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젠가 호주에서 양젖짜기를 해본 적이 있었다. 원주민은 나보고 양젖을 너무 잘 짠다고 눌러살라고 했다. 자기에게 시집오라고도 했던가. 또 필리핀에서는 나룻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새파란 바닷물에 예쁘게 노니는 금붕어 낚시를 했었다. 손낚시였는데 난생 처음 해보는 낚시였다. 남자들도 많았는데도 생초짜인 나에게만 금붕어가 입질을 했다. 옆의 여자애들은 부러워했고 남자애들은 나에게 낚시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지금도 문득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을 볼 때면, 너무나 둥그렇게 예뻐서 쳐다보다 그만 후두둑 눈물을 흘려버린 호주의 하늘이 떠오르고 양젖짜기의 추억이 겹친다. 한참 털깍기를 하고 흉한 몰골을 했던 양의 털은 다시 곱슬곱슬 나고 있겠지. 출근길에 햇살이 퍼져가는 강의 물결을 보노라면, 너무 파래서 심장이 아파오는 듯한 금붕어의 파닥임이 떠오른다. 그때 내가 그렇게 잘했던 건 혹시, 잘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렸기 때문일까.
2.
알약을 조제할 때면 반으로 쪼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통통하고 단단한 약들은 반절기나 절단가위를 들고서 잘라야 되지만 단단하지 않고 작은 알약들은 손으로 쪼개기도 한다. 엄지 손톱을 약간 기르는 건 그런 이유이다. 디고신이라는 약이 있다. 강심제로 쓰는 약인데 이 약은 용량에 따라 약효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다른 약보다 좀더 주의해서 정확하게 절반을 잘라야한다. 이때 신중하게 잘 하려고 마음 먹다가는 난처한 경우가 생긴다.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경우 정확한 절반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양 손 모두에 힘을 빼고 쪼개야 정확하게 절반으로 나뉘어진다. 덕분에 매일 약을 쪼갤 때마다 힘을 빼야 균등해지는 세상의 이치 하나를 배우는 셈이다.
이는 피아니스트에게도 마찬가지 논리라고 알고 있다. 언젠가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는데 그 언니가 나에게 제 1의 원리로 설명한 것이 바로 힘을 빼라는 것이었다. 잘 쳐야지 마음 먹고 힘을 잔뜩 주고 건반을 두드리면 어깨에서, 팔목에서, 손목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 건반으로 가는 힘은 조금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리도 뭉툭하고 이쁘지 않다고 했다. 손목만 열라 아프고 말이다. 피아노를 칠 때 손목이 아프다는 사람은 피아노를 제대로 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석으로 치면 아무리 오래 쳐도 허리도 아프지도 않고 어깨도 물론 안 아프며 손목도 멀쩡하다는 것이다. 심장에서 나온 '기'가 온전하게 양 어깨를 지나쳐서 팔과 손목을 지나 손가락을 거쳐 건반을 터치할 때, 그때의 소리는 온전한 소리이며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소리다. 절반으로 온전하게 쪼개진 알약처럼.
3.
읽으면서 힘이 들어가는 소설이 있다. 작가가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 여기도 힘이 잔뜩 저기도 힘이 잔뜩 들어간 소설을 읽으면 덩달아 힘이 들어가서 어느 순간 지치고 어느 순간 손목이 아프듯 마음 한 켠이 아파온다. 잘 된 소설은 힘을 잔뜩 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케이팝스타에서 박진영이 이런 말을 했다.
...가 이번에는 대충 불렀죠? 힘을 빼고 불렀죠? 잘~했어요. 노래는! 노래는! 그렇게 힘을 빼고 불러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듣는 이도 부담없이 듣고 부르는 이도 그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어요.
다음에 다시 양젖을 짜게 되거나 손낚시를 하는 기회가 생긴다면 내가 또 마음을 비우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때보다 지금 나이를 더 먹었지만 마음을 비우는 건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되는게 아니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견, 욕심이 더 생기는 걸 문득문득 절감하는 요즈음엔 더욱 더 그렇다. 이럴 때 힘을 잔뜩 뺀, 이런 소설이 좋다. 특히 이 부분. 이 부분을 읽으면 나는 자꾸자꾸 눈물이 난다.
테무진이 그의 벗 보오르추를 만나고 잃어버린 황금색 늑대귀 말 여덟 필을 찾아 돌아와 보오르추네 게르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사라져 소식도 없이 4일간이나 지난 뒤 나타난 아들 보오르추를 보고 처음 나온 어머니의 말이다.
"내 아들의 손님인데,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나은 걸로 대접해야지."
테무진은 눈물이 나올 뻔했다.
'여기는 정말 사람 사는 데 같구나.'
....
게르 안에서 이렇게 분위기가 익는 동안 밖에서는 일꾼이, 양들 중에서 가장 큰 놈의 뒷다리를 훔쳐서 뿔을 잡아끌고 나온다. 그러고는 사지를 붙들고 눕혀서 명치를 십자로 째고 가슴에 손을 넣어 동맥을 끊었다. 사지가 늘어질 때까지 두 사람이 붙든 채 웃고 이야기한다. 양의 눈동자가 새파란 하늘색이 되었다가 이내 빛이 꺼졌다. 테무진이 게르 밖의 분주한 풍경을 내다보면서 마유주를 한 모금 하고는 얘기를 잇는다.
p.169
<김호석 ; 죽은 염소>
멋진 표현이다. 삶과 죽음이 일상으로 녹아드는, 삶과 죽음이 태극으로 돌고 도는 원리를 이해한 자의 표현이 아닌가. 자연과 맞닿아 살고 있는 몽골인들은 양을 잡을 때도 하늘에 양의 영혼을 보내주는 의식을 하면서 잡는다. 그 의식 없이 자연재해, 조드, 늑대의 약탈 등으로 인해 죽은 짐승은 먹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 듯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