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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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은 미안하고 수다는 부끄럽다. _ 문래 중 - P266

그녀가 가방에 담은 건 옷가지와 화장품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그 가방을 진정 무겁게 했던 건 더 멀리 가보고 싶다는 바람과 다른 삶에 대한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앞으로도 나아지는 건 없을 거라는 절망적인 두려움이 그 위에 얹히기도 했으리라. _ 문래 중 - P269

어른들에게는 그 아파트들이 미래를 보장해주는 사유재산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보였겠지만, 아이들 눈에는 그저 거대하고 신묘한 장난감이 들어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_ 문래 중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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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없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의지도 신념도 없이 굴러온 돌이자 남의 둥지를 탐내는 뻐꾸기일 뿐이라는 말이 깊이 우리를 베고 지나간다 해도 어쩌면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상처는 아닐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부류의 기대를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러나 연진은 알 수 없었다. _ 경계선 사이로 중 - P128

저는 엄마가 술에 취하면 왜 트리 뒤에서 노상방뇨를 했는지, 뭐가 슬피서 울있던 건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요, 그런 엄마가 너무 싫어서, 단순히 싶은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물은 적이 없었죠. 제게는 산업재해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의 표본이 바로 엄마인데, 저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던 거예요. _ 경계선 사이로 중 - P131

남편과 나는서로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게 하는 것에 실패한 셈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것이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_ 파종하는 밤 중 - P146

우리의 계급이 추락했고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가가 아니라는 선고가 그 고백에 이어질지도 몰랐다. 불안이 실체가 되지 않도록 그의 고백을 차단하여 침묵의 공유지를 유지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할 수 있는 것도 그뿐이었다. _ 파종하는 밤 중 - P147

불안할 땐 대개 그렇듯,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장면만 자꾸 상상됐다. _ 파종하는 밤 중 - P156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M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완성할 것이며 계속해서 익명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을 거라고, 산 자의 기억은 죽은 자의 유일한 특권이기 때문에, 내게는 그것이 위안이 맞으며 절실하게 필요하다고도. 그때쯤이면 남편은 조금은 질린 얼굴로 변해 있을 것이고, 나는 차가운 침묵 속에서 내게 남은 정상인의 함량이 과연평균치인지 고민했을지 모른다. _ 파종하는 밤 중 - P159

고통스러운 위안이었다. _ 파종하는 밤 중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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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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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이나 가족, 심지어 욕망도 없이 산속 은둔자로 사는 지인이란 속세의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패배했을 때 그 쓰라린 마음을 되비춰볼 만한 거울로 퍽 쓸모가 있을 테니까. 상대적인 박탈감을 위로받을 수 있는 영원한 타자……… _ 환한 나무 꼭대기 중 - P12

이곳에서라면 찰랑거리는 물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듯 남은 생을 소모할 수 있겠다는 뜻밖의 기대감이 차올랐다. _ 환한 나무 꼭대기 중 - P17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죽었는데, 죽었다는 걸 알고 느낄 수 있는 거야. 죽었다는 걸 아는 상태는 영원할 거잖아,
죽음처럼, 안 그래?
_ 환한 나무 꼭대기 중 - P19

날마다 그녀의 일부가 하수구로, 하수구의 구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녀의 모든 것이 그리될 거라는 비관적인 허무에서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던 시절이었다. 절에 들어간 이유라면, 오직 그뿐이었다. _ 환한 나무 꼭대기 중 - P28

외로움은 해변으로 밀려와 퇴적되는 세상의 물건들처럼 그녀의 마음 가장자리에 쌓여갔다. _ 환한 나무 꼭대기 중 - P33

인 양 찰랑거리는 여름밤을 올려다봤다. 나뭇가지 무늬로 조각났지만 전체이면서 영원으로 가닿는 밤이었다. 시간이 좀더 흐르자 구름 속에 숨어 있던 꽉 찬 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그란 달은 이곳과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처럼 보였고, 덕분에 그녀는 이 세계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달빛은 나무 꼭대기부터 환하게 물들였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_ 환한 나무 꼭대기 중 - P37

지금껏 내 것인 줄 알았던 트랙에서 벗어나 새로운 트랙에 익숙해져가는 지난한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_ 흩어지는 구름 중 - P46

석 교수 밑에서 일했던 6년여 동안, 뉴스를 보다가 부역자나 공모자 같은 단어가 들려올 때면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 잇몸에 상처가 날 때까지오래오래 이를 닦곤 했다. 환부나 증상 없이 나는 투병했다.아무도 모르게…… _ 흩어지는 구름 중 - P47

아니, 미래의 유언을 미리 끌어와 남매가겪은 외로움에 지불하려 했다. 한 시절의 외로움이 회수되거나 소비될 리 없으니 미래에서 온 엄마의 유언에는 아무런 지불 능력이 없었다. _ 흩어지는 구름 중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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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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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산문집..그것도 소설가가 쓴...소설가의 책인지 몰라도 처음에 써내려간 ˝인물˝에 관한 글은 두번 읽게 된다. 테이프를 한번 더 돌려 듣는 것처럼...

기억나는 문장은 1)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포개진다. 2)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현미밥을 먹는것처럼 꼭꼭 씹어먹어야 제 맛을 느낄 것만 같은 문장들이다. 책장을 덮고 생각나는 단어가 ˝성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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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속에 깃든 잔인함과 어쩔 수 없는 아늑함에도불구하고 ‘말’ 안에는 늘 이상한 우스움이 서려 있다. 멋지게 차려입고 걸어가다 휘청거리는 언어의불완전함 같은 것이. 언어는 종종 보다 잘 번식하기위해 보다 불완전해지기로 결심한 어떤 종처럼 보인다. _ 말의 약점 중 - P99

초는 처음이란 말. 그러나 비로소‘란 뜻도 있다. 이겨울은 내가 번번이 맞는 겨울, 당연하되 익숙해지지 않는 겨울, 그러나 비로소 맞는 겨울이다. 그 사실이 특별하지 않도록 지구는 기꺼이 한 번 더 돌아준다. 아마 앞으로도 한참은 그런 식으로 돌 것이다.
_ 초겨울 중 - P117

여전히 그날 자기가 부딪힌 ‘그것‘이 무언지 모르는 염전 아저씨처럼. 그렇게 선뜻 ‘넘어져‘주어 이야기를 더 이야기스럽게 만들어주는 세상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진종일 실수만 했다는 허생원에게. 나보다 젊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나와 동갑이었던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나보다 늙어버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_ 안아볼 무렵 중 - P122

우리 집 부엌에는 창이 하나 있다. 그 창은 우리 집창 중 제일 작다. 작은 사각 창 안에 담기는 낮과 밤의 풍경은 시시각각 다르고 소리 또한 그렇다. 그중내가 자주 듣는 소리는 종소리다. _ 여름의 속셈 중 - P137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얇은 포스트잇의 찰나가 쌓여 두께와 무게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우리이기 전에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말들. 그리하여 나와 똑같은 무게를 지닌 타인을 상상토록 돕는 말들을 생각했다. _ 점, 선, 면, 겹 중 - P252

연필 쥔 손에 힘을 주면 책에 흐릿한 홈이 파인다.
그 홈에는 내가 어느 문장에 줄 그은 순간 느낀 시간과 감정이 고인다. 그래서 가끔 그 홈이 물고랑 밭고랑 할 때 ‘고랑처럼 느껴진다. 나와 나 자신을, 현재와 과거를, 우리와 타자를 잇는 먹 고랑처럼. 천천히그리고 꾸준히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이야기도 언젠가 두보의 시구처럼 누군가의 삶과 만나게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스침이 혹 꽃잎 한장의 무게밖에 갖지 못한다 해도, 이야기의 이어달리기, 이야기의 배턴터치가 계속되길 빈다. 대부분연필이 길고 둥근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지 않을까상상하면서. _ 점, 선, 면, 겹 중 - P254

그러자 곧 거기 모인 이들의 분노와 원망,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과 슬픔도 결국 모두 산 자의 것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순간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건, 죽은 자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산 자들이 느끼는 그 비루한 것들의 목록 안에서조차 그들이 누릴 몫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_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 - P271

그중 어떤 불은 지금도 내게 원초적인 두려움을 일깨우는데 이청준의 중편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이 그렇다. 한밤중 느닷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불, 답에 따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데 도무지 저쪽 실체가 보이지 않아얼어붙은 한 가족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겐 저 눈부신 추궁 혹은 폭력이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처럼느껴지는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한국의 많은 갈등이면에 여전히 저 전짓불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_ 빛과 빚 중 - P286

문학이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시대물을 쓰지 않더라도 살면서 한 번쯤 전짓불 앞에 서봤거나서게 될 작가로서 그렇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빛의 테두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렇다. _ 빛과 빚 중 - P293

맞다.
진짜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희망‘ 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_ 잊기 좋은 이름 중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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