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많은 아이들이 고마우신 부모님께 왜 함부로 빽빽 소리를 지르고 못된 반항을 하는지, 나는 완전히 체득했다. 내가 받은 것이 축복받은 재능이든 유복한 환경이든, 그것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쾅쾅 짓밟기 전에는 이 저주받은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P216
울면서 말하니 앙탈같이 들려서 탈이지만, 그 말을 꼭 하고 싶어서 왔다. 어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였다. 나도 이미 굉장한 거짓말쟁이였고 어른이 될 무렵이면 완전한 거짓말쟁이가 되겠지만, 내안에 아직 조금의 정직함이 남아 있을 때 이 문제를 얼른 해결하고싶었다. 어른이 되면 착한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 P221
"그게 아니야, 설아. 아이들은 웃고 즐겁게 자라야 하지. 하지만시현이처럼 좋은 환경에서 혜택받고 자란 아이들은, 훌륭하게 커서자기가 받은 사랑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할 책임도 있는 거야. 나는그 이야기를 한 거란다." - P222
이건 뭐지. 남의 집 아이들에겐 사실을 말하고, 세상에 하나뿐인자기 자식에게만 거짓말을 한다는 건 대체 뭐지. 나는 이제 무엇이참말이고 무엇이 거짓말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 P225
방금 들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곽은태 선생님은 시현이를 미워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 아들을 미워했다. 나를 버린 내부모를 제외하고, 세상의 부모는 모두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24시간 자식을 생각하기만 해도 사랑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줄 알았다. 곽은태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완벽하게 자기 아이를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런데 시현이를 미워했다고, 지금 곽은태 선생님은 자기 입으로 실토했다. 원 - P226
하지만 이곳에 녹아 있는 진한 자유의 향기, 내가 무엇을 해도 별관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 느긋함은 저녁 식탁에 앉을 때마다 무엇을 배웠고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꼼꼼하게 물어보는 시현이네 가족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시현이네 집에 있을 때 시현과 나는항상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기분이었다. 어른들의 관심은 항상 우리에게 있었고 시선은 끊어지지 않았다. 눈부신 조명 아래 숨을 곳이라고는 없었다. - P243
틈만 나면 멋을 부리고 방송에 나가서 책임감 없는 세태를 개탄했지만, 원장님이 선택한 내 양부모들은 모두 책임감이 강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려움이 찾아오면 제일 먼저 나를 버렸다. 아마도 내 양부모의 선택도 기부금의 잣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파양되면 또 그걸 무기 삼아 기부금을 모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기부금 때문이었다. 원장님은 나를 이용해 자기 욕심을 채웠을 뿐,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 P251
나는 내가 왜 우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숨도 쉬기 힘들 만큼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 마음은 안 우는데 몸이 혼자 우는 것 같은희한한 상태였다. 내 몸 깊은 곳에서 폭약이 터지듯 울음이 터져 나왔고 마음의 냉기로는 도저히 그 폭발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냥 나는 저항할 수 없이 울었다. - P256
이제는 그 거짓말을 없던 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 기부금이 사랑이었는지 욕심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그것은 땅속의 아코처럼 확인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여기까지, 여기까지라고 결심하고 흘려보내야 하는 일이었다. 분노도억울함도 눈물에 씻겨 내려가 마음이 고요해졌다. - P258
그 이모가 내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건 바로 내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다. - P260
컵라면 용기에서 유해물질이 나오기 때문에 도자기 그릇에 옮겨 먹어야 하는 시현네 가족은 이런 맛을 하나도 몰랐다. - P263
우리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놓고 떠나가듯이 나를 풀잎보육원 앞 모퉁이에 두고 갔을 것이다. 이모와 원장님은 우리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한 사람은 악착같이 기부금을 받고, 한 사람은 하염없이 사랑을 주었다. 이제는 그 일이 기분나쁘거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에게도 자식을 키우는건 몹시 힘든 일이라서 곽은태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조차 완전히길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가 그분들께 나를 맡긴건, 비록 스스로 키우지 못했지만, 좋은 결정이었다. - P268
설이는 입을 열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했던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진짜 부모의 사랑인지, 부모의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그것 속에보이지 않는 이기심의 커다란 가시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캐물었다. 설이의 집요하고 앙칼진 추궁이 때로는 나 자신의 가슴마저 가차 없이 할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많이 고통스러웠고 여러 번 쓰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설이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할 말을 다 해주었다. 그게 바로 설이다. 어른들의 위선과 가면을 벗기기 위해 손톱과 이빨까지 동원한 설이의 기백과 투쟁에 감사하고, 실은 여리고 상처 많은 그 아이에게 나의 가장 큰 사랑과 응원을 보낸다.
_ 작가의 말 중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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