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실 옥상에서 바라본 노을. 처음엔 정이 들지 않았는데, 이 노을을 발견한 날 이 동네와 사랑에 빠졌다. 대단한 특색은 없지만, 가끔씩은 떠들썩하고 어린이집 앞의 벚꽃이 무지하게 아름답고 노을 지는 저녁 풍경은 어디다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은 곳. 나에게 이 동네를 사랑할 이유를 준 저녁노을.
스네가 없는 동네에서 산다는 것 중 - P95
평범한 광고지만 그 문장이 무척이나 따사롭다 함께한다면 뭔가 달라질 거예요. 함께해봐요, 그러면 분명 예전과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예요. 나는 이 문장을 혼자서 조금씩 의역해보며 헤벌쭉 웃고 있었다. "왜 또 실실 웃어?" "실없는 여울." 내 짝꿍의 놀림을 받았지만, 그마저도 행복했다. 먼지 풀풀 날리는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역에서, 우리는 함께 있음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_ 당신은 ‘미투 Me, too‘를 오해하고 있다 중 - P109
꿈속에서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길을 걷곤 한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홀로 걷기도 하고, 어느 나라인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신나게 차를 몰기도 한다. 꿈속의 방랑이 무섭지만은 않다. 꿈속의 내가 현실의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따스한 조언을 해주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너는 이 길을 통과해야 해. 해낼 수 있어. 이 사막만 통과하면 반드시 눈부신 오아시스가 펼쳐질 거야.
_ 어젯밤 꿈 이야기 중 - P112
카디프에서 내게 "빵은 사진 찍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다"라고 속삭인 할머니의 포근한 미소를 보니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의 요리에 감탄할 때마다 나는 푸념했다. "엄마, 내가 하면 왜 이 맛이 안 나지?" 엄마는 일부러 나에게 요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어쩌다 부엌에 들어가서 기웃대기만 하면 엄마는 화를 내며 ‘공부하라‘고 채근했다. 그땐 엄마가 유난스럽다고 느꼈다. 이제야 안다. 그 유난스러움은딸이 평생 자기만의 일을 갖기를 바랐던 엄마의 간절함이었음을. 이제는 엄마의 손맛을 정말로 배우고 싶다. 요리 또한 삶의 소중한 기쁨임을 알기에. - P121
여행을 하다보면 갑자기 길을 잃은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도대체 여긴 어디일까. 지도 위의 장소가 아니라 내 마음이 머물고 있는 자리가 궁금해질때. 과연 무엇을 찾으러 이토록 낯선 장소를 헤매는가. 그 순간 아름다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눈부신 은발의 할머니가 책 속에 푹 빠져 있는 모습.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한 순수한 몰입의 순간. 아, 나는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찾으러 이곳에 온 것이구나 비로소 잃어버린 마음의 좌표를 찾은 나는 다시 미소 지으며 방랑의 길을 떠난다. _ 소중한 길 잏을때마다 나는 더 강해졌다 중 - P128
반짝이는 것들을 바라보느라 문득 그 모든 빛 너머에는 그림자가 있음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림자를 딛고 일어선 과거를 떠올린다. 그 어두운 시간을 통과해왔잖아. 너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결국 너를 쓰러뜨리지 못했잖아. 그들의 공격은 널 더 강하게 만들었을 뿐이잖아. 그렇게 그림자의 시간이 나를 위로할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견뎌온 그림자로 인해 더욱 빛난다.
_ 그림자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빛 중 - P147
이역만리 한복판에서 우리네 재래시장 좌판의 따스함을 발견하다. 런던의 버러마켓Borough Market은 초고층 빌딩숲 한가운데 자리한 먹거리 시장이다.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괜찮다. ‘이것 좀 먹어보고 가라‘는 몸짓을 너무도 분명하게 던지는 따스한 상인들 덕분에 모든 언어적 장벽이 허물어지니까. 저 몸짓은 어쩌면 저렇게 전 세계에서 똑같이 통용되는 걸까. 상인들이 "한번 잡숴봐"라고 우리말로 속삭이는 듯한 즐거운 착각으로, 외로움도 추위도 잊었다.
_ 아무도 주눅들지 않는, 누구도 초라하지 않은 중 - P162
2019년 프랑스에서 총파업 시위에 참여한 아빠와 딸의 모습을 보았다. 둘의 뒷모습이 어찌나 다정하고 어여쁜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총파업 시위인데, 모두들 그 얼마나 다정한지 얼마나 평화로운지. 그것은 총파업이 ‘솔리다리테slidarité ‘함께 있음, 연대감, 따스한 공존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대중교통이 마비되었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총파업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을 응원하고 격려해주던 파리 시민들의 모습이 너무도 정겹고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따스함 중 - P167
아, 내가 비로소 떠나왔구나. 그토록 그리고 또 그리던 그곳에 정말 왔구나. 그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바로 기차를 타고 설렘으로 가득한 또다른 여행자를 바라볼 때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온 힘을 다해 바깥 세상으로 몸을 내미는 소녀를 바라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내가 비로소 이토록 머나먼 쿠바로 떠나왔구나. 목적지만큼이나 목적지를 향해 기차를 타고가는 시간 자체가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_ 기차, 또 하나의 여행지 중 - P179
어쩔 수 없이 이야기에 매혹되는 나는 이야기를 짓는 사람은 물론 이야기를 읽고 있는사람에게도 매혹된다. 책을 읽는 사람, 무언가를 종이 위에 쓰는 사람만 보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된다. 저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넘실거릴까. 저 사람의마음속을 뒤흔드는 지금 저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서로의 이야기에 못 견디게 따스한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_ 넷플릭스로ㅠ‘윈터링 wintering‘중 입니다 중 - P191
다정하게 맞잡은 손만큼 분명한 친밀감의 표현이 있을까. 그런데 아이 셋 이상을 키운다면, 분명 손이 모자랄 것이다. 이럴 땐 ‘전기놀이‘가 필요하다. 내 손가락의 전류를 이 아이에게서 저 아이에게로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따스함의 전류, 그 전류를 타고 나의 따스함도 반드시 전해질 것이다. 글쓰기는 직접 손잡을 수 없는 모든 머나먼 대상을 향한 따스한 마음의 전류 보내기가 아닐까.
_ 만짐, 살아 있음의 온기 중 - P202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것은 동물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강아지는 마음껏 뛰고 우리는 저마다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문득 깨닫게 된다. 너는 너의 기쁨을 열심히 추구하고 나는 나의 기쁨을 열심히 추구했을 뿐인데, 우리는 이렇게 완전히 충만하게 소통할 수 있구나. 서로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괜찮구나. 다만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가도 이토록 좋은 거였구나. - P211
너무 지쳐서 이제는 그만 가도 좋겠다 싶을 때가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행이라도 내 몸이 지쳐버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 또다시 이토록 눈부신 순간이 보인다. 그러면 지친 팔을 들어 또 한번 찰칵,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싶어진다. 그러나 대상이 아름다울수록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름다운 순간을 망치지 않도록. 나의 관심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때로는 사진을 찍으려는 충동조차 내려놓고 싶어진다. - P217
명상의 기쁨을 몰랐다. 삶 자체가 어려운데, 숨쉬기마저 어려워지는 느낌. 숨도 규칙에 따라 쉬어야 한다면 무슨 낙으로 사나 싶었다. 그런데 불면증이 심해지면서혹시나 명상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사심‘을 품기 시작했다. 불면증의 한가운데서 명상을 시작한 뒤, 하루 만에 ‘꿀잠‘을 잤다. 명상을 시작하자마자 10분도안 되어 잠들어버렸다. 그후 집중이 안 될 때마다 힘든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조금씩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은 내 마음을 세상의 모든 자극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_ 가끔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용기 중 - P222
‘이것도 몰라?‘ ‘넌 옛날 사람이구나?‘ 하는 시선에 나도 주눅들 때가 있다. 세상은 자꾸만 진정한 나를 찾으라는데, 그런 스타일과 트렌드 속에는 내가 없다. ‘변화를 위한 변화‘의 강박 때문에 내 마음의 팔다리를 잘라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억지로 내 키를 맞추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읽고 쓰고 아파하고 보듬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꼭 붙들며 살아가고 싶다.
_ 자존감, 높지 않아도 괜찮아 중 - P232
요새 MBTI를 모른다고 하면 외계인 취급받는다. 그래도 괜찮다. 나도 사람들이왜 MBTI에 매료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걸로 사람을 판단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사람의 마음은 창문을 닮았다. 바깥에서는 ‘알 것 같다. 저 뒤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창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창문 자체가 위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내 마음속에 완전히 숨어버릴 때, 나는 세상을 향한 창문을 닫는다. 때로는 나를 통계화, 유형화하려는 모든 권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_ MBTI, 흥미롭지만 기대지 않기 중 - P238
병산서원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일에만 파묻혀 지내다가 문득 ‘이곳은 왜 이렇게 좁은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날 병산서원 대청마루를 떠올린다. 대청마루는 세상의 모든 걱정거리를다 받아주는 여신의 너른 품같았다. 대청마루의 품에 안겨 나는 내가 한없이 작은 존재로 축소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라, 이 커다란 대청마루의 품속에서 잠시 ‘행복의수혈‘을 맛보아도 좋다. 나는 작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저 우주의 끄트머리에서 보면 난 얼마나 작고 여린 존재일까. 아마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자연의 너른 품에 안겨있을 때, 나는 개미처럼 기쁘게 작아진다.
_ 뷰맛집의 시대 중 - P249
거리의 버스커들은 귀신같이 눈치 챈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귀기울여 듣는지 아닌지. 음악이 너무 아름다울 때,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동전을집어넣고 온다. 방해하지 않으려 했는데, 버스커들은 눈을 감고 노래하다가도 누가 다가와 동전을 넣는 소리를 알아듣고 미소 지으며 ‘땡큐‘를 연발한다. 우리의듣는 귀가 있을 때, 음악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듣기는 결코 일방적인 노동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간절한 울림통이 되어주는 것이다.
_ 깊은 한숨의 오케스트라 중 - P273
타자기를 보면 나는 네가 생각난다.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을 것만같은, 내 친구 L. 네가 더욱 그리워지곤 해.
_ 우리, 글쓰는 여자들을 위하여 중 - P277
요새는 손편지를 자주 쓰게 된다. 보내지 않더라도, 우선 손으로 먼저 사각사각 무작정 쓰게 된다. 손으로 편지를 쓰다보면 격렬한 감정이 조금씩 ‘내가 보살필 수있는 감정‘으로 가라앉곤 해. 종이 위로 펜이 지나가는 소리와 촉감이 너무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 밀려오곤 한단다.
_ 우리, 글쓰는 여자들을 위하여 중 - P280
고흐의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가족. 세상모르고 쿨쿨 잠든 아기가 이 풍경의 못 말리는 다정함을 완성한다. 고흐와 아빠와 엄마와 아기, 네 사람은 이날 더없이 화목한 한때를 보냈을 것이다. 뮌헨에서 만난 이 가족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나 또한 덩달아 행복해졌다. 불타는 질투가 아닌 해맑은 부러움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밝혀주었다.
_ 우리, 글쓰는 여자들을 위하여 중 - P285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의집‘에서 발코니에 선 꼬마 소녀. 그날 소녀는 온세상의 열렬한 사랑고백을 받는 듯했다. - P290
이 머나먼 곳에도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있었다니.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까르르 별들의 미소가 쏟아질 것만 같다. 만나자마자 몇 시간 되지도 않아 영원한 우정을 맹세한 다이애나와 앤처럼, 이 아이들은 이 순간을 영원히 길게 더 길게 늘일 수 있을것만 같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꼬마 천사들. - P297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저 무거운 수레를 홀로 밀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여성을 향한 온갖 차별과 억압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기에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생의 부담을 묵묵히 짊어지고 홀로 걸어가는 여인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당신들은 우리를 깜빡한 것이지요? 우리를 영원히 잊은 것은 아닌가요?
_ 그들이 깜박한 존재들 중 - P310
편지를 쓰는 여울, 오래전 여행을 떠날 때 엽서 백 장을 준비해서 가는 곳마다 한통씩 사람들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야심찬 준비를 해갔다. 서른 장을 간신히 채웠지만 뿌듯했다. 빈 종이 위에 글씨를 채워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매일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잃어버린 설렘을 회복했다.
_ 무럿이 당신을 꿈꾸게 하나요 중 - P315
새벽길을 걸었다. <피터 래빗>시리즈의 작가 비아트릭스 포터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차도 막힐 일이 없고, 강승도가 막아설 염려도 없는, 시골의 새벽길을 걷자 마음속의 모든 수런거림이잦아들었다. 싱그러운 침묵의 향기를 온몸 가득 충전해두었다. - P317
오래전 교토로 떠났던 여행 사진을 정리하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찬사가 터져나왔다. "여기도 이야기장수가 있었네!" 소중한 이야기가 가득 담긴 책들을 쌓아놓고, 자나깨나 이 아름다운 책들의 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책방지기야말로 우리들의 정겨운 이야기장수였다. 작가, 편집자, 책방지기, 독자는 아름다운 인연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 P324
겨울과 봄이 바통 터치를 하는 순간은 언제나 경이롭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물체도기어이 따사롭게 녹여낼 것만 같은 봄볕은 겨울의 황량함을 기어코 몰아낸다. - P325
내 작업실 옥상에서 바라본 서울의 저녁노을. 이렇게 타오르는 저녁노을만 있으면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그런 충만함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리는 매일매일, 이런 아름다움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만 놓쳐버려서, 노을은 언제나 안타깝도록짧고 아련하다. - P327
산 위에서 또다른 산을 바라본다는 것. 산을 넘고 또 넘어도 또다른 산이 보인다는 것. 그것이 삶이지만, 이 산은 참으로 눈부셨다. 스위스 체르마트의 어느 벤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