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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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시원 시원한 책을 만났다. 문체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얼마전 막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보고는 내가 좋아하는 문제가 아니어서 조금 실망하고 낮은 평점을 주었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어느 분이 독서법관련해서는 쾌락독서가 더 자기에게는 나은 것 같다는 말을 하길래, 얼른 일게 되었다. 그 분이 '책은 도끼다'를 언급한 내용이 내 생각도 비슷하길래 그렇다면 나도 쾌락독서는 좋게 느껴지지 않을까 해서.

 

책벌레 문유석 판사가 지난 세월동안 읽어온 책들을 짧막 짧막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펼쳐놓은 글이다. 여기에는 책을 가까이 하게된 연유, 학창시절의 책 읽기, 책 고르는 나름의 방법, 좋아하는 책 종류, 반대로 싫어하는 책 종류 등등 책에 대한 문판사 개인의 대부분이 담겨 있다.

 

그런데, 문 판사가 쭈욱 나열해 놓은 책과 관련된 느낌이나 추천 책을 보면 나랑 참 많은 부분이 유사한 것을 보고 읽는 동안 절로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 졌다.

어릴 적 숱하게 많은 책을 읽었지만, 상대를 신비화하는 연애물인 '녹색의 장원', 치정복수극의 거의 끝판왕 '몬테크리스토 백작', 부자들에 대한 동경과 빈부/계급 격차로 인한 울컥함이라는 양가 감정을 지닌 '소공자' '소공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는 점에서('어린 시절의 책읽기') 우선 그랬다. 나도 어릴 때 시골 없는 집에서 책 있는 친구들 집을 전전하면서 이것 저것 많이 줏어다 읽었는데 위에 언급된 책들은 읽어도 읽어도 너무 재미있고 갈등이 해소되거나 주인공의 진짜 정체, 신분이 상승되는 시점이나 정체가 밝혀지는 데에서는 정말 온 몸이 짜릿하고 전율이 느껴저 손을 몇 번이나 오므렸다 폈다를 하고 허리를 구부렷다 폈다를 반복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런 책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신분상승의 판타지가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앞에서 이거 너무 감동이었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조금 부끄러워하곤 했었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사춘기 호르몬 영항으로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꼼꼼히 훓어 보았다는 ('호르몬 과잉기의 책읽기') 곳에서 나도 내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는 언니가 둘있었는데 나보다 3살, 5살이 많았으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언니는 각각 고등학교, 혹은 직장인이었다. 큰언니는 상고를 졸업 후 바로 건설회사에 취직하여 월급외에도 눈먼 돈(당시 80년데 건설회사였다!)이 쏠쏠하여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여성대백과를 풀 세트로 장만하였다. 언니는 그것이 혼수품이라고 미리 준비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언니는 쏠쏠한 눈먼 돈으로 논노니 조이너스니 하는 의류 카타로그를 받고 의류 실물 체험에 집중하느라 전집들은 빨빨 새거인 체로 좁은 집 장농위에 자리를 잡고 전시품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채로, 나는 심심하여 할 것이 없으니 그 책을 하나하나 읽었다. 그런데 이 웬 새 세상인가! 여성대백과에는 옷 입는 법, 요리하는 법과 함께 첫날밤 보내는 법을 설명하면서 상세히 그림까지! 곁들여져 있어서 중학생 여자아이의 성교육을 책임졌다. 김동인의 감자, 배따라기, 모파상 여자의 일생등에서도 당시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에로티시즘을 느끼고 전집 구석구석을 훑게 되었다. 모름지기 독서란, 좋은 것이었다.

 

나에게 만화책은 한국 음식에서 간장 된장과 같은 내 정신의 기본 베이스이다. 만화책를 보는 습관은 한창 유행하던 만화방이 없어지고 웹툰으로 대체되고, 육아로 도저히 물리적 시간이 안될때 명맥이 끊길 뻔 했지만 요즘은 웹툰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아무 양념이 안된 시절 베이스를 깔았던 만화책과 이미 갖은 양념이 다 되고 참기름 깨소금까지 얹어진 요리에 만화는 당연히 수용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순정만화-유리가면, 굿바이 미스터블랙, 아르미안의 네 딸들, 북해의 별, 별빛 속에 등등 ('순정만화에 빠지다')은 내 정신과 마음의 기본 베이스 양념들이다. 어쩌면 세계문학, 한국문학, 동화책보다 더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내 감수성을 복돋아 주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물론 가끔은 공상도....) 소중한 콘텐츠들이다. 성인이 되어서 이런 책들에 대하여 공감을 나눌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대학때도 직장에서는 물론 당근. 이런 만화책들에 대한 추억은 오롯이 나만이 가지고 가끔식 다시보기로 몇 번 곱씹는 홀로 추억이 된거다. 그런데, 나보다 나이많은 아저씨가 그것도 판사아저씨가 이 책들이 그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으며 아주 감동적이라고까지 말해준 것이다. 이 장을 읽으면서가 제일 행복했다. 블랙과 아르미안과 별빛은 정말 나의 최애 작품이라 다시 또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 조만간 '놀숲'에 갈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에피소드들에서 공감을 받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고 행복했다. 나도 뭔가 판사 비슷한 것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봐라~ 내가 읽고 감동받은 책이 문유석 판사도 억수로 좋았다잖아~~!! 내 이런 사람이라고!'

책을 읽고도 뭘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서 오래 그 책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자 이렇게 감상글을 쓰고 있는데 이 '쾌락독서'와 같이 독후 감상이 술술 나올 때, 정말 기분좋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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