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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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이 일어나지 않는 호수처럼, 한여름의 파란 하늘처럼 깨끄하게 잘 알아들었어요. 저를 믿으셔도 되요. - P50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살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들이구나. - P114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피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아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아가다가 주변의 것들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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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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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는 풍부한 시간을 유일한 재산으로 가진 나이를 모르는 소녀이다. 마찬가지로 필요한 만큼 노동을 하고 노동을 하기에 필요한 시간만큼 여유를 가질 줄 알았던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모모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모두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빈 공터에서 멋진 함선과 폭풍을 만들며 즐겁게 놀곤 했다. 모모와 친구들은 별것없지만 행복한, 아니 행복이 행복인지도 모를만큼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같이 생긴 시간저축은행의 회색인간들이 나타났다. 회색인간들은 모모의 친구들에게 '시간'을 아껴 자기들의 시간저축은행에 시간을 저금하라고 영업을 했다. 아낀 시간은 나중에 이자에 이자를 붙여서 더 크게 더 많이 삶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더 크게 더 많이' 즐길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기 시작했다. 모모의 친구들이 아낀 시간은 회색인간의 시간저축은행에 저축되기 시작했다. 모모의 친구, 식당을 운영하던 푸지씨도 회색인간에게 영업당하여 시간을 아끼기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고 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아낀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아꼈다. 나의 과거는 푸지씨의 하루와 다르지 않았다. 아침 6시 기상. 1시간의 출근시간. 7:30 출근. 오전 업무. 점심. 오후 업무. 운동. 독서. 사교. 영어. 육아.요리.살림. 승진. 회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반복 반복 반복.

처음에는 자기계발에 시간을 투자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지나서는 자아실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투입하였다. 강산이 두 번 정도 바뀌고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계발이 되고도 충분히 여유가 남았어야 했을 '자기'는 계발이 아니라 방전이 되었다. 실현되었어야 할 내 '자아'는 여전히 어디있는지 모른 채 아직까지 흩어진 자아를 찾기에 분주했다. 결단의 시간이 왔다. 나는 노력과 시간의 투자와 투입 대신 이제 그것을 꺼내 쓰기로 하였다. 그래서 반복되는 하루 일과를 버렸고 모모와 모모의 친구들처럼 하나를 해결하는데 느린 행동과 많은 시간을 들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니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무슨 일을 하든 필요한 만큼 시간이 풍부해진 나는 모모와 모모의 친구들처럼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었을까? 풍부해진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길을 잃었다.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시간은 금이다. 시간을 아껴라는 교육을 받았을 뿐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시간 안에서 어떻게 자유를 누리는지를 미처 배우지 못했다. 풍부해진 시간 안에서 불안을 느꼈다. 시간 저축은행에 저축해둔 내 시간을 꺼내 쓰는 것인데도 마치 남의 시간을 훔쳐 쓰는 것처럼.

하지만 세월은 저절로 흐른 것만은 아니다. 지금 내가 가진 시간은 과거의 내가 가진 시간과는 다르다. 무작정 시간을 아끼고 돈을 모으고 먼 미래를 계획하면서 시간을 저당 잡히지는 않겠다. 막연히 불안한 미래를 위해 하루를 견디지 않겠다. 그저 이 순간에 충실하며 바로 다음 단계만을 그릴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강산이 두 번씩이나 바뀌면서 터득한 내 시간의 운영의 묘미이다.

<모모>에서 가장 마음이 갔던 캐릭터인 베포 씨. 느리지만 늘 신중하고 말을 아끼며 서두르지 않은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 그가 모모에게 했던 말을 가슴속에 담아본다. , 원하는 만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나의 시간이 어린 시절처럼 다시 풍부해진 것이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P5

과연 모모는 저축당한 시간을 회색 인간에게서 되찾아왔을까? 모모와 친구들은 풍부한 시간을 누리며 다시 행복한 나날을 맞이하였을까?


가벼운 어른을 위한 동화로 책을 열었다면 삶을 풍부하게 할 철학적인 질문으로 책장을 덮게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러니, 시간을 저축하고 있는 친구들이여 <모모>를 만나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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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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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때문에 친정엄마가 두 아이의 육아를 맡게 되었으며 친정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된 것이 나에게는 아주 큰 행운이었다. 당신이 우리를 키웠던 방법 그대로 손자와 손녀를 키워내셨다.

내가 첫 애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러 친정집에 온 지 열흘쯤 지났을 때 아이 탯줄이 마침내 떨어졌다. 탯줄을 집어놓은 집게에 말라붙은 탯줄은 흉측하게 보였지만 엄마는 이 역시 색깔 고운 헝겊에 잘 싸더니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니 애가 뱃속에서부터 온갖 기운과 양분을 한데 모은 거다. 아이가 큰 일 있을 때마다 같이 하게 해라. 엄마 뱃속에서 힘을 모은 것 같이 온 힘을 모아주는 거다. 흉하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애 낳을 때마다 잘 보관해라." 과학적 근거도 없는 탯줄의 영험함을 내 대학입시에서 이미 한번 겪은 나는 엄마의 간절한 기원과 말씀 때문이라도 탯줄을 잘 보관해야겟다고 생각했고 아직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아이가 두 어달쯤 지나 목을 스스로 가눌 수 있게 되자 엄마는 이내 애를 들쳐 업고 다녔다. 서서 부엌일을 할 때도 가벼운 손빨래를 할 때도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도 친구분들과 마실을 나갈 때도 포대기에 애를 업고 낭창낭창하게 걸으며 동네를 활보하였다. 시간이 흘러 아이의 무게가 제법 무거워졌음에도 주로 업고 많이 다니셨다. 반면 나는 허리가 아파 주로 걷게 하거나 유모차를 태우기를 선호했다. 내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들이를 나서면 엄마는 말하곤 했다. "유모차에 앉아있으면 어른들 발 밖에 더 보겠나? 엄마 등에 업히면 사람들 얼굴도 보고 경치도 보고 엄마 등에 기대서 자고 싶을 때는 폭닥 시리 편안하게 잠도 자고. 애가 세상을 보게 해야지 땅 하고 발만 보게하믄 되겠나? 엄마 편할라고 자꾸 유모차에 태우면 안 되지." 나는 내가 불편한데 아이인들 편하겠냐며 몇 번을 유모차를 고집했지만 사람은 평소 보고 듣는 게 무서운 것이다. 인이 박히도록 엄마에게서 들었던 포대기와 업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어느덧 유모차보다 업는 것을 선호하게 하였다.

 

"아이고 우리 되련님, 진지를 많이 자셨는 가베? 이렇게 이쁜 똥을 많이도 맹글었네!" "왕자님, 밥 잡수이시더. 많이 자시고 어서어서 크셰이." "되련님요, 목욕 하입시더. 따땃한 물에 노곤 노곤하니 목욕하고 한숨 주무이소." 엄마는 돌도 안된 아이와 끊임없이 대화하였다. 말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였다. 아이라고 낮춰하는 대화가 아니라 한 인격체로 존중하면서 끊임없이 아이의 낯빛을 살피고 눈을 맞추며 몸을 어루만지며 대화를 하였다. 혼자 하는 말이었으면 두어 마디 하다 말았을 것이지만 엄마는 아이가 눈으로 몸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믿으셨다. '잼잼''곤지곤지''까꿍'도 그저 놀이가 아닌 대화의 하나로 힘들어하지 않고 아이와 교감을 하였다. 엄마는 손주가 아닌 자식에게도 저리 하셨을까? 기억이 없는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키웠던 아들아이와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TV에서 한 엄마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 장면이 지나갔다. "요새 엄마들은 애를 대개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드라. 포대기에 업고 다니는 게 훨씬 좋은데."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 불쑥 입 밖으로 나왔다. 아들은 업고 다니는 게 뭐가 좋으냐고 유모차로 다니는게 몸도 안 아프고 아이도 앉아 있으니 더 편하고 좋지 않냐고 하면서 과학적으로 따지지도 않고 옛 것이 좋다는 꼰대 같은 어른들의 생각 아니냐고 퉁을 쳤다.

무슨 말이든 어떤 일이든 근거를 대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요즘 세대인 아들에게 나는 근거를 대지 못했고 증명을 하지 못했으며 타당한 논리를 말하지 못했다. 그저 "너거 할매한테 들었고 할매의 할매를 통해 다 증명되고 전수된 내용이다"라고만 옹색하게 받아쳤다. 아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을 눈으로 표정으로 양껏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내 말이 옳다고 자신하는데 근거와 논리를 대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속이 상했다. 부모님의 말씀이면 논리적이지 않아도 일단 수용하고 다만 내가 생활해나가면서 그분들의 말씀을 알아서 취사선택하여 사용했던 우리와 달리 논리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으면 용납을 하지 않고 보는 아이들 보면서 전통의 대물림이 이제 정말로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도 이제 나이라고 한 해 두 해 먹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몸의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나이도 먹어가는 것인지 어릴 때 듣던 엄마의 말씀이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옮은 말씀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엄마의 생활 모습이 현명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엄마 아버지가 내 나이 때 하시던 것들이 내가 내 아들 딸의 나이었을 때는 조금은 어리석고 오래된 인습처럼 나도 느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들의 나이가 되고 보니 모든 것이 다 버리고 폐기해야 할 것들만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있다. 배움과 깨달음은 왜 매번 뒤늦게 찾아오는 건지. 보고 듣고도 느끼지 못하는 온전한 내 탓인지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잘 가르치지 못한 내 어머니 아버지의 부족함때문인지. 온전한 젊었던 내 탓이라고 하자니 지금 내 아이들의 모자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내가 잘못한 것이 아예 없다고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부모님 탓 조상 탓으로 돌리자면 지금 내가 또한 부모가 되었기에 곧 내 탓이 되는 것이다. 이래 저래 진퇴양난의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한국인 이야기-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를 읽었다.

나이 80이 훨씬 넘은 노교수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국인의 좋은 습성과 풍습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져가며 우리가 얼마나 영민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인지 모두 12가지 것들을 경험과 옛 글과 서양 문화와의 상호 비교를 통해서 연구하고 그것들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놓았다. 원래는 중앙일보에 칼럼으로 썼던 글들을 묶어 새로 다듬어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이 책을 미리 읽고 아들과 대화를 했더라면 적어도 포대기 문화에 대해서만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던 업는 것의 위대함을 잊지 않고 기억에 품었다가 할머니의 논리를 당신의 손자에게 근거로 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는 뒷부분에 가서는 동의어의 반복과 약간은 요즘 말로 '국뽕'에 차오른 과장된 논리도 간간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이것은 온갖 시대적 어려움을 넘고 헤쳐온 80이 넘은 노학자가 가진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길 수도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20~30대의 젊은 세대, 특히 아이를 낳고 키우는 혹은 막 낳으려고 하고 키울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세상의 속도에 맞추느라 이런 콘텐츠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인생은 항상 뒤늦게 깨달음을 주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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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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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은 해결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모모가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 P25

베포는, 모든 불행은 의도적인, 혹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거짓말, 그러니까 단지 급하게 서두르거나 철저하지 못해서 저지르게 되는 수많은 거짓말에서 생겨난다고 믿고 있었다. - P49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 P51

그는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안정을 잃어 갔다.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 썼지만 손톱만큼의 자투리 시간도 남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은 수수께끼처럼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의 하루하루는 점점 더 짧아졌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그 속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는가 하면, 한달이 지나갔고, 한 해, 또 한 해, 또 하한 해가 후딱 지나갔다.
그는 회색 신사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그러니 그 시간들이 지금 어디로 갔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아끼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푸지 씨는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시간을 아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정말 빠르고 점점 더 빨리 흘러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라도 하면, 기겁해서 이를 악물고 더욱 더 시간을 아껴 쓰는 것이었다. - P94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 P98

"보다시피 나는 이 꼴이 되었단다. 아무리 원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 난 끝장이 났어. ‘기기는 기기인 거야!‘ 모모, 이 말 생각나니? 하지만 기기는 기기로 남아 있지 못했단다. 모모, 얘기 하나 해 줄까?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건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적어도 나처럼 되면 그렇지. 나는 더 이상 굼꿀 게 없거든. 아마 너희들한테서도 다시는 꿈꾸는 걸 배울 수 없을 거야. 난 이 세상 모든 것에 신물이 났어." - P281

"좋아. 갈게. 하지만 좀 빨리 가게 널 안고 가면 안 될까?"
모모는 카시오페이아의 등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안 돼."
"왜 꼭 네가 직접 기어가려고 하는 거니?"
이 물음에 거복은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했다.
"길은 내 안에 있어." - P314

하지만 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별안간 모든 사람들이 한없이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당연히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이 아낀 시간이라는 것, 그 시간이 신가힌 과정을 거쳐 되돌아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58

이제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가 원하는 만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시간이 다시 풍부해진 것이다. - P360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살아 간단다. 허나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모든 ㅅ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 있지." - P208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망므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모를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중에 벌써 어느새 자기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 P23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비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ㅅㅣ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 - P77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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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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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영혼의 기호다‘
밀란 쿤데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P45

양수가 터지는 탄생의 순간, 모재 속 행복의 바다, 평화의 바다는 사라진다... ...편한 바다를 버리고 무엇 때문에 모래와 용암밖에 없는 땅 위로 올라옸을까. 천적을 피하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 정든 곳을 뒤에 두고 낯선 곳을 찾아가는 호기심. 펀한 것보다 고난에 도전하는 모험심. 지금 우리가 달나라로 가는 우주의 꿈과도 같았으리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낯선 이야깃거리는 그렇게 시작된다. 왜 울며 태어났는지. 셰익스피어와 굴드와 헤밍웨이의 상상력을 모두 모아 칵테일하면, 이런 가상의 이야기 한 편이 만들어진다. - P100

나의 생일날은 내가 선택한 가장 성스러운 날이며, 그것은 바다를 떠나 육지로 상륙한 고난의 기념일이다. 나는 그날 육지를 향해 단신 포복하면서 숨이 막힐 때까지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엄청난 고통의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순간 막혔던 숨통이 뚫리는 소리가 난다. 이미 내 아가미는 허파로 변해 있었고, 지느러미는 어느새 손발로 변해 있었다. 진동하는 허파는 바다와 뭍의 바람결을 타고 돛대처럼, 깃발처럼 부풀고 있었다. 나는 용감한 해병대요, 숨비소리를 내는 환상의 해녀다. 그게 내 출생을 선언한 응애의 울음소리다. - P101

좁은 구멍을 빠져나와야만 끈적끈적한 고치 속의 이물질을 모두 빨아내어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좁은 구멍을 통해 나오는 고통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을 주고 자유의 날개를 주는 필요한 장치였던 셈이다. - P111

우리말에는 아이가 태어나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그 성장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신가한 낱말 하나가 있다. ‘떼다‘라는 말이다. 태너나자마자 탯줄을 가르고 배꼽을 뗀다. 다음에는 젖을 때고 똥오줌을 가리게 되면 기저귀를 뗀다. 그리고 기어다니던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 첫발을 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옛날이라면 천자문을 떼고 요즘이라면 한글을 떼야 비로소 홀로서기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배꼽떼고, 젖 떼고, 기저귀 떼고, 발 떼고, 천자문 떼지 않으면 팽생 ‘떼‘쓰는 응석받이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 P149

나는 80년 동안 책과 함께 살아왔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은 돌상에서 집은 책이고, 책을 읽어주신 어머니가 나의 두 번째 책이다. 어머니의 말,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그 많은 모음과 자음에서 상상력을 길렀다. 내 최초의 책은 어머니의 몸이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돌잡이로 집어 들던 그 책,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미니의 음성으로 듣던 책. 그 책이 내 창조력의 씨앗이다. - P281

한국에서는 ‘잼잼‘과 ‘곤지곤지‘같은 애들 놀이에서 쇠젓가락으로 콩알을 집는 손기술까지 모두가 돌잡이의 ‘잡는 문화‘로 상징된다. 돌잡이는 ‘꿈잡이‘다. 한국인은 꿈을 꾸지 않고 손으로 잡는다. - P284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오늘을 잡아라!"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을 쥐라‘는 뜻이다. 우리는 기회를 잡고, 사랑을 잡고, 운명을 잡는다. 더 나아가 세계를 잡기도 한다. ‘받는다‘는 수동적 의미가 아니라 제 손을 뻗어서 제 손에 넣는 것이 잡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한국인만큼 잡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민족도 드물다. 첫 생일을 맞는 아이를 ‘돌잡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돌상 앞에서 무엇인가를 잡는 것으로 인생을 출발한다. 내 운명을 내가 잡는 것이다. - P285

부모의 품 안에서 길러진 습관이나 버릇은 고스란히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두 살도 아닌 세 살이 인간의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뇌과학에서 밝혀진 이야기지만, 한국 나이로 세 살이 되면 거의 80퍼센트 이상의 뇌발달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미래가 세 살에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 뒤의 한국을 보려면, 오늘 우리는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면 된다. 아이를 잉태해서 츨산해 키우는 3년 동안 80년의 한국 미래를 품고 있는 것이다. 3년만 투자하면 80년이 달라진다. - P305

태어난 집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고향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 P317

아버지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움보다 혼이 날까 검나 손가방을 더 힘껏 껴안고 울음 뒤끝을 참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 근엄한 얼굴이 무너지고 아주 어색한 웃음이 지으신다. - P325

땅만 보고 나물만 캐는 사람에게는 노동만 있고, 하늘만 바라보고 종달새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궁리만 있다. 그런데 땅의 나물과 하늘의 새는 상호작용하면서 벌판의 지평에 변화를 준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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