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번호를 저장해놨기에 이름이 떴을 때 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예상대로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고 수줍은 따뜻함이 부드럽게 내 귀를 적시고 들어왔다. 우린 첫 통화였지만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했고 전화기 너머로 서로의 심장소리를 공유했다. 구구절절한 사연이어서 더 기뻤고, 얽히고 설킨 실타래가 있어서 더 기분 좋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 조금의 연결 지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우린 훨씬 가까웠다. 우린 지리상으로도 가까운 거리였고 서로 공유하는 비밀지점이 알고 보니 겹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던 게 밝혀졌다.
썩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면 내 근처의 어느 반경 안으로는 저절로 접근 불허가 되는 나에게 그녀는 처음부터 그 반경 안에 들어온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녀는 어쩜 나의 울타리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그녀에게는 나의 울타리의 존재를 보여주지조차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실은..그녀가 모르는 하나의 접점이 더 있다. 그건 다음에 그녀가 만났을 때 그녀에게 깜짝선물처럼 들려주고픈 비밀이야기이다. 추운 겨울 날 따뜻한 커피숖에 앉아서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며 "어머 어머 왠일이래?" 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수다를 떨어야 될 종류인 것이다.
학창시절이 한참 전에 지나가버린 요즘엔, 소중한 것들의 고마움을 실감한다. 다시 한 번 커다란 공간으로의 진입이 가능할 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렇다해도 이전과 달리 소중한 것들의 존재를 망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실'은 '소중한 것' 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해주는 고마운 기능이다. 그녀는 물론 그런 기능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픈 밤이다. 그녀가 골라준 음악을 들으며, 그녀가 내게 들려준 아름다운 음색을 떠올린다. 다음에 그녀도 좋아하는 그를 같이 만나서 셋이서 좀더 따뜻함이 흐르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그녀에게 내가 조금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제라도.
새 집에서 퇴근 후 늦은 밤에 처음으로 써보는 글이다. 나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고 있었는데 왠지 그녀가 떠올라서 읽던 책을 덮고 그녀 생각에 잠긴다. 그녀도 '섬'을 좋아할까. 분명, 좋아할 거야. 그녀의 섬세한 감성이 이 '시적 아포리즘'으로 가득찬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을 리 없잖아? 이 책을 선물해준 또다른 그녀도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내게 '섬'을 소개해준 그도 보고 싶어진다. 아..보고싶어지는 사람들이 왜이리 많지?
그녀와 음미하고픈 구절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런 비참 속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시련 속에서, 만사에 대하여,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는 어떤 현실과 접촉하게 된다. 우리는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다. 부조리한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는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 러시아 사람들이 태형과 시베리아 수용소에 의하여 얻어낸 안이한 효과에 매달리는 대신 비밀과 가난 속에 은신할 때 우리는 <겸허함을 통하여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