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습니다. 인간을 객체가 아닌 주체의 자리에 놓았던 그의 인식론 역시 그때까지의 철학을 뒤엎은 것이었지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이렇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것,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논의하고 전복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_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중 - P275
그는 오랜 세월 때를 기다렸고 기다리는 동안 철저히 준비했으며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강상의입장에서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일지 몰라도 아내 입장에서는 비극입니다. 그녀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때를 기다리지 못했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엎지른물은 다시 담기 어려웠습니다.
_ 엎지른 물은 다시 담기 어렵다 중 - P276
두 철학자는 인생의 목적 자체가 달랐습니다. 아리스티포스는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고 했고, 디오게네스는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아리스티스는 육체적 쾌락이 정신적 쾌락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고, 디오게네스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 즉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_ 시니컬 중 - P280
‘개 같은 것‘이라고 하니까 어감은 과히 좋지 않지만 그 의미는 디오게네스가 아리스티스에게 했던 말에 들어있습니다. ‘거칠게 먹고 험하게 입는 법을 조금만 알면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행복하며 부도 권력도 명예도 행복의 걸림돌에 불과한 것, 그래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 이것이 바로 시니컬의 본래 의미입니다.
_ 시니컬 중 - P281
《장자》에 나오는 이 우화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사람들은 혼돈을 뒤죽박죽이나 엉망진창과 비슷한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혼돈 자체는 앞서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옳고 그름, 선과 악 같은 분별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입니다. 불가와 도가에서 최고의 경지로 꼽는 것도 바로 분별심 없는 정신이지요.
_ 혼돈 중 - P287
봉창은 주로 부엌 같은 곳에서 연기를 배출시키기 위해 만든 작은 환기창입니다. 그리고 한옥에서 부엌은 방과 멀리 떨어져 있기때문에 웬만하면 자다가 갈 일이 없는 곳이지요. 그러니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것은 누가 봐도 엉뚱한 행동일 수밖에요. 당시의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는 우리 속담이 흥미롭습니다. - P290
옛날 영국의 선술집으로 가봅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함께있는 누군가가 돈을 훔쳐갈까 걱정했습니다. 특히 맥주 잔을 들어올려 술을 마실 때가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소매치기를 할 가능성이있는 사람에게 겁을 줄 작정으로 맥주 잔을 들어올릴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Here‘s looking at you." 그 눈빛과 말에는 이런경고가 담겨 있었겠지요. ‘서툰 짓 마라,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 그 말이 훗날 ‘그러면, 건배‘라는 뜻이 됐습니다. 그리고 영화 <카사블랑카>가 한국에서 개봉했을 때는 이렇게 멋지게 의역됐습니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_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중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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