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속에 깃든 잔인함과 어쩔 수 없는 아늑함에도불구하고 ‘말’ 안에는 늘 이상한 우스움이 서려 있다. 멋지게 차려입고 걸어가다 휘청거리는 언어의불완전함 같은 것이. 언어는 종종 보다 잘 번식하기위해 보다 불완전해지기로 결심한 어떤 종처럼 보인다. _ 말의 약점 중 - P99
초는 처음이란 말. 그러나 비로소‘란 뜻도 있다. 이겨울은 내가 번번이 맞는 겨울, 당연하되 익숙해지지 않는 겨울, 그러나 비로소 맞는 겨울이다. 그 사실이 특별하지 않도록 지구는 기꺼이 한 번 더 돌아준다. 아마 앞으로도 한참은 그런 식으로 돌 것이다. _ 초겨울 중 - P117
여전히 그날 자기가 부딪힌 ‘그것‘이 무언지 모르는 염전 아저씨처럼. 그렇게 선뜻 ‘넘어져‘주어 이야기를 더 이야기스럽게 만들어주는 세상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진종일 실수만 했다는 허생원에게. 나보다 젊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나와 동갑이었던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나보다 늙어버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_ 안아볼 무렵 중 - P122
우리 집 부엌에는 창이 하나 있다. 그 창은 우리 집창 중 제일 작다. 작은 사각 창 안에 담기는 낮과 밤의 풍경은 시시각각 다르고 소리 또한 그렇다. 그중내가 자주 듣는 소리는 종소리다. _ 여름의 속셈 중 - P137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얇은 포스트잇의 찰나가 쌓여 두께와 무게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우리이기 전에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말들. 그리하여 나와 똑같은 무게를 지닌 타인을 상상토록 돕는 말들을 생각했다. _ 점, 선, 면, 겹 중 - P252
연필 쥔 손에 힘을 주면 책에 흐릿한 홈이 파인다. 그 홈에는 내가 어느 문장에 줄 그은 순간 느낀 시간과 감정이 고인다. 그래서 가끔 그 홈이 물고랑 밭고랑 할 때 ‘고랑처럼 느껴진다. 나와 나 자신을, 현재와 과거를, 우리와 타자를 잇는 먹 고랑처럼. 천천히그리고 꾸준히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이야기도 언젠가 두보의 시구처럼 누군가의 삶과 만나게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스침이 혹 꽃잎 한장의 무게밖에 갖지 못한다 해도, 이야기의 이어달리기, 이야기의 배턴터치가 계속되길 빈다. 대부분연필이 길고 둥근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지 않을까상상하면서. _ 점, 선, 면, 겹 중 - P254
그러자 곧 거기 모인 이들의 분노와 원망,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과 슬픔도 결국 모두 산 자의 것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순간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건, 죽은 자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산 자들이 느끼는 그 비루한 것들의 목록 안에서조차 그들이 누릴 몫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_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 - P271
그중 어떤 불은 지금도 내게 원초적인 두려움을 일깨우는데 이청준의 중편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이 그렇다. 한밤중 느닷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불, 답에 따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데 도무지 저쪽 실체가 보이지 않아얼어붙은 한 가족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겐 저 눈부신 추궁 혹은 폭력이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처럼느껴지는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한국의 많은 갈등이면에 여전히 저 전짓불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_ 빛과 빚 중 - P286
문학이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시대물을 쓰지 않더라도 살면서 한 번쯤 전짓불 앞에 서봤거나서게 될 작가로서 그렇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빛의 테두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렇다. _ 빛과 빚 중 - P293
맞다. 진짜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희망‘ 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_ 잊기 좋은 이름 중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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