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빠는 것들과 피를 빨리는 자들은 대개 같은 동선위에 있었다. (p.485) _ 55. 흡혈 중에서

누군가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픈 사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들은 아프다. (p.496) _ 56. 유령 중에서

재입주해야 할 뚜렷한 이유가 노란집엔 없었다.
쪽방은 몸을 누이는 집이었지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집은 아니었다. 가난한 자들은 작은 충격으로도 흩어진 뒤꼭 그 방이 아니라 ‘그 방 즈음‘으로 돌아왔다. 어떤 일이있어도 되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가난한자들이 흩어지는 방식이었다. 돌아갈 이유는 없으나 완전히 멀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 가난한 자들이 모이는 방식이었다.
가난한 그들은 가난한 방 주위를 인공위성처럼 맴돌며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p.506) _ 58. 귀가 중에서

헌법이 보장한 거주 이전의자유는 자유를 살 돈이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됐다. (p.508) _ 59. 백m중에서

가난은 시각적이었다.
가난한 방일수록 인간을 우습게 아는 시커먼 균사체가 점령했다.
가난은 후각적이었다.
가난한 시간일수록 텁텁하고, 답답하고, 막막한 냄새를 쌓아올렸다.
가난은 촉각적이었다.
가난한 벽일수록 눅눅하고, 축축하고, 끈적했다.
가난은 청각적이었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다툼이 많고, 욕설이 잦고, 웃음도 크고, 시끄러웠다.
가난은 미각적이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사는 맛이 쓰고, 맵고, 짰다.
(p.542) _ 63. 검정 중에서

가시 스펙트럼 576 ~ 580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의 빛깔.
가장 눈에 잘 띄는 원색. 방문마다 붙어 강제퇴거를 통보한 날벼락. 잿빛 9-2×가 보수공사를 거친 뒤 껴입은 헌 옷같은 새 옷. 무채색으로 가득한 동네에서 홀로 도드라진건물 한 채. 리모델링을 멈추고 땜질로 전환한 부실의 결과물. 있음이 없음을, 많음이 적음을, 위가 아래를, 안이 밖을, 이 세계가 쫓겨난 존재들을 대하는 태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경로, 잘라내고 끊어내도 다시얽히고 묶이는 이야기의 혼돈, 환하게 칠한 건물 안에 정작 없는 무엇. 덧칠만 하면 찬란한 세계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징그러운 환상. 머지않아 벗겨지고 말 껍데기. 비릿한 검정의 속임수. 노랑의 미로. (p.544) _ 64. 노랑

있게 된 나는 여전히 슥, 슥, 슥, 슥 움직였다.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은 자의 전력질주는 그저 즉, 즉, 즉, 즉. 감지되지 않는 미세한 기척일 뿐이었다.
살아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는 죽어선 더욱 아무것도아니었다. (p.552) _ 65. 오년 중에서

살아서 마음대로 옮겨다닐 수 없었던 나(577)는혼이 돼서도 동자동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산 자에게나 죽은 이에게나 가난이 삼팔선이었다. (p.560) _ 65. 오년 중에서

나는 죽고 나서야 더는 쫓겨나지 않았다.
죽을 때도 이생으로부터 쫓겨나듯 죽었다.
(p. 567) _ 65. 오년 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난의 미로 안에 끝내지 못한 가난한 이야기가 갇혀 있다. (p.573) _ 입구

언론은 사건과 일상을 구별합니다.

사건은 ‘보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일상은 이야깃거리‘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사건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일들은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 메커니즘을 아는 누군가는 스스로 사건이 되고자 단식을 하고, 누군가는 하늘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며, 누군가는 자신의 목에 줄을 매거나 몸에 불을 붙입니다. (p.574-5) _ 후기중에사

체제와 제도와 인식은 그들에게 동자동 외에 머물 곳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듯했지만, 신이 거대한 핀셋으로 집어 옮니다. (p.576) _ 후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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