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업 혁명은 잉글랜드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농업 개혁가들은 유럽 전역에 있었으며, 유럽 인구는 이전에 볼 수 없던 규모로 증가했다. 이것은 단순히 식량이 증가해 혹독한 겨울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식생활이 개선되면서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그 덕을 보았다. 초경을 시작하는 나이가 내려가면서 여성은 더 많은 자녀를 낳을 수 있었다.

_ 18세기 중 - P320

1750년경, 남성과 여성이 사적인 공간에서 자신들의 몸으로 원하는 행위를 할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 널리 지지받기 시작했다.


_ 18세기 붕 - P327

찰스 2세와 루이14세는 정부를 두는 왕실 전통을 너무도 충실히 따랐으며, 영국 해협 양쪽의 수많은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섹스를 또 하나의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던 신흥 중산층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성적 행위에 관해 말하자면, 남유럽 국가들은 항상 좀 더 세련된 구석이있었다. 가톨릭 도시국가인 베네치아는 부정한 정사에 늘 관대한 편이었지만, 18세기에는 더 자유분방하게 변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무려 자코모 카사노바를 배출했으니 말이다.


_ 18세기 중 - P328

또한 맬서스는 결코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익에 몰두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에 진심으로 관심을 둔, 지극히 보기 드문 경제학자였다. 진보가 소수만이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 되게 하려면 빈곤의 덫poverty trap을 완화해야 한다는 맬서스의 주장은 지극히 옳았다. 맬서스의 암울한 예측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예측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발명가와 기업가들이 화석 연료를 이용하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식량을 운송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방정식에 새로운 요소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_ 18세기 중 - P338

산업화를 일으킨 진정한 요인은 상업 경쟁이었다. 만약 어떤 공장 소유주가 경쟁자들을 이기고 싶다면, 생산비를절감하고 활용 가능한 모든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그리고수익 극대화를 위해 작업 방식을 바꾸고, 새로운 어려움에 적응하고, 사람과 기계와 건물에 투자해야만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산업 혁명과 농업 혁명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둘 다 작업 관행의 효율성을 높여 더 큰돈을 벌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_ 18세기 중 - P340

산업 혁명의 근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개의 눈에띄는 신흥 시장을 발견하게 된다. 두 시장의 형성은, 하나는 면과모직물, 다른 하나는 석탄과 금속 가공물에 대한 수요 때문이었다.

_ 18세기 중 - P340

1789년 프랑스에서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평등에 대한 열망 사이의 갈등이 훨씬 적었다.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평등해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 나라의 제국주의적 명령에 반발한 미국 독립혁명과 자국의 정치 구조에 반발한 프랑스 혁명은 본질적으로 다른 혁명이었다.

_ 18세기 중 - P349

만약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다음 세기의 유럽인 사상가들이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 문제에 접근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서구 세계에서 정치적 평등이 기본적인 도덕관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_ 18세기 중 - P354

하지만 이 농지들은 식량 공급과 ‘우리 조상들이 직면했던 가장 큰 난관‘을 상징하기 때문에 마음에 새겨둘 만한 가치가 있다.
18세기에 인류와 환경, 하느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은바로 이 난관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중세 이래로 사람들은 이웃의 도덕적 행동을 엄격히 통제해왔다. 하느님이 지역사회의 부도덕함을 가령 흉작과 같은 방식으로 공동 처벌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웃의 무분별한 행동을 외면하는 공동체 구성원 역시 유죄이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1710년이후 식량 공급이 증가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하느님이 공동 처벌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그에 따른 사회적 훈계가 줄어들었다. 동시에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역경의 원인에서 신을 분리할 수 있었다. 1780년대에 프랑스에서 또다시 식량 비축분이 고갈되었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보다는 동료 시민들을 탓했다. 이렇게 판단해보면 18세기의 농업 변화는 인구를 증가하게 했고, 산업 혁명을 위한 노동력을 제공했을뿐만 아니라 사회를 더 관용적이고, 더 관대하고, 덜 잔인하게 바꾸었다.

_ 18세기 중 - P355

역사가 곧 시간은 아니며 시간이 곧 역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 그 자체에 관한 학문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사람들‘에 관한 학문이다.

_ 19세기 중 - P363

1800년에는 잉글랜드 사람들 가운데 80퍼센트가 시골에 살았지만, 1900년에는 70퍼센트가 도시에 살았다. 급속도로산업화한 벨기에나 독일 같은 국가들의 도시 거주 비율은 1900년에 각각 52.3퍼센트와 47.8퍼센트로 잉글랜드의 뒤를 맹추격했으며, 대규모로 확장 중인 미국 역시 35.9퍼센트로 크게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_ 19세기 중 - P368

인구 증가는 도시화를 부르고, 도시화는 산업과 운송을 성장하게 한다. 성장한 산업과 운송은 추가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화, 전문화가 이루어지도록 뒷받침한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변화에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화가 더해지자, 석기 시대에 농사가 시작된 이래로 존재해온 인간과 땅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종말을 맞았다.

_ 19세기 중 - P369

오늘날 우리는 철도의 등장을 매우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놀라운 업적으로 여기지만, 철도가 불러온 ‘근대적 삶‘이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준 경험이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자란 농촌에서 멀리떠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이 아는 문화는 주로 시골의 복합적이고 안정감을 주는 인간관계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수천 명이 말 그대로 사실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_ 19세기 중 - P374

수도 있었다. 자전거를 이용하면 남자든 여자든 혼자서도 큰 비용부담 없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목적지에 방문할 수 있었다. 여행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세기는 20세기가 아니라 19세기였다.

_ 19세기 중 - P378

통신은 두 차례의 혁명을 겪었다. 첫번째 혁명에서 전신기가 정보를 장거리로 즉시 전달했다면, 두 번째 혁명에서는 전화기가 양방향 교신을 가능하게 했다.

_ 19세기 중 - P383

시대를 불문하고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 악취, 인구과밀, 거지가 바로 그것이다.

_ 19세기 중 - P384

19세기는 서구가 무엇이 대부분의 질병을 일으키는지 밝혀낸 시기였으며, 수많은 질병의 예방법과 치료법을 알아내고 감염을 제한하는 방법을 찾아낸 세기였다.

_ 19세기 중 - P391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19세기에 여성들이이룬 가장 큰 진전은 대학에 다니고 전문직에 종사할 자격을 얻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_ 19세기 중 - P408

고등교육은 여성에게 꼭 필요한 시험대였지만, 이 시험대를 통과한 여성은 대부분 특권층 출신이었으며 훌륭한 기초 교육을받았다는 점만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 개혁이란 학위를 딸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깨끗한 물을 공급받을수 있느냐, 충분한 음식을 얻을 수 있느냐,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육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1800년에, 즉 글쓰기가 존재한 지 5,000년이 지난 무렵까지도 선진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었던 이유다.

_ 19세기 중 - P410

교육의 확대가 없었더라면 법적, 도덕적, 재정적 면에서 성평등을실현하거나 전체 사회 구성원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기는커녕, 성평등이나 기회의 평등이라는 생각 자체도 품을 수 없었을 것이다.

_ 19세기 중 - P411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앞당겼는데, 조지 오웰이 말했듯, 사회주의에는 ‘계급 없는 사회‘라는 신비한 숭배의 대상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위해 기꺼이 싸우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21 마르크스의 사상은 노동 정치 단체의 등장, 직장 내 폭동, 산업 내 갈등으로이어졌으며, 이 셋이 결합하면서 사회복지 법률 제정을 촉발했다.

_ 19세기 중 - P415

1900년 이전에는 수요와 공급의 힘이 특정 국가들 사이에서만 영향을 미쳤으나, 2000년에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화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큰 변화는 내연기관의 확산이었다.

_ 20세기 중 - P422

20세기에 운송 부분에서 일어난 또 다른 큰 변화는 항공 여행의 출현이었다. 양력을 발생시키기 위해 가스나 뜨거운 공기를사용하지 않는 중항공기가 최초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라이트 형제의 결연한 노력 덕분이었다.

_ 20세기 중 - P424

에 갑자기 342퍼센트 급증했다. 트럭과 화물 트럭은 식량과 비료, 기계류를 유통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의료 원조, 특히 항생제를 빠르게 운송함으로써 이 믿기 어려운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이런 식으로 운송은 세계의 부와 복지를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러한 상호 연결성의 결과로 모두가 승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식량 공급이 불안정한 나라들은 풍년이 들었을 때 식량을, 그것도 헐값에 수출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나라는 식량 위기가 찾아왔을 때가 문제를 겪는다. 돈이 없어서 그 지역의 식량 부족 현상을 반영한 국제 시장 가격으로는 필요한 물자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빈국에 속하는 일부 국가는 여전히 식량 부족 현상과기근을 겪었다.

_ 20세기 중 - P428

운송 체제는 도시의 배후지를 확장함으로써 도시 중심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20세기에는 가장 매력적인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다.

_ 20세기 중 - P430

운송은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도 변화시켰다.
지난 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철도로 인해 지역사회는 점차 분열되었다. 그리고 자동차는 지역사회를 더욱더 분열시켰다. 1945년에서 1960년 사이에 값싼 도로 운송 수단이 떠오르면서 수많은 지역 철도 노선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수천 개의 작은 마을은 시장도 없고 가까운 상업 중심지로 가는 철도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시골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더 고립된 채로 살아가거나 자동차에 의존해야 했다. 평생 고향밖에 모르고 살았던 노인들에게, 고향에서 사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나이가 많아운전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노인들은 억지로 도시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에 노인들의 손자들도 일자리를 찾기 위해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에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다. 한때는 집 주변 7~10제곱킬로미터안에 사는 300여 명의 사람들을 모두 알고 지냈지만, 이제는 친족과 지인들조차 여러 마을과 도시, 다른 대륙에 흩어져 살았다.

_ 20세기 중 - P431

2000년까지 서구는 운송 기반 시설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나라의 식량을 생산하는 기계를 가동하려면, 그리고 식량을분배하는 차량에 동력을 공급하려면 화석 연료가 필요했다. 이제모든 국가의 운명은 10여 개(영국의 경우는 7개의 정유 공장에서 휘발유와 디젤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데 달려 있다. 유익한 상상을한번 해보자. 만약 지금 우리가 정유 공장을 잃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농업 혁명 이후로 식량 생산 부문에서 엄청난 개선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서양 인구대다수는 200년 만에 처음으로 기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_ 20세기 중 - P433

1900년 이전에 전쟁은 보통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또는전선이나 행군로, 보급로에 가까이 사는 시민들에게만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은 역사가들이 ‘전면전 total War‘이라 부른 전쟁의 출현을 목격했다.

_ 20세기 중 - P435

대량으로 유통된 신문과 잡지, 영화는 주요 도덕적, 정치적 사안에 국가적 관심을 집중시켜주었으며 일련의 국가적 논쟁에서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20세기에 국가들이 어느 때보다 완전히 통합되었다고 한다면, 매스컴은 그 과정에서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_ 20세기 중 - P446

그렇게 매스컴은 전국에서 사람들의 의식을 하나로 묶었다. 2000년에 도시에 살던 부유한 금용인은 1900년에 살았던 존경하는 선조님들보다. 시골 지역의 가난한 농부와 공통점이 훨씬 더 많았다.

_ 20세기 중 - P448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꿈과 인류의 진보에 관한 장밋빛 예언으로 시작되었던 20세기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미지의 심연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_ 20세기 중 - P461

내가 보기에 20세기 서양에서는 삶의 환경 측면에서 세 가지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가 일어나고, 대량살상의 위험성이 등장하고, 우리가 지속 불가능한 생활수준에 도달한 것이었다. 운송 발전에 따른 세계화, 전쟁이 변하면서 생긴대량 살상의 위험, 직전 두 소챕터에서 다룬 지속 불가능성에 관해, 내가 독자들의 관심을 충분히 끌었기를 바란다.

_ 20세기 중 - P462

인류의 행동 양식이 결정화되는 경향이 있다면, 마땅히 세상의 변화는 점점 더 줄어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 역설은 또 다른 역설로 설명된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안정 그 자체가 불안정 요인이다.

_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는가? 중 - P472

이 핵심 논점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변화의 결과로써 수세기에 걸친 변화를 측정할 수 있다. 즉 어떤 변화가 사회의 가장중요한 필요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었느냐로 변화의 중요성을 측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_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는가? 중 - P473

이 네가지 원동력은 모두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1943년에 만든 욕구단계이론과 느슨하게 관련되어 있다. 매슬로는 욕구, 즉 필요를 다음과 같은 단계로 분류했다. 식량, 물, 공기, 난방 등생존에 필요한 생리적 욕구, 건강을 포함한 안전에 대한 욕구, 애정에 대한 욕구, 개인적인 존중에 대한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욕구단계이론에서는 욕구의 순서가 중요하다.

_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는가? 중 - P476

물과 땅, 공기, 햇빛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부터 목재, 석탄, 금속 광물, 석유, 천연가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원을 얼마나 이용할수 있느냐는 이 관계의 ‘공급 측면‘에 달려 있다. 과거에는 토지와 천연자원이 넉넉하게 존재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논의해야 할사안은 누가 그것을 통제하느냐일 뿐이었다. 그러나 1968년에 <지구돋이> 사진이 출판된 순간, 지구가 얼마나 작고 지구의 자원이얼마나 제한적인지가 아름답고 단순명료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당시 1960년대에는 이것이 상류층 생활에 즉각적인 위협을 가하지않았고, 비관론도 만연하지 않았다. 세상의 덧없는 관심사는 다른것들로 옮겨갔다. 오직 소수의 성실한 사람들만이 정치 지도자들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가 자원을 너무 과도하게 개발하고 이용하는 단계에 들어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우려가 시기상조이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하고, 우선순위가 낮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서 사업이나 국제경쟁, 무엇보다도 경제 성장 같은 더 중요한 과제에 힘을 실어야한다고 했다.

_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넜는가? 중 - P506

이 패러다임은 과학적 발견과 세계 탐험, 경제 성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지구상의 화석 자원이 고갈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경계를 부수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이제 도전은 확장이 아니라 자기 억제다. 모든 것을 정복하려 드는 남성들이 잘 해내지 못하는, 자기 억제가 필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여태껏 단 한번도 인간의 본능이 우리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에 직면한 적이 없다. 우리 본능이 늘 우리 이익에 부합하고 우리 유전자의 생존에 이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마주한 경계는 지평선이나 우주에 있는 경계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경계다.

_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는가? 중 - P512

누가 지난 천년기 동안 변화의 주체였느냐에는 사실 의문의여지가 없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내 개인적 믿음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은 비록 존재하지 않지만(내 사견이다), 서구 세계에 그 누구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는, 내가 이책에서 주저 없이 하느님God을 대문자 G로 표기하는 구식 표기법을 따랐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_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는가? 중 - P513

그럼에도 인류에게 희망이 있으려면 21세기의 변화의 주체가 여성인 편이 모두에게 더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_ 어떤 세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을까? 중 - P516

그러나 서양의 각국 정부들은 베짱이처럼 지극히 현재 중심적이다. 정치인들은 미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에게표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부른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오직 독재자만이 천 년의 계획을 세우는 법이다.

_ 이것이 왜 중요할까? 중 - P519

자원이 제한적일 때 기본적으로 인간 사회는 계급제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이 책 전체에서 살펴보았듯, 부자들의 욕망이 나머지 인구의 필요보다 먼저 충족된다. 위기의 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빈곤은, 빈자와 부자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갈라놓는 결과를 낳는다. 반대로 자원이 넘칠 때는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늘어나면서 부자들의 상대적인 부가 줄어든다. 19세기와 20세기에 우리는 석유와 석탄, 천연가스를 무자비하게 개발하고 사용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근과 질병의 위험을 극적으로 줄이고, 부의 상대적 불평등을 완화했다. 이제 그러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사회 구조가 화석 연료의 힘을 사용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_ 이것이 왜 중요할까? 중 - P5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범죄자들이 추앙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의아하게 한다. 따지고 보면 18세기는 계몽주의와 정치 경제, 과학 실험의 세기였지 않은가?

_ 18세기 중 - P305

신규 도로가 여행의 질을 높였다면, 수로는 화물 운송의 질을 높여주었다.

_ 18세기 중 - P312

16세기의 탐험가들과 17세기의 자연철학자들처럼, 18세기의농업 개혁가들도 자신의 발견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했다. 사실 농업 개혁가들은 자신의 발견을 뽐냈다.

_ 18세기 중 - P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암담한 예측치들의 배경에는 기후 변화라는 근본 요인이있었다. 지난 40년 동안 역사가들은 17세기를 ‘작은 빙하기‘라고 불렀지만, 최근에서야 우리는 날씨의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_ 17세기 중 - P264

기근과 질병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17세기의 역설과 더불어 이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17세기가 황금기로 불린 이유를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17세기 사람들은 분명 끔찍한 고통을 겪었지만, 훗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일이었다. 17세기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농사를 짓는 것으로는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던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떠나 도시로 이주했다.

_ 17세기 중 - P266

우리가 천문학적 발전에 관해 ‘그래서 뭐?‘라고 물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1600년 이래로 과학적 이해가 크게 진보했다는사실을 드러낸다.

_ 17세기 중 - P272

이것은 우리를 가장 난해한 문제로 인도한다. 커다란 변화는새로운 지식 그 자체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지식을 판단하는 권위를 지닌 주체가 변한 것 역시 크나큰 변화였다. 중세에는 교회 지도자들과 지역사회의 민간전승자들이 이러한 권위를 누렸지만, 16세기 중반부터는 자연철학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_ 17세기 중 - P276

그러나 17세기 중반, 과학계는 사회적 의구심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균형 상태를 만들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행성이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라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태양 주위를 도는 존재라는 지식이 정설로인정되면서 비로소 미신이 줄어들었다. 왕실 인가를 받은 과학 단체들은 지난 세기 초부터 부재했던 안정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뉴턴과 다른 왕립학회회원들이 그 책을 이해했으며 자신들을 불안하게 했던 우주의 수많은 현상을 이들이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 새로이 얻은 자신감에 힘입어 사람들은 마술에 관한 경험적 증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결론은 심지어 자백한 마녀들조차 아무 이유 없이 화형이나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것이었다.

_ 17세기 중 - P280

그러나 이 무렵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의료전문가에게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류의 안녕이 하느님에게서 의료 전문가의 손으로 이전된 것은 사회가 경험한 가장 심오한 혁명 가운데 하나였다. 이전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건강회복을 염원하며 성당과 예배당, 교회와 성지를 세우고, 병자들을위해 성지 순례를 떠나고, 성인들과 성유물에 기도를 드렸음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12 사실 의학 혁명은, 극도로 종교적이고 집단적사고를 했던 중세 유럽인들이 양심적이고 개인적인 근대 유럽인으로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

_ 17세기 중 - P285

비록 이 시점까지는 실제로 이주한 사람 수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신대륙으로 이주한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 두 세기 동안 인구 압력이 더욱 심화되면서 유럽인 수백만 명이 신대륙으로 몰려갔고, 훗날 자신들이 떠나온사회에 필적하게 될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_ 17세기 중 - P292

이 모든 변화의 근원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출현이 있었다. 극동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모든 비단과 향신료를 사들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취향의 결정권자인 부유한 중산층이었다.

_ 17세기 중 - P296

진실은 근대 세계가 그리 쉽게 태어나지 않았다는것이다. 근대 세계는 핏덩이 갓난아기처럼 발길질하고 울부짖으며 존재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세계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법이 17세기의 가장 큰 업적으로 느껴진다면, 우리는 이 시기에 수만 명이 유럽 전역의 마녀의 집과 화형대,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_ 17세기 붕 - P301

갈릴레오는 과학적 방법론을 대중화했을 뿐만 아니라 기구 제작, 기초 물리학, 시간 기록, 천문학 분야를 선도했다. 지식 분야에서 계속 권위자 행세를 하려 들던 교회에맞서 갈릴레오는 당대의, 아니 어느 시기의 누구보다도 강하게 도전했다.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과학적 발견에 깊은 믿음을 표현한 갈릴레오는 일련의 과학적 사실 이상의 것을 옹호했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였다.

_ 17세기 중 - P3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 세계에서는 분쟁이 기술 진보를 가속한다는 사실이 자명하다. 각국이 서로 경쟁할 뿐만 아니라 분쟁이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에도 분쟁이 기술 진보에 도움이 되었을까?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풍부한 기회를 제공했다. 화가들은 서로 경쟁하는 가문들과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프로파간다 전쟁에서 그림 실력을 발휘했다. 성벽과 교량을 건설하는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더 큰 힘과 기술을 얻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군국화는 예술가와 과학자, 작가들을 위한 후원금을 줄였다. 폭력과 불확실성은 무역을 억제했다. 그럼으로써 육지와 해상의 적들에게 생계를 위협받는 도시와 항구의 활력도 떨어뜨렸다. 실제로 여러 도시의 규모가 작아졌다. 구텐베르크와 콜럼버스의 세기에, 결과적으로 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변화를 촉발시켰고 다른 면에서는 변화를 억눌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_ 15세기 중 - P185

지는 않았다. 흔히 그렇듯 중요한 것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탐험에대한 정치적 의지와 돈이었으며, 이 둘은 흔히 서로 뒤엉켰다. 기술은 그저 정치적 의지와 돈이 결합해 생긴 강렬한 야망을 실현할수 있게 했을 뿐이다.

_ 15세기 중 - P186

그러나 끝없는 호기심과 매년 탐험 원정대에게 장비를 갖추어줄 정도의 재력을 동시에 갖춘, 한 고등 교육을 받은 왕자가 부에 굶주린 선원들과 만났을 때 세상이 바뀌었다.

_ 15세기 중 - P187

포르투갈 제국은 기사도와 열성적인 십자군 전쟁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항해왕자 엔히크가 사망한 1460년대에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수록 탐험대 지도자들은 후원자들을 더 쉽게 설득해 항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더 야심차게 남쪽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

_ 15세기 중 - P188

지금 보면 이 모든 사건이 조금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학자들이 옳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류를 범했고, 제노바인 선장은 야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그 사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결의는 굳건했다. 그는 포르투갈로 돌아왔고, 주앙 2세에게 또다시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한다. 이 무렵 콜럼버스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항로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심정으로 카스티야에 돌아왔다.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그의 부군 아라곤의 페르난도는 막 그라나다를 정복해 레콩키스타를 완수한 상태였다. 이 성공으로 의기양양했던 두 사람은 해지는 곳을 향해 출항한 콜럼버스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_ 15세기 중 - P191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베리아 반도 왕국들의 해외 진출을 레콩키스타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던 셈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2세기의 십자군보다는 11세기초의 바이킹과 공통점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_ 15세기 중 - P193

1500년이 되자 유럽상인들은 후추와 계피, 실크를 포르투갈 해로를 통해 유럽까지 대량으로 운송하는 편이 베네치아가 통제하는 육로를 통해 소규모로 운송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로 이루어진 상선에 대한 투자는 경제력의 균형에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에 세계의 끝자락이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다시피, "지배적인 자본주의 도시는 항상 무역 지대의 중심에 존재하는 법이다". 두 나라의 주요 가문과 상인들은 부유해졌다. 그리고 국제 상업에서 해상 이동이 중요해지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네덜란드의 항구가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항구보다 훨씬 더 활동하기에 좋은 곳이 되었다.

_ 15세기 중 - P194

따라서 15세기의 마지막 10년에 나타난 것은 인지 혁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기존의 지식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사고관이 갑자기 생겨나 기존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게끔 강요했으니 말이다.

_ 15세기 중 - P195

시계의 전파가 중대한 변화임을 나타내는 또 다른, 더 미묘한측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 세속화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시간이 교회의 지배를 받았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창조했기 때문이고,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천지창조 과정에서 사물의 움직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창조의 한 부분으로서 신성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시간에는 이렇듯 신학적 개념 말고도 더 실용적인 개념이 있었다. 시간의 주기가 1년인 것은 신성한 설계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하느님이 파종을 위한 시간과 수확을 위한 시간, 양 떼를 방목하는 시간 등등을 정해두었다는 것이다.

_ 15세기 중 - P199

거리와 무게, 부피 단위는 여전히 장소마다 달랐지만, 시간은 현지 관습이나 교회 당국에 우선하는, 최초의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측정 단위가 되었다.

_ 15세기 중 - P200

15세기에는 이러한 공동체적 정체성이 무너졌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는 별개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오래된 집단적 정체성에 새로운 개인적 자존감이 겹쳐졌다.

_ 15세기 중 - P203

평범한 사람들도 출생시간과 날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점성술을 이용해 자신의 건강과 운수를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자기 인식은 사생활에 대한 더큰 욕구로 이어졌다. 이전 세기에 주택 소유자와 그 가족들은 집전체를 공유했으며, 흔히 하인들과 같은 홀에서 먹고 잤다. 이제사람들은 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손님을 위한 개인 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역사의 많은 변화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기자신을 단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보는 시각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대한 변화였다.

_ 15세기 중 - P205

개인주의가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이해와 자기 존중을 얻는것이라면, 사실주의는 세상과 세상 만물의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와 예술가들이 세상 만물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 할수 있다.

_ 15세기 중 - P205

15세기는 서양 사람들이 추상적인 하느님의 불가사의함에 관한 집단 연구를 중단하고, 하느님을 이해하려면 천지창조를연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시기였다.

_ 15세기 중 - P210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발견‘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있다. 세계와 자아의 발견 말이다. 자아 인식의 측면에서 일어난미묘한 변화는 대부분 주목받지 못했지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가시적이고 보편적인 화두였다. 1492년부터 1500년까지 불과8년 만에 유럽의 항해사들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라는 두 개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발견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이런 발견은 남아프리카의 절반을 탐험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라디오에서 탐험가들이엄청난 부가 가득한 세 개의 대륙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여러분은 이런 비교가 터무니없다고 느끼겠지만, 생각만큼 터무니없지는 않다.

_ 15세기 중 - P211

1600년경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마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음직한 일과를 따랐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과 손을 씻고 이를 닦았다. 아침을 먹고 8시경에 학교나 직장에 갔다. 정오 무렵에는 점심을 먹고, 귀가하면 금속 칼과 숟가락으로 접시에 담긴저녁을 먹고, 불가에서 몸을 녹였다. 부드러운 베개에 머리를 괸채로 시트를 덮은 매트리스가 제대로 놓인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만약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일상생활이라면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크게 발전한 세기는 16세기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16세기에는 더 심오한 성격의 변화도 있었다.

_ 16세기 중 - P220

인쇄술은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극히 적은 비용으로 성경을 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변화를 일으킨 것은 인쇄술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어로 성경을 인쇄한 것이었다.

_ 16세기 중 - P221

지배적인 대중 매체였던 설교단과 시장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유럽을 문맹 사회에서 벗어나게한 것은, 인쇄기와 지역어 사용, 성경의 영적 중요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이었다.

_ 16세기 중 - P222

그러므로 인쇄술은 여성과 지식이, 그리고 암묵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 촉매제였다.

_ 16세기 중 - P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경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 소 떼나 양 떼를 위한 목초지로 유지되었다. 필연적인 결과로 농촌 지역에서 늘어날 수 있는 인구의 최대치는 줄어들었으며, 땅이 없는 소작농들은 생계를 꾸리고자 시장도시로 이주했다.

_ 13세기 중 - P106

13세기는 잉글랜드가 영구적으로 시장 기반 경제로 전환된 시기였다. 비슷한 도시화 과정이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_ 13세기 중 - P106

새로운 시장은 부유한 영주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_ 13세기 중 - P107

북유럽에서 국제 무역을 주도한 주요 상품은 양모였다. 엄청난 양의 양모가 잉글랜드에서 브뤼허와 겐트 같은 플랑드르 도시로 들어갔다. 유럽 북부에 양모 무역망이 있었다면 남부에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무역 도시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무역 도시들의 주요 상품은 실크와 향신료였다.

_ 13세기 중 - P109

기록물의 급증은 마땅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왔을까? 만약 1300년까지 모든수도사와 성직자가 글을 배웠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장원마다서기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잉글랜드에서만 4만 명가량의 남성이 읽고 쓰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글을 익혔을 테고 다른 사람들, 특히 귀족들은 개인 교사를 두었을 것이다. 귀족 계급에서는 귀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문해력을 기르는 전통이 있었다. 피에르 아벨라르와 그 형제들이 이 전통을 보여주는 예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모든 대성당에 학교를 운영하라고 명령했으며, 1215년 인노첸시오 3세가 주재한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더 강화된 명령을 내렸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여전히 학교가 없는 대성당에 학교를 세우고 마을 아이들에게 라틴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모든 성당에 여유 자금이 있으면 학교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사실상 모든 마을에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 셈이었다.

_ 13세기 중 - P11

한마디로 기록을 남기는 주된 이유는 주의와 불신, 확실성에 대한 욕구였다. 사람들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서로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자 함이었다.

_ 13세기 중 - P120

왕들은 대개 군사 행동을 벌이려 할 때특별세를 부과하려 했는데, 이때 이들 ‘평민common‘들의 대표가 왕과 직접 대면해 특별세의 조건을 협상했다. 의회는 흔히 특별세를승인하는 대가로 왕에게 새로운 법령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1297 년 에드워드 1세가 이후로는 ‘반드시‘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러한 특별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 것은 입헌 분야에서 이루어진 엄청나게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는 의회가 전쟁에 필요한 재정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국왕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5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로마를 방문해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이 환영으로 본 형제회frere에관해 설명했는데, 이 형제회라는 말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채로 살아가는 수도사를 뜻하는 탁발 수도사(혹은 형제 수도사, friar)라는 말이 나왔다. 큰 감명을 받은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축복했다. 그렇게 프란치스코회가 탄생했다. 프란치스코회 혹은 작은 형제회Order of Friars Minor는 회색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는데, 탁발 수도사들이 회색 수도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_ 13세기 중 - P127

인노첸시오 3세가 이를 승인하기 전에 선종했으므로, 후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회를 공식적으로 축복했다. 도미니코회는 설교자회나 검은 수도사회라고도 불렸다.

_ 13세기 중 - P128

이전 세기의수도회들이 지식을 만들고, 보관하고, 전파하는 연결망을 구축했다면, 탁발 수도회는 이 연결망을 예전보다 더 깊고 빠르게 사회에스며들게 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세속적인 통치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교관이 되었다. 잘 교육받은 하느님의사자로서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탁발 수도사들은 훌륭한 행정관이자 협상가였다. 또한 이들은 훌륭한 이단심문관이기도 했다. 교황과 주교들은 점차 도미니코회에 의존하여 이단자들을 심문했으며, 심지어 1252년 이후에는 이단자들을 고문하기까지 했다.

_ 13세기 중 - P130

13세기는 여행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보편화한 세기일 뿐만아니라, 기독교 여행자들이 여태껏 고대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장소에 실제로 도달한 시대였다. 1300년경 기독교 세계의 최외곽 전초 기지들은, 서쪽으로는 그린란드의 가르다르에서 동쪽으로는 중국의 베이킹까지 8,7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았다.

_ 13세기 중 - P136

인노첸시오 3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한 모든 통치자와 결정권자에게 영향을 미친 마지막 교황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위로는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왕실 결혼을 강제로무효화하고, 교령 ‘존경스러움 Venerabilem‘을 내려 마침내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아래로는 자신이 영적으로 다스리는 대중의 성향을 이해했다.

_ 13세기 중 - P140

변화에 저항하려는 굳은 결의가 결과적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인노첸시오 3세가 카타리파 사태에서 수행한 역할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로 대표되는 이단자들에게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패권을 유지했으나, 이는 결국 종교재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모든이유를 근거로, 인노첸시오 3세는 대적할 자가 없는 13세기의 변화의 주체다.

_ 13세기 중 - P141

유럽 인구는 1315년에서 1319년까지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기 전에도 이미 감소하고있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자연이 준 시련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추정되는데, 이는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1,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굶어 죽었거나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3세기 동안 거의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 인구 성장과 상업성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_ 14세기 중 - P146

1347년 말에는 가장 위험한 폐 페스트의 형태로, 기독교 세계의 상업 중심지인 무역 도시 베네치아와 피사, 제노바에 당도했다. 페스트가 퍼진 도시에서는 순식간에 시체 더미가 쌓여갔다. 사망률은 보통 40퍼센트를 넘었다.

_ 14세기 중 - P149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_ 14세기 중 - P152

또한 흑사병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었다. 어쩌면 여러분은 죽음이 인간의 삶에서 몇 안 되는 변치 않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죽음은 실제로는 매우 급격한변화의 대상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죽음은 오직 살아 있는 자들의마음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죽음이 생명의 부재라 믿었으며, 죽음 뒤에도 다른 형태의 삶이 있다고 믿었다. 사후 세계에 관한 믿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14세기 유럽 전역은 죽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_ 14세기 중 - P155

그러나 1332년에 농노제가 여전히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좌우했던 반면, 1400년경에는 서유럽 거의 모든 곳에서 농노제가 무너졌다.

_ 14세기 중 - P156

헨리 보몬트가 그날 사용한 전략은 현대전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적군과 백병전이 벌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라. 적이 당신 머리를 부수거나 배를 찌르기 전에 먼저 쏘아라." 이 전략의 핵심은 투사 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기관총과 같은 효과를내는 것이다. 실트론 진형을 깨뜨리는 데는 궁수 수십 명만 있으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중무장한 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내려면 반드시 수천 명의 제대로 편성한 궁병대가 필요했다.

_ 14세기 중 - P161

그러나 군대를 운영할 때 근접해서 백병전을 벌이기보다는 멀리서 조직적으로 공격한다는 기본 원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백병전보다 원거리전을 중시하는 것은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다.

_ 14세기 중 - P165

비록 민족주의의 음영과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14세기에는 민족적 이익이 기독교 세계의 단결이나 교황의 권한보다 명백히 더 중요해졌다. 1300년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세속적으로는자신들의 영주에게 충성을 바쳤고, 종교적으로는 주교에게, 나아가 교황에게 충성을 바쳤다. 1400년에는 상황이 더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충성심이 지역과 민족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 과세 제도, 의회 제도, 언어, 법, 관습이 모두 민족이라는 개념에 녹아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왕에게 맞서는 동시에 자기민족에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 실제로 14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적 우선순위에 따라 의회에 의해 두 왕이 폐위되었다.

_ 14세기 중 - P1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