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들이 집필 활동으로 생계비를 벌 수 있게 되자 글쓰기는 직업이 되었으며 소설가와 시인이라는 신흥 계급은 출판업자에 더욱 많은 인쇄거리를 가져다주었다.

 이 시각에는 20세기에 유행하던 책에 대한 관념-
"책은 사상, 아이디어, 이미지를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 전달하며 서체 디자이너, 책 디자이너, 인쇄업자, 출판업자의 임무는 이 아이디어를 최대한 투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다-이 반영되어 있다. 책이란 천재적 저자의 순수한 지적활동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생각이다‘라는 관점을 취하면서 책의 사물로서의 지위는 대다수 독서 대중에게서 사라져버렸다. 우리가 유리잔을 들어 흡족하게 내용물을 비우듯.

나는 아티스트북이 예술 작품을 구현하고 생산하는 형식적 수단을 [그 작품이 주제적 또는 미적 문제와 결합하 는 독창적 작품으로서 채으 창작하는 예술가와 작가의 행위 영역"이라는 드러커의 규정에 동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아티스트 북은 예술품 사진이 담긴 카탈로그가 아니요, 출판 공방(fine press)에서 유명 미술가의 삽화를 신고 정교하게 가공한 가죽 표지와 마블링 한면지로 감싼 소설도 아니다.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그 선택이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작품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그 선택이 접목되어야 한다. 

그 페이지 아래쪽의 "W. 블레이크 짓고 찍다"(TheAuthor Printer W. Blake)라는 문구는 그의 작품에서 창의력과 기예가 하나가 되었음을 똑똑히 보여준다. 블레이크는 당시의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아동 노동, 도시 위생, 노예제 등에 맞서 목소리를 냄으로써 아티스트 북과독립 출판의 중요한 흐름을 확립했다. 그것은 사회 정의를 퍼뜨리는 수단으로 책을 활용하는 것이다.

1897년에 발표한 장시(長詩)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폐기하지 못하리라, 우연을」에서 페이지는 그릇이 아니라 바다이며 그 파도에 던져진텍스트는 반짝이는 수면을 가로질러 독자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언어의 난파선이다. 어떤 면에서 말라르메는 책의 이데아를복권하려는 블레이크의 작업을 계승했지만, 채식 사본을 본보기로 삼은 것이 아니라 시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더 보편적인매체— 당시의 신문-에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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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사가들은 1501년 이전에 유럽에서 인쇄된 책을 인큐내뷸러(incu-nabula)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요람‘을 일컫는 라틴어로 인쇄코덱스의 요람기에 빗댄 표현이다. 

인큐내뷸러는 우리에게 친숙한 책 형식인 ‘인쇄 코덱스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량 생산되는 책처럼 균일하지는 않았다. 근대 초기의 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책‘(book)과 ‘책권(冊卷, book copy)을 구분한다. 인쇄기를 한 번 돌려 찍어낸 각각의 코덱스마다 고유한 유통, 내력, 물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책을 보관할 때 책등이 안쪽을 보도록 넣었기에, 독자가 책을 찾을 수 있도록 책배를 문양이나 금박, 정교한그림으로 장식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책등에 저자 이름과 책 제목이 박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것은 16세기 중엽 들어 독자가 장서가로 바뀌고 서재를 확장하는 것이지성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면서 책등이 바깥을 보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우리는자신이 책 속으로 사라졌다가 독서 경험에 의해 변화된 채 몇시간 뒤에 다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식자들은 이 탈육(脫肉)의 로맨스를 일종의 식물인간 상태로 묘사되는 텔레비전 시청의 수동성과 대조한다. 

 18세기에 잉글랜드의 출판업자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식 재산권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저작권 논쟁은 ‘책‘을생각하는 관점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책을 인쇄하는 것뿐아니라 번역하고 다른 매체에 맞게 각색할 수 있게 되자 권리는 사물로서의 책이 아니라 그 책에 담긴 텍스트로 넘어갔다.마침내 세계 최초의 저작권법인 앤여왕법(1709)은 작품의 소유권을 저자에게 부여함으로써 내용이 형식보다 우위에 있음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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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으로서의 책

우리가 알고 있는 묵독이 자리 잡으려면 읽기의 맥락과 글의 형식이 달라져야 했다. 읽기는 더 사적인 경험이 되어야 했는데, 이는 읽고 쓰기가 엘리트와 수도원 공동체 너머로 확장되어야 했다는 뜻이다. 글도 더 읽기 쉬워져야 했다. 중얼거리며읽는 관행은 6세기까지도 통용되었는데, 이 관행이 사라지려면구두법이 표준화되고 띄어쓰기가 도입되어야 했다. 그런 뒤에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읽기를 위해 설계된 도서관이 발전하여이 새로운 읽기 형태인 묵독을 뒷받침했다.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코덱스는 서로 멀리 떨어진 사상가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데 필수적이었으며,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두려워한 바로 그 비동기적 사유 발달이 가능해졌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연결된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듯 글쓰기는 인간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특징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쇄‘다. 코덱스가 수도원 담장을 넘어서자 저자의 개념도 조금씩 달라졌다. 수도원 필경사들은 (자신이 책에 담는) 사상의 창작자가 아니라문화적 지식을 글로 옮기는 직공 취급을 받았다. 대학이 떠오르고 라틴 그리스 문학과 수사학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가 활발해지면서 저자를 창작자로 보는 관점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기계화와 더불어 찾아온 이 변화는 책을 사물이 아니라내용으로 재해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책의 형식은 그「안에 담긴 정보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이용한 기술 중 상당수는 그가 인쇄소를 차릴 때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이 기술들을 조합하고 완성하고 자신의 꿈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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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토는 결이 가로인 안쪽이자 글을 쓰는 면이며 베르소 폴리움‘ (verso folium)은 뒤집은 잎이라는 뜻으로,
두루마리 뒷면을 가리킨다. 코덱스의 펼침면 에서는 언제나 왼쪽이 베르소, 오른쪽이 렉토다.

 책이 사치재이던 시절에는 채프먼(chapman)이라는 도붓장수가 장터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소책자를 팔았다. 이것이 챕북(chapbook)으로, 분량은 4~24페이지이며 오늘날에도 얇고 값싼 시집을 인쇄하는 소규모 출판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하지만 코덱스가 보급된 가장 큰 이유는 코덱스에느 없는 특징에 있다. 그것은 두루마리가 히브리어 성서인 토라와 이교도 경전을 기록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이다. 

 읽기는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구두 행위였으며 이는 쓰기에도 반영되었다. 그리스의 두루마리본은 단어 사이에 공백이없을뿐더러 격 변화도 하지 않고 구두점은 전혀 쓰지 않는 스크립티오 콘티누아(scriptio continua, 붙여쓰기) 방식이었다. 그러니 소리 내어 읽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야 제대로 읽을 수있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글쓰기를 불신했다. 글쓰기라는 기술이 구술 토론의 기예를 망치고 세상과,철학과,시간과,공간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는 스토리텔링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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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로마의 두루마리는 이집트 파피루스와 마찬가지로 단을 나눴는데 그리스인들은 이를 파기나 (pagina)라고 불렀다. 파기나는 페이지를 일컫는 기본 용어가 되었으며, 정보과학자 보니 맥 말마따나 책의 "인지적 구조를 확립했다.

 공교롭게도 ‘冊‘의 모양은종이의 섬유가 놓인 방향을 뜻하는 결‘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죽간의 폭이 좁은 것은 것은 글자를 쓰는 방향 뿐 아니라 글자 자체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좁은 죽간에 쉽게 쓸 수 있도록 한자는 가로로 눕지 않고 세로로 선 형태를 취했다. 류궈중은 말과 돼지를 뜻하는 글자를 예로 드는데, 뜻밖에도 둘 다 네다리로 디디지 않고 앞다리를 든 채 뒷다리로 서 있다.사람과 짐승을 가리키는 글자들은 편하게 서 있을 뿐 아니라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읽고 쓰는 방향과 같다. 

 그녀의 「창카니 키푸 (2012)는 서른두 점이 제작되었는데, 이 매듭책은 (작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안데스의 구전 우주와 서구의 인쇄 세계라는 두 문화와 세계관의 충돌에 대한 은유다. 

공교롭게도 ‘역할‘을 뜻하는 영어 단어 롤(role)의 어원은 르네상스 시대에 배역을 적어둔 두루마리 (roll)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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