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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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계에서는 분쟁이 기술 진보를 가속한다는 사실이 자명하다. 각국이 서로 경쟁할 뿐만 아니라 분쟁이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에도 분쟁이 기술 진보에 도움이 되었을까?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풍부한 기회를 제공했다. 화가들은 서로 경쟁하는 가문들과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프로파간다 전쟁에서 그림 실력을 발휘했다. 성벽과 교량을 건설하는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더 큰 힘과 기술을 얻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군국화는 예술가와 과학자, 작가들을 위한 후원금을 줄였다. 폭력과 불확실성은 무역을 억제했다. 그럼으로써 육지와 해상의 적들에게 생계를 위협받는 도시와 항구의 활력도 떨어뜨렸다. 실제로 여러 도시의 규모가 작아졌다. 구텐베르크와 콜럼버스의 세기에, 결과적으로 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변화를 촉발시켰고 다른 면에서는 변화를 억눌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_ 15세기 중 - P185

지는 않았다. 흔히 그렇듯 중요한 것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탐험에대한 정치적 의지와 돈이었으며, 이 둘은 흔히 서로 뒤엉켰다. 기술은 그저 정치적 의지와 돈이 결합해 생긴 강렬한 야망을 실현할수 있게 했을 뿐이다.

_ 15세기 중 - P186

그러나 끝없는 호기심과 매년 탐험 원정대에게 장비를 갖추어줄 정도의 재력을 동시에 갖춘, 한 고등 교육을 받은 왕자가 부에 굶주린 선원들과 만났을 때 세상이 바뀌었다.

_ 15세기 중 - P187

포르투갈 제국은 기사도와 열성적인 십자군 전쟁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항해왕자 엔히크가 사망한 1460년대에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수록 탐험대 지도자들은 후원자들을 더 쉽게 설득해 항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더 야심차게 남쪽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

_ 15세기 중 - P188

지금 보면 이 모든 사건이 조금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학자들이 옳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류를 범했고, 제노바인 선장은 야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그 사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결의는 굳건했다. 그는 포르투갈로 돌아왔고, 주앙 2세에게 또다시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한다. 이 무렵 콜럼버스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항로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심정으로 카스티야에 돌아왔다.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그의 부군 아라곤의 페르난도는 막 그라나다를 정복해 레콩키스타를 완수한 상태였다. 이 성공으로 의기양양했던 두 사람은 해지는 곳을 향해 출항한 콜럼버스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_ 15세기 중 - P191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베리아 반도 왕국들의 해외 진출을 레콩키스타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던 셈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2세기의 십자군보다는 11세기초의 바이킹과 공통점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_ 15세기 중 - P193

1500년이 되자 유럽상인들은 후추와 계피, 실크를 포르투갈 해로를 통해 유럽까지 대량으로 운송하는 편이 베네치아가 통제하는 육로를 통해 소규모로 운송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상선에 대한 투자는 경제력의 균형에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에 세계의 끝자락이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다시피, "지배적인 자본주의 도시는 항상 무역 지대의 중심에 존재하는 법이다". 두 나라의 주요 가문과 상인들은 부유해졌다. 그리고 국제 상업에서 해상 이동이 중요해지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네덜란드의 항구가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항구보다 훨씬 더 활동하기에 좋은 곳이 되었다.

_ 15세기 중 - P194

따라서 15세기의 마지막 10년에 나타난 것은 인지 혁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기존의 지식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사고관이 갑자기 생겨나 기존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게끔 강요했으니 말이다.

_ 15세기 중 - P195

시계의 전파가 중대한 변화임을 나타내는 또 다른, 더 미묘한측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 세속화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시간이 교회의 지배를 받았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창조했기 때문이고,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천지창조 과정에서 사물의 움직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창조의 한 부분으로서 신성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시간에는 이렇듯 신학적 개념 말고도 더 실용적인 개념이 있었다. 시간의 주기가 1년인 것은 신성한 설계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하느님이 파종을 위한 시간과 수확을 위한 시간, 양 떼를 방목하는 시간 등등을 정해두었다는 것이다.

_ 15세기 중 - P199

거리와 무게, 부피 단위는 여전히 장소마다 달랐지만, 시간은 현지 관습이나 교회 당국에 우선하는, 최초의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측정 단위가 되었다.

_ 15세기 중 - P200

15세기에는 이러한 공동체적 정체성이 무너졌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는 별개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오래된 집단적 정체성에 새로운 개인적 자존감이 겹쳐졌다.

_ 15세기 중 - P203

평범한 사람들도 출생시간과 날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점성술을 이용해 자신의 건강과 운수를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자기 인식은 사생활에 대한 더큰 욕구로 이어졌다. 이전 세기에 주택 소유자와 그 가족들은 집전체를 공유했으며, 흔히 하인들과 같은 홀에서 먹고 잤다. 이제사람들은 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손님을 위한 개인 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역사의 많은 변화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기자신을 단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보는 시각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대한 변화였다.

_ 15세기 중 - P205

개인주의가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이해와 자기 존중을 얻는것이라면, 사실주의는 세상과 세상 만물의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와 예술가들이 세상 만물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 할수 있다.

_ 15세기 중 - P205

15세기는 서양 사람들이 추상적인 하느님의 불가사의함에 관한 집단 연구를 중단하고, 하느님을 이해하려면 천지창조를연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시기였다.

_ 15세기 중 - P210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발견‘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있다. 세계와 자아의 발견 말이다. 자아 인식의 측면에서 일어난미묘한 변화는 대부분 주목받지 못했지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가시적이고 보편적인 화두였다. 1492년부터 1500년까지 불과8년 만에 유럽의 항해사들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라는 두 개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발견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이런 발견은 남아프리카의 절반을 탐험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라디오에서 탐험가들이엄청난 부가 가득한 세 개의 대륙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여러분은 이런 비교가 터무니없다고 느끼겠지만, 생각만큼 터무니없지는 않다.

_ 15세기 중 - P211

1600년경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마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음직한 일과를 따랐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과 손을 씻고 이를 닦았다. 아침을 먹고 8시경에 학교나 직장에 갔다. 정오 무렵에는 점심을 먹고, 귀가하면 금속 칼과 숟가락으로 접시에 담긴저녁을 먹고, 불가에서 몸을 녹였다. 부드러운 베개에 머리를 괸채로 시트를 덮은 매트리스가 제대로 놓인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만약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일상생활이라면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크게 발전한 세기는 16세기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16세기에는 더 심오한 성격의 변화도 있었다.

_ 16세기 중 - P220

인쇄술은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극히 적은 비용으로 성경을 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변화를 일으킨 것은 인쇄술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어로 성경을 인쇄한 것이었다.

_ 16세기 중 - P221

지배적인 대중 매체였던 설교단과 시장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유럽을 문맹 사회에서 벗어나게한 것은, 인쇄기와 지역어 사용, 성경의 영적 중요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이었다.

_ 16세기 중 - P222

그러므로 인쇄술은 여성과 지식이, 그리고 암묵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 촉매제였다.

_ 16세기 중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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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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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 소 떼나 양 떼를 위한 목초지로 유지되었다. 필연적인 결과로 농촌 지역에서 늘어날 수 있는 인구의 최대치는 줄어들었으며, 땅이 없는 소작농들은 생계를 꾸리고자 시장도시로 이주했다.

_ 13세기 중 - P106

13세기는 잉글랜드가 영구적으로 시장 기반 경제로 전환된 시기였다. 비슷한 도시화 과정이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_ 13세기 중 - P106

새로운 시장은 부유한 영주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_ 13세기 중 - P107

북유럽에서 국제 무역을 주도한 주요 상품은 양모였다. 엄청난 양의 양모가 잉글랜드에서 브뤼허와 겐트 같은 플랑드르 도시로 들어갔다. 유럽 북부에 양모 무역망이 있었다면 남부에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무역 도시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무역 도시들의 주요 상품은 실크와 향신료였다.

_ 13세기 중 - P109

기록물의 급증은 마땅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왔을까? 만약 1300년까지 모든수도사와 성직자가 글을 배웠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장원마다서기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잉글랜드에서만 4만 명가량의 남성이 읽고 쓰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글을 익혔을 테고 다른 사람들, 특히 귀족들은 개인 교사를 두었을 것이다. 귀족 계급에서는 귀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문해력을 기르는 전통이 있었다. 피에르 아벨라르와 그 형제들이 이 전통을 보여주는 예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모든 대성당에 학교를 운영하라고 명령했으며, 1215년 인노첸시오 3세가 주재한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더 강화된 명령을 내렸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여전히 학교가 없는 대성당에 학교를 세우고 마을 아이들에게 라틴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모든 성당에 여유 자금이 있으면 학교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사실상 모든 마을에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 셈이었다.

_ 13세기 중 - P11

한마디로 기록을 남기는 주된 이유는 주의와 불신, 확실성에 대한 욕구였다. 사람들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서로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자 함이었다.

_ 13세기 중 - P120

왕들은 대개 군사 행동을 벌이려 할 때특별세를 부과하려 했는데, 이때 이들 ‘평민common‘들의 대표가 왕과 직접 대면해 특별세의 조건을 협상했다. 의회는 흔히 특별세를승인하는 대가로 왕에게 새로운 법령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1297 년 에드워드 1세가 이후로는 ‘반드시‘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러한 특별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 것은 입헌 분야에서 이루어진 엄청나게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는 의회가 전쟁에 필요한 재정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국왕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5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로마를 방문해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이 환영으로 본 형제회frere에관해 설명했는데, 이 형제회라는 말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채로 살아가는 수도사를 뜻하는 탁발 수도사(혹은 형제 수도사, friar)라는 말이 나왔다. 큰 감명을 받은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축복했다. 그렇게 프란치스코회가 탄생했다. 프란치스코회 혹은 작은 형제회Order of Friars Minor는 회색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는데, 탁발 수도사들이 회색 수도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7

인노첸시오 3세가 이를 승인하기 전에 선종했으므로, 후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회를 공식적으로 축복했다. 도미니코회는 설교자회나 검은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다.

_ 13세기 중 - P128

이전 세기의수도회들이 지식을 만들고, 보관하고, 전파하는 연결망을 구축했다면, 탁발 수도회는 이 연결망을 예전보다 더 깊고 빠르게 사회에스며들게 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세속적인 통치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교관이 되었다. 잘 교육받은 하느님의사자로서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탁발 수도사들은 훌륭한 행정관이자 협상가였다. 또한 이들은 훌륭한 이단심문관이기도 했다. 교황과 주교들은 점차 도미니코회에 의존하여 이단자들을 심문했으며, 심지어 1252년 이후에는 이단자들을 고문하기까지 했다.

_ 13세기 중 - P130

13세기는 여행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보편화한 세기일 뿐만아니라, 기독교 여행자들이 여태껏 고대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장소에 실제로 도달한 시대였다. 1300년경 기독교 세계의 최외곽 전초 기지들은, 서쪽으로는 그린란드의 가르다르에서 동쪽으로는 중국의 베이킹까지 8,7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았다.

_ 13세기 중 - P136

인노첸시오 3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한 모든 통치자와 결정권자에게 영향을 미친 마지막 교황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위로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왕실 결혼을 강제로무효화하고, 교령 ‘존경스러움 Venerabilem‘을 내려 마침내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아래로는 자신이 영적으로 다스리는 대중의 성향을 이해했다.

_ 13세기 중 - P140

변화에 저항하려는 굳은 결의가 결과적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인노첸시오 3세가 카타리파 사태에서 수행한 역할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로 대표되는 이단자들에게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패권을 유지했으나, 이는 결국 종교재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모든이유를 근거로, 인노첸시오 3세는 대적할 자가 없는 13세기의 변화의 주체다.

_ 13세기 중 - P141

유럽 인구는 1315년에서 1319년까지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기 전에도 이미 감소하고있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자연이 준 시련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추정되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1,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굶어 죽었거나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3세기 동안 거의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 인구 성장과 상업성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_ 14세기 중 - P146

1347년 말에는 가장 위험한 폐 페스트의 형태로, 기독교 세계의 상업 중심지인 무역 도시 베네치아와 피사, 제노바에 당도했다. 페스트가 퍼진 도시에서는 순식간에 시체 더미가 쌓여갔다. 사망률은 보통 40퍼센트를 넘었다.

_ 14세기 중 - P149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_ 14세기 중 - P152

또한 흑사병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었다. 어쩌면 여러분은 죽음이 인간의 삶에서 몇 안 되는 변치 않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죽음은 실제로는 매우 급격한변화의 대상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죽음은 오직 살아 있는 자들의마음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죽음이 생명의 부재라 믿었으며, 죽음 뒤에도 다른 형태의 삶이 있다고 믿었다. 사후 세계에 관한 믿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14세기 유럽 전역은 죽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_ 14세기 중 - P155

그러나 1332년에 농노제가 여전히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좌우했던 반면, 1400년경에는 서유럽 거의 모든 곳에서 농노제가 무너졌다.

_ 14세기 중 - P156

헨리 보몬트가 그날 사용한 전략은 현대전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적군과 백병전이 벌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라. 적이 당신 머리를 부수거나 배를 찌르기 전에 먼저 쏘아라." 이 전략의 핵심은 투사 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기관총과 같은 효과를내는 것이다. 실트론 진형을 깨뜨리는 데는 궁수 수십 명만 있으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중무장한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려면 반드시 수천 명의 제대로 편성한 궁병대가 필요했다.

_ 14세기 중 - P161

그러나 군대를 운영할 때 근접해서 백병전을 벌이기보다는 멀리서 조직적으로 공격한다는 기본 원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백병전보다 원거리전을 중시하는 것은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다.

_ 14세기 중 - P165

비록 민족주의의 음영과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14세기에는 민족적 이익이 기독교 세계의 단결이나 교황의 권한보다 명백히 더 중요해졌다. 1300년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세속적으로는자신들의 영주에게 충성을 바쳤고, 종교적으로는 주교에게, 나아가 교황에게 충성을 바쳤다. 1400년에는 상황이 더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충성심이 지역과 민족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 과세 제도, 의회 제도, 언어, 법, 관습이 모두 민족이라는 개념에 녹아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왕에게 맞서는 동시에 자기민족에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 실제로 14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적 우선순위에 따라 의회에 의해 두 왕이 폐위되었다.

_ 14세기 중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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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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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가 수거하여 지라로 보낸다. 지라는 매일 약 1,000억 개의 적혈구를 폐기한다. 분해된 적혈구는 대변을 갈색으로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같은 과정의 부산물인 빌리루빈[bilirubin]은 소변을 노랗게 만들며, 명이 사라질 때 노랗게 변하는 것도 빌리루빈 때문이다.)

_ 심장과 피 중 - P178

데이비드 우튼은 의학의 진실(Bad Medicine: Doctors Doing Harm Since Hippocrates)에서 이렇게 썼다. "1865년까지 의학은 거의 완전히 무용지물이었고, 해를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_ 심장과 피 중 - P182

그런 한편으로 피에서 특정한 항원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특정한 질병에 대한 내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 물론 때로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말이다. 예를 들면, O형인 사람은 말라리아에 더 내성을 띠지만, 콜레라에는 더 취약하다.

_ 심장과 피 중 - P187

당뇨병은 두 가지 유형이다. 사실은 합병증과 관리 차원에서는 비슷하지만, 병리학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질병이다. 제1형 당뇨병은 몸이 인슐린을 아예 만들지 않아서 생긴다. 제2형 당뇨병은 인슐린이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서 생긴다. 대개 생산량도 줄어들고 세포가 인슐린에 정상적인 수준보다 반응을 덜하면서 나타난다. 이를 인슐린 내성이라고 한다. 제1형은 유전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제2형은 대개 생활습관의 산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제2형이 건강하지 못한 생활과 명백히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집안에서 대물림되는 경향도 보인다.

_ 몸의 화학 중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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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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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혈장 판매는 모든 수출품의 1.6퍼센트까지도 차지한다. 미국이 항공기를 판매하여 버는 돈보다 많다.

_ 심장과 피 중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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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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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은 것들이란, 우리가 살면서 발견한 수많은 귀중한 것들이었다. 사랑, 아름다움, 자녀들, 친구들이 주는 편안함, 농담 따먹기,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움, 이야기하기, 재치, 웃음소리, 음악, 바닷소리, 따스한 햇볕, 달과 별 바라보기, 노래하고 춤추기 같은 것들 말이다.
변하지 않을 것들이란? 우리가 한순간 넋을 잃고 빠져드는 모든 것들.
꿈꿀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값을 매길 수 없는 모든 것들이다.

_ 이것이 왜 중요할까? 중 - P542

역사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한 종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모조리 드러낸다.

_ 들어가는 말 중 - P14

다빈치는 놀라운 천재였지만, 그의 기술적 고찰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사실상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다빈치의 수첩을 읽었을 뿐이며, 그의 발명품은 실제로 제작되지도 않았다.

_ 들어가는 말 중 - P17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으로 가득 찬 벽과 마주했을 때, 나는 마치 1099년에 예루살렘 거리에서 무의미하게 살해당한 이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18세기 프랑스에 관한 책으로 가득 찬 방에 들어갔을 때는절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_ 들어가는 말 중 - P20

자국을 안정화하거나 새로운 땅을 정복하려면 동맹이 필요했는데, 가톨릭교회는 기독교 국가들끼리 상호신뢰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도덕 체계를 제공했다. 더 많은 군주가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자 눈덩이 효과 snowball effect가 일어났고, 교회는 점점 더 강력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다.

_ 11세기 중 - P33

이 얼마나 커다란 반전인가! 11세기 초만 하더라도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가 미개하다고 여겼고, 1054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교황의 특사를 파문했다. 그런데 1095년,
비잔티움 제국은 교황을 잠재적 구원자로 여기고 있었다. 우르바노2세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분열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교황 수위권을 확고히 하기를 열망하며 기꺼이 도우려 했다. 11월 27일, 우르바노 2세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싸우는것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해,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손아귀에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성좌holy seat를 탈환하라는 내용이었다. 교황의 호소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대표되는, 성지를 향한 여러 차례의 무장 순례로 이어졌다. 프랑크족과 노르만족 귀족들로 이루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휩쓸었으며, 거대 도시인 안티오키아를 정복했고,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_ 11세기 중 - P39

11세기는 가톨릭교회에 믿기 힘든 세기였다. 11세기가 시작될 때,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마음대로 뽑고 내쫓는 처지였다. 교황은 전쟁에 휘말린 기독교 왕과 공작들에게 거의 의지할 수없었다. 필수적인 행정 기구와 정보 전달 체계가 부실하거나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성직자들은 라틴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성직을 사고팔고, 결혼하고, 마치 세속적인 사람처럼 행동함으로써 종교적 기대를 저버렸다. 그러나 11세기가 끝날 무렵 가톨릭교회는 통합되고, 중앙집권화되고, 조직화되고, 강해지고, 확대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맨발로 알프스산맥을 건너게 할 수 있었고, 심지어 성지정복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유럽 대륙 전역에서문해율을 높이고 저작 활동을 비롯한 지적 활동을 촉진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진정한 승리는 일반 대중에게 권위를 행사하게되었다는 점이다. 11세기는, 가톨릭이 단순히 아이가 태어날 때 세례를 해주는 신앙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 좌우하는 거대한 조직체로 변화한 시기다.

_ 11세기 중

‘봉건’이라는 말은 현대 세계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1100년의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는 유럽이 전보다 더 잘 지켜지고 있음을 뜻했다.

_ 11세기 중 - P42

노예에 관한 법은 다양했지만 봉건 제도 아래의 농노나 부자유소작농들과 노예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장원의 영주는 농노들이 무엇을 하고, 누구와 결혼하고, 어디에 가고, 어느 땅에서 일할지 제약할 수 있었는데, 이는 농노들이 장원에 매여 있었기에 가능했다. 농노는 토지에 매여 있었으며, 농노의 노동과 의무는 상속되거나 이전되거나 판매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농노제는 간접적인 형태의 예속 제도였다. 이 사실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시사한다. 영주의 권력은 관습에 따라 제한되었기 때문에 장원의 농노들은 특정한 권리를 누렸다.

_ 11세기 중 - P47

노예화의 주요 원인 두 가지를 문화 갈등과 극심한 빈곤이라고 한다면, 유럽에서는 둘 모두가 줄어들었으므로 논리적으로 노예가 줄어들 가능성이 컸다. 또한 경제 번영의 결과로 11세기 후반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도시가 성장했다. 이제 노예들은 큰 도시로 도망쳐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었다.

_ 11세기 중 - P50

11세기 내내, 구조 공학 분야의 발전은 더 높고더 튼튼한 성채로 이어졌으며, 그에 따라 영주들은 영지를 봉건적으로 더 강하게 구속할 수 있었다.

_ 11세기 중 - P55

우리는 교황 수위권이나 교구 조직, 수도회, 성과 대성당 같은 중세 시대의 주요 특징 몇몇이 1001년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다가 1100년에는 완전히 자리잡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구세계는 다른 방식으로도 종말을 맞이했다. 11세기는 전쟁과 폭력의 성격이나 규모가 크게 변하고 노예제 폐지가 시작된 세기였다. 가장 놀라운 점은 교회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이킹의 침략이 멈춘 것도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스칸디나비아반도 너머까지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_ 11세기 중 - P57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한 사람의 머리 덕분에 이루어지는 경우는거의 없으며,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절대 없다. 과거의 위대한 발전 대부분은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니라 비슷한 생각을하고 비슷한 기회를 맞은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_ 11세기 중 - P58

심지어 교황이 되기 전에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주교로서힐데브란트는 교황 수위권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 위에 올려 놓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힐데브란트는 가톨릭 사제직을규정한 그레고리오 개혁의 지지자였다. 사제를 세속 세계와 분리된 사람으로 보는 시각, 교황이 세속 통치자와 신민들에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은 기독교 세계를 바꿔놓았다. 여러분은 교황위가 그저 황제가 지명하는 자리에 불과하고, 가톨릭교회에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중세 유럽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_ 11세기 중 - P60

12세기가 피와 용기, 자신감, 의지와 열정의 세기였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12세기의가장 심오한 변화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12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비천한 농민과 변호사, 학자들이었다.

_ 12세기 중 - P64

인구 증가의 더 중요한 원인은 역사학자들이 중세 온난기라부르는 현상 때문이다. 10세기와 11세기에 평균 기온이 아주 천천히 상승하면서, 12세기에는 900년대 이전보다 거의 1도 가까이 따뜻했다.

_ 12세기 중 - P66

그러나 12세기 사회 변화의 진정한 중심지는 토지였으며, 변화의 주역은이름을 알 수 없는 근면 성실한 농부들이었다. 이들을 위한 기념비는 오직 이들이 남기고 간 새로이 개척하고 경작한 들판뿐이다.

_ 12세기 중 - P70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사람들은 엄청난 재산을 기부해가며 새로운 수도원을 지원하게 되었을까? 이들의 동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연옥에 대한 교리의 등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죽은 자의 영혼이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머무는 영적 보금자리인 연옥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천국이나 지옥 한쪽으로 간다는 로마 가톨릭의 믿음이 그것이다.

_ 12세기 중 - P72

그런데 수도회가 이와 비슷한 연결망을 제공했다. 수도회 연결망은 수도회가 속한 은둔 세계와 교구 사제들과 법원 서기들, 정치 주교들이 속한 세속 세계가 거미줄처럼 얽힌, 기독교 세계의 상호 연결망이었다.

_ 12세기 중 - P73

우리 연구에서는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 피에르 아벨라르의선구적 사고방식이 등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재해석하면서 변증법이 탄생한 것이다. 둘째는 풍부한 아랍어 번역본이 들어오면서 고대 세계의 지식을 상당 부분 회복했다는 점이다.

_ 12세기 중 - P75

"의심은 탐구로 이어지고, 탐구는 진리로 이어진다"는 금언을 남긴 이가 바로 아벨라르였다. 그리고 아벨라르는 논리를 종교에 적용하는 것에 ‘신학theolog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_ 12세기 중 - P77

더 중요한 사실은, 아랍어 논문을 번역하기 전에는 숫자 0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0은 후대에 끝도 없이 많은 수학적 사고를 쏟아낸 거대한 구멍이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탐구는 들판에서 일하는 소작농에게는 머나먼 일이었을지도 모르고, 거리의 행인에게는 서서히 스며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분명 크게 달랐을 것이다.

_ 12세기 중 - P83

그럼에도 12세기는 육체적 구원을 찾는 사람들이 신보다 인간을 더 신뢰하기 시작한 때이며, 기도나 주문에 의존하는 대신 체계적인 의학 전략을 수립한 시기이다. 종합해볼 때, 의학 분야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이 책에서 고려하는 가장 심오한 변화 가운데 하나로 간주해야 마땅하다.

_ 12세기 중 - P89

이르네리우스의 유산은 볼로냐를 법연구의 중심지로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전역과 신성로마제국 남부에서 법학의 부흥을 불러왔다. 12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로마법이 유럽 대륙의 국제법이 되기 시작했다.


_ 12세기 중 - P91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멍텅구리학 stultilogia‘라고 불렀던 아벨라르의 신학이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합리주의를 더 발전시킨 다음 세기지만, 12세기에도 아벨라르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그라티아누스는 『교령집』을 쓰면서 아벨라르의 변증술을 채택했다.

_ 12세기 중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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