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가 재개되면 완전히 사라질 동네였다. 재개발은 옛 동네에 새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옛 동네를 뿌리 뽑고 전혀다른 동네를 이식하는 일이었다. - P107
도시마다 고유한 소리를 발산했다. 그 도시의 고음과 저음이 분리되는 동네에 그 방은 있었다. 이 나라 정치를 결정짓는 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동쪽에서 과거 왕조시대의 성문이열리고 닫혔다. 왕이 백성 위에 군림했던 옛날이나 국민이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지금이나 성문은 안과 밖을 구별했다. - P25
새는 것이 비 말고 또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이사한 방에 짐을 들이는 순간 고향 마을로 되돌아간 줄 알았다. 입주 첫날부터 위층 사람들과 살림을 합친 기분이었다. 천장에서 빗방울 대신 소리가 흘러내려 방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페트병으로도 받쳐지지 않는 소리들이 온 집안 구석에 고였다. 일주일도 안 돼 한 번도 본 적 없는 위층 가족의 모든 것이 보였다. - P27
직(職)이 업(業)이란 것. 일과 삶이 카르마로 얽혀 있다는것. 일을 하며 일로 꾸린 일상은 일을 잃으면 무너진다는 것.‘업으로서의 직‘을 그 공장 해고자들처럼 삶과 죽음으로 격렬하게 입증한 경우는 없었다. 삶이 깨진 사람들에게 지옥의 반대는 천국이 아니었다. 지옥은 천국의 도래가 아니라 파괴된일상이 회복될 때 물러갔다. - P42
봄바다붉은 동백꽃만 보면 멀미하듯제주 사람들에겐 4월이면 도지는 병이 있지시원하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생손앓듯 속으로만 감추고 삭혀온 통증이 있어그날 이후다시 묵직한 슬픔 하나 심장에 얹혀먹는 둥 마는 둥때를 놓친 한술의 밥이 자꾸 체하는 거라시간이 그리 흘렀어도깊고 푸르고, 오늘처럼 맑은 물빛 없으니한걸음에 내달려 보러 오라고 너에게 기별하던 봄바다만보면요즘은 별나게 가슴 쿵쿵 뛰고숨이 턱턱 막혀올 때가 있는 거라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인 듯바라보는 것만으로 죄짓는 기분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 P35
글자가 되지 못한 그의 이야기들이 이력서 빈칸을 비집고 들어가려다 곧고 매끄러운 실선에 막혀 무음의 소리를 질렀다.그에게 영원은 그 실선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끝나지 않고 뻗으며 그가 달려가는 곳마다 먼저 도착해앞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시간을 쪼개며 살아온 그의 애씀을 이력서는 학력과 경력의 틈에 끼워주지 않았다. 그는 애를 쓰고 이력서를 쓸수록 묶어졌다. - P18
너무 전형적이어서 뻔한 가난은, 요즘 유행에도 뒤떨어진 불행은, 공정과 능력 같은 단어들에게도 외면받는 청춘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묽어지고 있을뿐이었다. - P19
처음부터 묽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가는 낮과 밤을 쫓아가려고 따다다다다 액셀을 당기다 보면 하루하루 묽어지기 마련이었다. 피부가 쓸리고 색이빠지면서 윤곽선이 뭉개진다. 너무 싱거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농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 P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