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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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도 없고, 세상에대해 아는 것도 없고, 게다가 진통제를 잔뜩 맞아서 정신조차 혼미한 어린애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파국으로 치닫는 듯하던 이 사건은 이렇게 믿어지지 않는 대화합으로 마무리되었다. 담임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되돌아왔다. - P147

무엇을 얼마큼 따라가야 하는 건지 모른 채, 다른 아이들처럼 어떤 것은 대충 넘기고 어떤 것은 답을 베끼는 기술을 배웠다. 당장 실망시키는 일은 면했지만 내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중요한 자부심 하나가 무너졌고 언젠가는 내 꼼수가 들통나고 말 거리는 불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P164

중학 진학을 앞두고 학원마다 아우성이었다. 우리는 각자 입맛에맞는 쪽으로 미치는 길을 택했다. 나는 새로운 삶 속에서 살아남는투쟁에 미쳤고 곽은태 선생님은 시현에게 미쳤고 시현 엄마는 와이파이에 미쳤다. 원래부터 미쳐 있었던 시현이 그나마 제일 정상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시현이는 제각각 미쳐 어쩔 줄 모르는 우리를 차갑게 비웃었다. - P167

지금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누구든 입을 연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로 너 때문이야. 곽은태 선생님은 아내에게 성난 눈길을 던지고, 시현 엄마는 아들을 야단치고, 시현은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는 나 때문인 것이다. 지금은 침묵 속의 비난을 조용히 견디고, 숨은 이유는 차차 찾기로 한다. 일단은 마음속으로 힘겹게 중얼거렸다. 나 때문이 아닐 거야.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화를 내지만 그 진짜 이유는 얼토당토않은 곳에 따로 있다. 이모가 나에게 가르쳐준 그 놀라운 비밀은, 지금 내가 이 고통스러운 죄책감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어주었다. - P172

가족이란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이다. - P177

하지만 나는 이모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모두 개를 쉽게 버리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추위가 아닌 분노로 몸을 떨며,
엉엉 울면서 걸었다. 아코와 벡터가 세상에서 사라지듯이, 그렇게사라지고 싶었다. - P183

나에게 더 이상의 가짜 가정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진짜 가정이란 것도 이젠 뭔지 알았는데, 그것도 음식물 쓰레기통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거였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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