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암흑에서 왔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영원이란 무형의 테두리에 갇힌암흑이 나의 근원인 셈이다. 

그녀가 생각난 건 그 순간이었다. 기억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생각했고, 그 생각은 곧바로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 낯선 질감의 열망은, 뜻밖에도 크고 둥글고 섬세했다.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무도 찾아 주지 않아 정처 없이 표류하는 사람이 어느새 내 외로움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을 무대처럼만들어 상상으로 빚어진 배우에게 내게 닥친 외로움을 전가하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전가된 외로움은 내 것이면서도 내것이 아니었기에 깊이 빠지지 않아도 된다는 게 나는 좋았다. 

이름은 집이니까요.
 서영의 두 번째 이메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는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정은 지속적으로 위로의 힘을 발휘할수 없다. 기대면 기댈수록 나의 문기둥은 흔들렸고 조금씩 부서졌다. 희미해지고 투명해졌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실망감을 안기기도 한다는 걸터득한 뒤부터는 괴롭거나 혼란스러울 때마다 주문을 외듯 문주와 문기둥을 연달아 되뇌는 습관도 버렸다. 위로의 유효기 간은 끝났고, 유적은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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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제가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들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앙리가 그의 뒤에 버티고 있다고요? 그것참 잘된 일이군요. 난 앙리를 좋아합니다.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따뜻한 손길을 가졌습니다. 그는 나를 배신할 인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난 그에게 빚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살당했습니다. 내 가족 중 누군가의 손에 말입니다. 내가 아프면 앙리를 부를 겁니다. 내가 죽게 된다면 나는 그를 프랑스와나바르의 왕으로 임명할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날 위해 울어줄 것입니다."
그 순간 카트린느는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전율을 느꼈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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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인 저 백작은 더 이상 육신이랄 것이 남아있지 않은 불쌍한 영혼입니다. 그러니 육신을 가지신 왕비님께서 저 불쌍하기 그지없는 영혼을 조금만 사랑해 주십시오. 잘생긴 라 몰의 영혼을 조금만 사랑해 주십시오. 왕비님께서 말을하지 못하시겠다면 몸짓만 보여주셔도 됩니다. 그냥 미소만 보여줘도됩니다. 그는 유식한 영혼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들을 것입니다.
빌어먹을! 안 그러면 제가 칼을 뽑아 르네의 목을 베어버릴 것입니다.

이보게 친구! 내 말 잘 들어! 우린 아무리 잘해봐야 음모 속의 그림자에 불과해, 가담하면 결국 희생자가 되고 말 거야. 왕비는 자네에게일시적으로 끌리고 있고, 자넨 왕비에게 환상을 품고 있네, 그게 다야난 자네가 사랑에 목숨 거는 건 말리고 싶지 않네. 하지만 정치에 말려들지는 말게."
"코코나!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환상이아니라 진짜로 왕비님을 사랑해. 내 모든 영혼을 바쳐서 말이야. 어쩌면 내가 미쳤는지도 몰라. 하지만 자넨 현명해. 절대로 이 일에 말려들지 말게. 난 자네까지 고통받는 건 원치 않아."

"사실 말이 왕이지 그는 왕국도 없는 왕이오."
"마마. 왕을 만드는 것은 왕국이 아니라 태생입니다."

그녀가 느끼는 좌절감은 적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끊임없이 덫에서 빠져나가는 앙리가 어떤 전지전능한 힘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막을 수 없는 어떤 운명이라고 할까. 그런데도 그녀는 애써 모든 것을 우연으로 돌리려고 했다. 내일이면 순식간에 퍼져나갈 이 미수 사건으로 앙리가 오히려 신교도들로부터 입지를 굳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녀는 울화가치밀었다. 그녀는 이 우연이 혹시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자신의허리에 있는 피렌체 단검으로 앙리에게 미소 짓는 운명을 찔러 버려야한다고 생각했다. 

"네 동생을 멀리 보내려고 하는 것이 그를 싫어해서가 아니냐?"
"하! 하! 어머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왜 그 애를 좋아해야 합니까? 또 그 애는 저를 좋아할까요? 아니 어머닌 저를 좋아합니까? 내 개들과 유모 빼고 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아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제가 미워하는 만큼 그 애가 저를 미워해도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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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애머런스 보서크 지음, 노승영 옮김 / 마티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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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책을 읽고 ( 주변에 책 읽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상대적인 양이다) 책을 좋아하며 이삿짐을 싸면서도 노끈으로 혹은 작은 박스에 손수 책을 선별해 묶고 담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 사람이다보니 이 책에 대한 입소문에 무심할 수 없었다.

책의 기원으로부터 사물로서의 책, 내용으로서의 책, 아이디어로서의 책,인터페치스로서의 책으로 분류하여 세세하게 끌어내는 이야기는 마치 연인의 어린 앨범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고 때때로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아주 볼품없었던 기록의 시작과 필요, 그리고 조금씩 쓰여지고 묶여지며 '책'이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형태의 사물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다채로웠다. 다윈씨의 종의 기원에 맞먹는 책의 기원이라 칭해도 그다지 빠지지 않을 것 같다.

진흙덩어리에서 시작해 전자책으로 진화를 멈추지 않은 책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인간과 함께 역사를 이어가는 매체임에 분명하다.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지고 변형되어지며 내용과 형식의 비약적인 변화는 실로 놀라운 변화이다.

 

흥미로운 것들은 책의 구석구석의 명칭이나, 지금은 너무나 당연히 책등에 쓰여지는 제목과 저자의 표기가 책배에 있었다는 것, 죽간에 기록하기 위한 문자가 되어버린 한자의 탄생.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들의 어원이 책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인쇄의 총아 구텐베르그씨의 의문의 1패..

 

'책을 덜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읽을 뿐'이라는 이야기에는 공감이 된다. 자연스러운 세상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읽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깊이와 사유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고대 사상가들은 글쓰기를 불신했다고 했다. 글쓰기의 기술이, 구술토론을 망치고 세상과 철학과 시간과 공간을 이애하는 바탕이 되는 스토리텔링을 무너뜨릴거라고 말이다. 그들은 적어서 학습하기 보다 외우거나 누군가 읽는 것을 듣고 사유를 키우고 토론의 깊이를 채워왔던 것이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며 수십개씩 외우던 전화번호도 못외우게 된 것과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와 연결되어진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객관화 시키고 타자화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책의 외형적 변화 뿐 아니라 내용적 변화와 역사적 사실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가독성이 있다.

책에 관련된 빨간 페이지의 경구도 좋았고, 무엇보다 그림으로 사진으로 삽입되어 있는 책의 모습들이 좋았다.

 

정말 좋아하는 것의 역사와 본질과 발전의 모습을 확인한 것 같은 ..

그래서 더 나은 미래와 더 건강한 발전을 기대하게 하는..

그런 책.

 

비슷한 책들이 여러권 있었지만 가장 깔끔하고 번잡하지 않게 잘 정리된 것 같다.

아직까지는..

밑줄과 밑줄을 끝없이 긋게 만드는 책이었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우리가 책이라 부르는 그것의 진화와 변화는 어떻게 이어질까? 그곳에 인류의 진화된 모습도 함께 놓여지게 될까?

 

문득..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인간이 필요한 시점에 놓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인간이 단속평형의 위치에 놓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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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때 시몬느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저에게몇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하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바칠 수 있을텐데 유감스럽게도 하나밖에 없군요."

이것은 두 가지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하느님은 선이며, 이세상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 바깥에 존재하는초월적인 하느님이란 한 개인만의 하느님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시몬느가 말하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절대선으로서의 하느님이란,
바꿔 말하면, 이 세상이 선의 바깥에 서 있다는 뜻이다. 이 세상을지배하고 있는 것은 선이 아니라 필연성이며, 이렇게 필연성으로짜여진 세상에는 조그만 틈이나 구멍도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세상에서 침묵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 하느님에게주의와 사랑을 돌리는 사람들에게말고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선과 필연성 사이의 균열,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균열이시몬느의 종교적인 사고의 특징이다. 그녀는 항상 하느님에 대한순수한 사랑을 지키려 했다.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하느님을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 참으로 순수한 사랑을 지닌사람들뿐이다. 세속적인 권력을 지닌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는 항상저속함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그 전능하신 힘을 이 세상에서 사용하지는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필연성에 밀려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있다.

그렇다면 시몬느가 먹기를 거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실제로 시몬느가 음식을 거의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주와 애쉬포드에서의 8일간 시몬느의 위는 음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것을치료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으므로 시몬느는 무진 애를쓴 뒤에야 그것도 겨우 조금밖에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둘째는 시몬느는 프랑스를 떠나올 때부터 이미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에는 음식을 가능한 한 먹지 않기로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병이 난 뒤에도 이 결심을 지키려 한것 같다. 시몬느가 일단 맹세를 하고 나면 아무도 그것을 깨뜨리게할 수는 없었다. 

——"이 몸과 영혼을 갈갈이 찢어 당신을 위해 쓰시고 제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도록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그 여자의 생애는 여기에서 끝났으며 또,
바로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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