벽한 대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잘못을 바로잡는 것 자체가 의미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같은 문제는 더이상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고, 인간의 속성이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것이라면 더더욱 권력자들이 주춤거리기라도 하게 견제하고 성가시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문열을 거쳐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중에서 - P93

선의도 탐욕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면.
....

독서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행위지 누군가에 의해 목적지로 끌려가는 행위가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의 독서‘ 중에서
- P1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