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의 어느 날, 아마도 여느 때보다 깊은 외로움이 밀려오는 날, 내 외로움은 노파의 오래된 하루를 빌려 그렇게 완성되어 갈 것이다. 내 것인지 노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저쪽으로 전가되었다가 다시 이쪽으로 전가되는 실타래 같은 외로움이 인생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쏜살같이 지나가고 그 밑바닥에 정제되어 남는 건 외롭고 쓰라린 것…….
미안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인생이야, 나의 아가.

백복희로 태어났지만 스테파니로 살이 오나와 넘버 원 닮은 여자. 우리의 닮은 구석은 눈매나 입매만은아닐 터였다. 삶의 어느 장면에서 우리는 같은 자세로, 같은표정으로, 같은 생각을 하며 투명한 벽 앞에 서 있곤 했을 것이다. 얼굴의 일부가 아니라 생애의 접힌 모서리가 절박하게닮은 사람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빠는 무늬의 의미가 있는 문‘이라는 글자를 좋아하셨던것 같아요. 그래서 언니에게도 그 글자가 들어간 이름을 지어준 거겠죠. 문‘이 무늬라면 남는 건 ‘주‘인데, 제 생각에 아빠는 우주의 주‘를 염두에 두지 않았나 싶어요."
"우주요?"
웃으며,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우주의 무늬가 내게는놀라운 우연의 결과란 걸 알 리 없는 문경은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추연희(秋慈禧), 그리워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사람, 나는이제 그 이름을 내 삶이 끝날 때까지 기억할 것이다. 그 이름을 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은 우주를 키우는 일과 함께 내가이 세계 앞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가 되리라.
연희가 죽었다.
그녀는 암흑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또다시 태동이 지나갔다.
연희가 살았던 곳으로 우주가 한 뼘 더 다가와 있었다.
그들 사이에, 두 세계의 무게중심에, 나는 서 있었다.
나는 바람을 내 가슴으로 끌어왔다. 품에 들어온 한 줌의 바람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누구의 온기인지, 나는 당연히 알고있었다. 너구나,
속삭였다.
우주
우주, 라고 나는 또 한 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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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나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이야. 하루를 못 벌면그다음 하루는 굶는 인생이라고, 죽는 건 하나도 안 가여워.
사는 게, 살아 있다는 게 지랄맞은 거지."

"저기, 제가 한번 안아 드려도 될까요?"
".......?"
"아빠는 게가 어디 멀리 갔다 오면 꼭 그렇게 해 줬거든요저는 오늘 아빠를 대신해서 여기에 온 거고요."
".. 그럼, 그래 줄래요?"
되묻자, 문경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두 팔을 벌려나를 안았다. 문경의 숨결은 설탕처럼 달았고 내 등을 토닥이는 손바닥은 부드러웠으며 아빠를 찾아 주어 고맙다고 말하는목소리는 귓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제야 나는 문경에게서그의 흔적을 온건히 발견한 것만 같았다.
문경에게 안긴 채, 나는 잠시 흐느꼈다.

벨기에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나 같은 아이들이 대개그렇듯, 나 역시 입양된 가정에서 늘 방황했고 합당한 애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장하는 내내 내가 누구인지 몰라 혼란스러웠고,
사실은 지금도 종종 그렇습니다. 입양은 버려진 나를 구원해 주었지만, 동시에 나의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박탈해 가기도 했으니까요. 벨기에에서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낄수록 당신이 더더욱 미워지더군요. 어쩌면 당신에게서 받은 사랑을 기억했기 때문에 당신으 용서하는 것이 더 힘들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복희 식당을 나와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며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장면을 외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상으로빚어진 그 장면 속에서 죽은 딸을 끌어안고 있는 연희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한순간에 희망이나 의욕을 잃은 사람은 그런 얼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딸의 피가 식고 근육이 경직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연희는 동 생을 잃은 순간의 고통을 떠올렸을 테고 악착같이 생명을 앗 아 가는 자신의 삶에 모든 전의를 상실했을 것이다. 그날부터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자기 삶을 향한 환멸 어린 항복……….

철로가 불확실해지자, 순진하게 악하다는생모에 대한 단정도 무의미해졌다. 암흑 속의 여자, 까만 봉지에 봉합된 한 생애,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 무덤조차 알려지지 않을 사람, 나는 이제 그녀에 대해 그 무엇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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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복희 곁에 오래 머물 자격도 없었다. 객관적으로 나는, 복희 식당에서 단 세 번 식사를 한 적이 있는 손님일 뿐이었다. 그 이름조차 잘못 알고 있었던, 그녀의 삶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배역……….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아누우며 활처럼 몸을 안으로 만 채두 팔로 배를 감쌌다. 몸 구석구석을 죄던 나사가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다는 너의 신호, 세계를 향한 노크,
내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건네는 작은몸의 언어,
첫 태동이었다.

복희에게그 식당은 직장이었고, 동시에 일생을 통과하여 당도한 혼자만의 거주지였다. 노동과 재산, 시간을 모두 쏟아 부은 그 식당에 복희라는 이름을 새긴 행위도 살아 있다는 발신의 의미였을까. 복희의 살아 있음, 내게는 복희지만 공식적으로는 추연희인 그녀에게는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방식이었던가. 그것으로 그녀는 고단한 삶을 보상받았을까.

정우식 기관사는 5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최창룡씨는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을 배반하는 강렬한 추위를 느꼈다. 어깨가 저절로 안으로 말렸고 기침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내 외로움을 대신 연기할 가상의 배우가 필요했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서서히 결빙되어가는 상상 속 배우에게 외로움을 투사하려 했지만, 이번엔 그런 식의 전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때로 습관은 뜻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복희는 나와 넘버 원 닮았다는 그 아이에게 고맙고도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그 말의 속성을 잘 안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자신의아이를 입양 보낸 부모들이 늘어놓는 가장 흔한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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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다, 에브리, 에브리……. 럭키하고 또 럭키한 그녀가 선택한 단어들에는 체온이 있었고, 그제야 나는 내가 고향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틀 전 밤, 서울에서의 첫날,
나는 그렇게 복희를 만났다.

좌중을 압도하는 그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다가 테이블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피가 몰리도록 있는 힘껏 냅킨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을 보게 되었다.
애쓰고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손이 신체의 말단기관이 아니라 내면의 모양을 추출하여 가시화하는 독립된 물질 같기만 했다. 그와 연인으로 만나는 동안, 실제로 나는 그의 표정이나 말투보다 손의 상태를 더 예민하게 살폈다.

아현은 오래전 애고개로 불렸다가 지명이 한자화되면서 비슷한 발음인 아현 - 아현은 언덕(阿)과 고개()를 뜻하는 한자로 조합된 단어였다. —— 으로 바뀐 경우라고했다. 한때의 왕국인 조선에서는 시체가 생기면 무조건 사대.
문 밖으로 내보냈는데 애고개, 그러니까 아현은 주로 아이들.
을 묻었던 매립지라는 설명을 나는 천천히 읽었다. 애기 무덤
들이 즐비했던 곳, 나는 서울에서 가장 슬픈 의미를 갖고 있는행정 구역에서 1년 동안 문주로 살았던 셈이다.

 게스트 하우스 밖으로 나온 순간, 복희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노파가 그 버려진 의자에 앉아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고 있는 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생애를 다 살아 버린미래의 나 자신과 마주친 듯, 순간 나른한 쓸쓸함이 밀려왔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노파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노파가 꿈에서 깨어나면 골목과골목의 집들이 모두 먼지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자,
그 골목이 현생의 무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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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의 유래는 두 가지네요. 하나는 이곳에 이태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그때의 이름이 지금까지 쭉 내려왔다는 거예요. 역원 이름이 이태(梨泰)인 이유는 여기에 큰 배밭이 있어서였고요. 다른 하나는 조선이 전쟁을 겪을 때마다.
겁탈당한 여자들이 이 동네에서 아이를 낳고 모여 살았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이타인(異他人)으로 불렀다네요. 그 이타인에서 이태원이 유래됐다는 거죠."  "두 번째 설이 더 그럴싸하네. 이태원엔 미군도 있고 외국인 이랑 실향민도 많이 살고, 게이 바랑 무슬림 식당도 흔하잖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관성이 되어 버린 외로움과 세상을향한 차가운 분노, 그런 것을 꾸부정하게 굽은 몸과 탁한 빛의얼굴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모습.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죄를 모른다는 건, 그 순진함 때문에 언제라도 더큰 악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녀는 나를 낳아 키웠지만, 동시에 철로에 버린 사람이었다. 자신의 딸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무심한 악이 철로라는 공간에는 함의되어있는 것이다. 

문이 열렸을 때, 그리고 그곳엔 당연히 낭떠러지가 아니라 계단이 있었다. 멀리 보이는 오르막길 아래로는 불빛이 가득했고 조명을 밝힌 남산 타워도 한눈에 들어왔다. 정전은 높은 지대의 집들에만 찾아온, 일종의 가난한 천사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복희는 웃었다. 웃을때 복희는 더 이상 외로움과 분노를 체득한 노년의 표본 같지 는 않았지만, 대신 쓸쓸해 보였다. 끊임없이 내벽에 상처를 덧 내며 시간과 함께 공처럼 굴려 왔을 어떤 마음이 인간의 얼굴 로 빚어진다면 꼭 그녀처럼 보이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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