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상인은 많이 벌어서 깨끗하게 사용하는 것‘을 이상으로삼았다. 코시모는 그 말대로 인생을 살았다. 어쩌면 그것은 우수라에 대한 두려움과 속죄의 기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p.58)

부기는 기록의 정확성을 보증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경영의 적정성이나 경영자의 상업적 재능까지 보증해주지 않는다. (p.69)

용기가 초래한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제 베네치아를 경유하지 않아도 직접 인도에 가서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항로가 발견되고 나서 베네치아의 갤리선은 하나둘 지중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신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배가 바다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단, 이 책에 등장하는 그다음의 주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니다. 그것은 의외로 ‘네덜란드‘다.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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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다나카 야스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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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은 떼어내도 좋다. 단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았으니 한 방울의 피도 흘려서는 안 된다." (p.24)

이렇게 해서 상업 활동이 활발했던 중세 이탈리아에서 장부‘를기입하기 위한 부기 기술이 탄생하게 된다. 즉, 은행과 부기는 이탈리아에서 생겼다. 이탈리아는 ‘은행과 부기‘와는 인연이 먼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다빈치가 태어났을 무렵, 분명히 유럽 경제의 중심은 이탈리아였으며, 이탈리아 상인들이 활약하여 금융과 회계의 기초를 만들었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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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빠는 것들과 피를 빨리는 자들은 대개 같은 동선위에 있었다. (p.485) _ 55. 흡혈 중에서

누군가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픈 사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들은 아프다. (p.496) _ 56. 유령 중에서

재입주해야 할 뚜렷한 이유가 노란집엔 없었다.
쪽방은 몸을 누이는 집이었지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집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들은 작은 충격으로도 흩어진 뒤꼭 그 방이 아니라 ‘그 방 즈음‘으로 돌아왔다. 어떤 일이있어도 되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가난한자들이 흩어지는 방식이었다. 돌아갈 이유는 없으나 완전히 멀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 가난한 자들이 모이는 방식이었다.
가난한 그들은 가난한 방 주위를 인공위성처럼 맴돌며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p.506) _ 58. 귀가 중에서

헌법이 보장한 거주 이전의자유는 자유를 살 돈이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됐다. (p.508) _ 59. 백m중에서

가난은 시각적이었다.
가난한 방일수록 인간을 우습게 아는 시커먼 균사체가 점령했다.
가난은 후각적이었다.
가난한 시간일수록 텁텁하고, 답답하고, 막막한 냄새를 쌓아올렸다.
가난은 촉각적이었다.
가난한 벽일수록 눅눅하고, 축축하고, 끈적했다.
가난은 청각적이었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다툼이 많고, 욕설이 잦고, 웃음도 크고, 시끄러웠다.
가난은 미각적이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사는 맛이 쓰고, 맵고, 짰다.
(p.542) _ 63. 검정 중에서

가시 스펙트럼 576 ~ 580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의 빛깔.
가장 눈에 잘 띄는 원색. 방문마다 붙어 강제퇴거를 통보한 날벼락. 잿빛 9-2×가 보수공사를 거친 뒤 껴입은 헌 옷같은 새 옷. 무채색으로 가득한 동네에서 홀로 도드라진건물 한 채. 리모델링을 멈추고 땜질로 전환한 부실의 결과물. 있음이 없음을, 많음이 적음을, 위가 아래를, 안이 밖을, 이 세계가 쫓겨난 존재들을 대하는 태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경로, 잘라내고 끊어내도 다시얽히고 묶이는 이야기의 혼돈, 환하게 칠한 건물 안에 정작 없는 무엇. 덧칠만 하면 찬란한 세계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징그러운 환상. 머지않아 벗겨지고 말 껍데기. 비릿한 검정의 속임수. 노랑의 미로. (p.544) _ 64. 노랑

있게 된 나는 여전히 슥, 슥, 슥, 슥 움직였다.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은 자의 전력질주는 그저 즉, 즉, 즉, 즉. 감지되지 않는 미세한 기척일 뿐이었다.
살아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는 죽어선 더욱 아무것도아니었다. (p.552) _ 65. 오년 중에서

살아서 마음대로 옮겨다닐 수 없었던 나(577)는혼이 돼서도 동자동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산 자에게나 죽은 이에게나 가난이 삼팔선이었다. (p.560) _ 65. 오년 중에서

나는 죽고 나서야 더는 쫓겨나지 않았다.
죽을 때도 이생으로부터 쫓겨나듯 죽었다.
(p. 567) _ 65. 오년 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난의 미로 안에 끝내지 못한 가난한 이야기가 갇혀 있다. (p.573) _ 입구

언론은 사건과 일상을 구별합니다.

사건은 ‘보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일상은 이야깃거리‘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사건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일들은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 메커니즘을 아는 누군가는 스스로 사건이 되고자 단식을 하고, 누군가는 하늘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며, 누군가는 자신의 목에 줄을 매거나 몸에 불을 붙입니다. (p.574-5) _ 후기중에사

체제와 제도와 인식은 그들에게 동자동 외에 머물 곳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듯했지만, 신이 거대한 핀셋으로 집어 옮니다. (p.576) _ 후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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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치운 누군가의 죽음으로 누군가의 살림이 채워졌으니 이 건물의 죽음과 살림엔 구분이 없었다. 이 건물에서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차이는 내가 거둔 유품과 내가 파는 고물의 차이만큼이나 가까웠다. (p.348) _ 40. 망치 중에서

그들과 나의 가난은 아무리 망치질을 해도 수리되지 않았다. (p.351) _ 40. 망치 중에서

그놈(들)이 묻힌 불법의 얼룩 때문에 최용구는 국가기관과 금융회사들로부터 20년 가까이 추궁을 받고 있었다. 범죄집단과 포악한 사회가 누가 주범인지 모를 만큼 시스템처럼 얽혀 거리에 부려진 그의 살을 바르고 뼈를 추렸다. 그의 범죄가 아니라고 말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왜 그의 범죄가 아닌지도 최용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p.363) _41. 그놈 중에서

그날 그 코스에서 점심을 무료로 먹을 수 있는 ‘거기‘는 ‘거기’뿐이었고 거기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그때’뿐이었다. (p.385) _ 43. 단짝 중에서

실패하더라도 본전이었다. 도박은 자제가 안 된다고 하지만 도박을 자제시키는 것은 가난이었다. (p.396) _ 45. 쾅쾅 중에서

자신의 가난을 전시해서라도 부끄러움보다 무서운 배고픔에 맞서는 일은 격렬한 순례였다.
얻어먹는 자들의 걸음도 벌어먹는 자들의 노동만큼 고단했다. 몸을 쓰고 기운을 소진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사실은 벌어먹는 자나 얻어먹는 자나 다르지 않았다. "몸이 힘든 것보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더 싫었던" 조만수도 굶주림 앞에서 부끄러움을 죽였다. (p.413) _ 46.순례 중에서

그때마다복지와 행정은 어딘가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가는 희미하고 개인의 고통은 선명한 사회에서 "이런다고삶이 나아지진 않겠지만 죽지 않을 순 있겠다"며 의지해온
‘이런 일이 짤짤이였다. (p.415) _ 46. 순례 중에서

12시간 10분 동안 26.3킬로미터를 걸었다.
자전거를 1.7킬로미터 탔다.
지하철로 39개 역을 이동했다.
교회 열세 곳과 성당 세 곳, 사찰 한 곳과 학교 한 곳을돌았다.
무료 식사 세 끼, 라면 두 개, 티셔츠 한 개를 얻었다.
현금은 8800원이었다.
(p.417) _ 46. 순례 중에서

나의 우울은 충격이 더는 충격이 아닐 만큼 점점 충격적으로 변하는 내 삶의 쓸쓸함에서 왔다. (p.421) _ 47. 미소 중에서

이런 생각.
가난해서 무능하고 무능해서 가난하다는 생각.
네 가난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네 탓이지만,
내 부모의 재산은 타고난 나의 능력이란 생각.
그런 생각.
(p.424) _ 47. 미소 중에서

중단된 리모델링 앞에서 가난은 리모델링되지도 보수되지도 않았다. (p.446) _ 50.땜질 중에서

그들의 젊은 날은 서로 다른 시기에 속했고, 그들의 기억은 서로 다른 길 위에뿌려져 있었다. 평생 만난 적 없는 그들은 평생 쌍둥이 삶을 살았다. 국가가 ‘정화‘를 선언할 때마다 닦아야 할 얼룩처럼 청소됐고, 도시가 ‘정비‘를 추진할 때마다 수리해야할 부품처럼 교체됐다. (p.451) _ 52. 쌍생 중에서

도시가 지우려 해도 그들은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들을 변방으로 밀어내며 도시는 덩치를 키웠다. 수십년 거듭된 ‘정비‘와 ‘정화‘로 동자동과 남대문로5가 주위엔올려다보기도 벅찬 빌딩숲이 솟았다. 그 숲들이 강렬한을 발산하며 어둡고 움푹한 방들을 굽어봤다. 닮은 것이두 사람만은 아니었다. 박철관과 김형구가 숲을 헤치며 오간 길은 그들만의 경로가 아니었다. 50년 넘게 그 길을 밟아온 ‘박철관들’과 ‘김형구들’의 걸음이 박철관과 김형구의가난한 경로 위에 누적돼 있었다. 밝고 맑은 도시는 자력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어두운 것들을 몰아넣은 땅이 있어야 그들 없는 깨끗하고 찬란한 도시도 완성됐다. 불결한그 땅이 사라지면 순결한 도시도 유지되지 못할 것이었다.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처럼 수십 수백 수천의 쌍둥이 삶들이 도시에 묻어 끝내 살아갈 것이었다. (p.460) _ 52. 쌍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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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엔가 모여 있다. 어떤 가난은 확산되지만 어떤 가난은 집중된다. 가난이 보이지 않는것은 숨겨지고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 가난의 이야기가 노란집에 있었다.
(p.9) _ 0 입구

남자를 지운 방 한가운데서 구더기가 뒤집힌 몸을 말았다. 죽은 남자의 몸에서 태어난 구더기는 남자가 흘린 이생의 마지막 한 톨이었다. 죽은 자는 방에서 치워졌어도그가 남긴 이야기는 징그러운 구더기처럼 살아남았다. (p.13) _ 1 벌레 중에서

음식은 산 자를 위한 것이었다. 배고프게 죽은 자가 차린 밥으로 산 자들이 고픈 배를 채웠다. 굶주린 비둘기들이 먹을 것을 찾아 공원 바닥에 부리를 찍었다. (p.17) _ 2. 명태 중에서

첨단과 수직의 고층빌딩 아래에서 낡았고, 삭았고, 헐었다. 벌레가 파먹은 듯한 지구의 후미진 땅에서 동자동 이 도시의 뒷면을 구성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소의 주거공간에서 인간에게 던져진 가장 남루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죽음과 동거했다. 그들은 한 건물에서 살았지만 남모르게 죽었다.
꽃 피는 계절이 올 때마다 동네 주민들이 우수수 졌다.
겨울 동안 웅크렸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펼 때쯤 겨울 동안 웅크렸던 긴장을 풀고 그들은 세상을 떴다. 환절기마다 죽음의 밀도가 높아졌다. 저승사자가 실적을 채우지 못할때마다 들러 머리수를 흥정하는 듯싶었다. 그들에게 계절이 바뀌는 시간은 살아남아야 하는 나날이었다. (p.32) _ 3.무연 중에서

우리 같은 인간들은 겁나는 게 없다. 죽으면 죽는 거지죽는 게 뭐가 무섭나. 단지 방 안에서 죽고 싶을 뿐이다. 평생 거리잠을 자면서 얼어죽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죽어도 그렇게 죽고 싶진 않은 것이다. (p.40) _ 4.아멘 중에서

산다는 것은 때로 서로의 내장까지 털어먹는 일이었다. (p.48) _ 5.의사 중에서

겨울이 오면 나는 두더지가 됐다.
사람들이 점령한 땅 위는 너무 위험해 돌멩이 헤쳐 땅속으로 파고드는 두더지. 바람 부는 보도블록은 너무 차가워얼음 서걱이는 흙 안에서 온기를 얻는 두더지. (p.50) _ 5. 의사 중에서

죽음을 달성하지 못한 몸에 죽음을 시도한 흔적들이 늘어날수록 병에 병이 쌓였다. 죽음에 실패할 때마다 먹는 약만 양을 불렸다. (p.78) _ 8. 요원 중에서

그 위치가 가난의 위치였다.

박멸되지 않는 가난이 도시를 떠다니다 고층빌딩 사이에 낮게 웅크린 땅이었다. 지구를 내려다보는 신의 눈동자에 끼어 망막을 찌르는 불편한 티끌이었다. 우주를 향해발광(發光)하는 지구를 보일 듯 말 듯 찌그러뜨린 어두운 점 하나였다.

그 점이 그 동네의 위치였다. (p.81) _ 9.메인 중에서

가난하다고 혁명의 제거 대상이 되는 세계에선 명분이가난한 혁명일수록 가난을 우롱한다는 사실을 가난한 자들은 모르지 않았다. (p.89) _ 10. 천국 중에서

가난하므로 멸시받던 공간이 가난하므로 필요한 공간이 될 때가 있었다. 연말이 되면 대기업 회장단이 ‘사랑의 기증품‘을 들고 동네에 나타났다. 수행원 수십 명과 사진기자들을 데리고 골목을 순시하듯 누볐다. 세 명이 들어서면 앉을 자리도 없는 방에서 주민은 자거나 아픈 것처럼 바닥에 엎드렸고, 재벌단체 회장 비서는 손짓으로 회장을 방으로 안내했다. 비좁은 방에 올라선 회장이 선 채로 주민을내려다볼 때 방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진기자가 그들을 한 컷에 욱여넣어 찍었다. 대선 때가 되면 현직 대통령의 부인과 여야 대권 주자가, 지방선거 땐 시장 구청장 시의원 후보들이 찾아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들은 선거철마다 ‘여러분을 가장 먼저 챙기겠다’고 선언했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여러분‘을 가장 먼저 잊었다. (p.89-90) _ 10. 천국 중에서

어떤 질서는 평온을 가장했고 어떤 무질서는 혼란의 증거가 됐다. 어떤 무허가는 무질서의 원인이 돼 무법하게 쓸려나갔고 어떤 폭력은 질서 잡는 법 집행으로 정당화됐다. (p.95) _ 10. 천국 중에서

전쟁 직후 피란민들과,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과, 생존이 다급한 집창촌 여성들이 모여 형성한 동네였다. 집창촌 정리와 강제이주가 그들을 몰아내면 ‘도시 정비‘가 빈자리를 고층빌딩들로 채웠다. 가난한 그들이 쫓겨나는 동안에도 어디로도 쫓겨가지 못한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인들과 홀몸 노인들이 동네에 남았다. 해체된 판잣집 자리에 집을 썰어 들어찬 한 칸 쪽방마다 그들은 없는 사람들처럼 있었다. (p.102) _ 10. 천국 중에서

역사는 누구의 기억인가. (p.109) _ 11. 기억 중에서

전쟁은 외부의 적을 제거하기 위한 무력행사였지만, 내부를 누르고 권력을 다지는 정치공학이기도 했다. (p.113) _ 12. 역사 중에서

쓰레기는 버리는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지 줍는 인간들에겐 아직 다하지 않은 쓸모였다. (p.134) _ 14. 털보 중에서

원래대로 회복한다는 뜻의 ‘복원‘이 누군가에게 닿으면 허물어 없앤다는 뜻이 됐다. (p.135) _ 14. 털보 중에서

평생 가난의 경로‘를 이탈하지 못한 채 한차례 반전의기회도 얻지 못하고 살아왔다. 흔들릴 때 붙들어줄 사람없이 흔드는 대로 흔들려온 그들이었다. 자주 흔들렸다고해서 흔들리지 않는 기술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평생 흔들려 왔으므로 그들은 가장 잘 흔들리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다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흔들 때마다 흔들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 삶의 되풀이였다. (p.183) _ 20. 전투중에서

여기 내 가난이 초록으로 쌓여 있다.
초록 막걸리병이 병 둘이 되고 병들로 늘어나면 초록도초록빛이 되고 초록 들이 된다. 내 방 안에 누워 있으면 술병들로 초록을 틔운 작은 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너르진않아도 술병으로 쌓은 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술렁거린다. 평생 가져본 적 없는 푸른 논밭에서 내 것이었던 적 없는 누렁소가 아지랑이 속에서 쟁기를 끌며 엄무우 운다. 엄무우 소리에 나는 엄마아 운다. 늙은 내가 엄마 엄마 엄마아아 운다. (p.198) _ 21. 초록 중에서

초록은 어린 시절 내 몸에서도 자랐다.
초록이 무서운 때를 아나. 나는 안다. 초록이 빈틈없이빽빽하면 컴컴해졌다. 녹색과 흑색의 사이는 멀지 않았다.
초록이 싱그러움을 넘어서면 괴물이 튀어나올 듯한 어둠이 됐다. 초록의 어둠 속에 들어가 봤나. 나는 들어가 봤다.
고향 화천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목재소에서 일하는 목수였다. 기술이 있으니 닭장 딸린 세 칸짜리 나무집을 지어 살았다. 육이오 전쟁 때 춘천으로 피란 가던 중엄마가 행방불명됐다. 외아들이어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전쟁 뒤 아버지는 초록이 짙은 산판에서 숯 굽는 일을했다. (p.199) _ 21. 초록 중에서

썩은 맛도 맛이고 더러운 맛도 맛이다. 음식이 쓰레기가 되고 사람이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본래 이 세상은 치울수 없을 만큼 쓰레기로 가득하다. 치울 수 없으면 같이 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p.201) _ 21. 초록 중에서

가난의 뿌리는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머무는 곳으로 이끈 길들과 그 길을 찌르는 뾰족한 돌멩이들 틈에 박혀 있다. (p.211) _ 23. 경로 중에서

가난의 경로는 철거와 강제이주의 무한궤도 속에 갇혀있었다.
빠져나오고 싶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였다. "소설로쓰면 읽고 울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끌고 서혜자(▶221쪽)는 미로를 헤맸다. (p.219) _ 25.미로 중에서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어도 부모 없이 자란 아이는 얼마든지 있었다. (p.221-222) _ 25.없다 중에서

조용하지 않은 가난은 민폐가 되는 공간에 그들은 와 있었다.
(p.240) _ 27. 이사 중에서

가난과 다투는 것은 가난이었다. (p.241) _ 27. 이사 중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자가 용사라고 해봅시다.
전쟁을 끝내려는 인생들의 정리를 거들며 내 전쟁을 버틴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리를 대신 해주고 정리된물건들을 가져다 팔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사 가는 사무실도 정리했고, 문 닫는 식당도 정리했고, 주인이 사라진 술집도 정리한 것입니다. 안마업소를 정리할 땐 더 정리할것 없는 생활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우는 여자들을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든, 사막에서든, 살아남아라. 바다에서든, 농장에서든, 살아남아라. 식당에서든, 술집에서든, 살아남아라. 똥을 치우든, 빌어먹든, 살아남아라. 몸을 팔든, 마음을 팔든, 살아남아라. 살아남자. 더러워도, 구차해도, 살아남자. 살아남는 자가 용사다. 살아남는 것이 복수다. 주문 걸듯 다짐하는 것입니다. (p.252) _ 28. 용사 중에서

철거가 시작된 첫날에만 열여섯 개의 방이 해머를 맞았다.
사람 살던 곳이 거주 불가능한 ‘공가‘로 바뀌고 있었다.
벽을 뚫고 지붕을 헐어 주민들을 공포로 밀어넣는 철거용역들의 이주 관리 방식이 9-2x에서도 펼쳐졌다. (p.258) _ 30. 철거 중에서

내 나이 마흔다섯이 됐다.
여전히 9-2×에서 가장 어렸다.
삶은 돌고 돌았다.
나는 내가 쫓아내던 철거민이 됐다.
나를 쫓아내는 사람들 눈에 나(278쪽)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p.273) _ 32. 용역 중에서

흐르지 못하고 퇴적되는 가난이었다. (p.277) _ 33.퇴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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