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도 없는 친구를 오랜간 보지 않을 수 있을까? 허수경은 독일로 떠난 뒤 십 년만에야 20대 시절의 둘도 없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친히 독일을 방문한 덕분이다. 서로를 향하는 그 애잔한 마음이 공간이 멀다고 희박해질까. 시간이 흐른다고 엷어질까. 대상이 있는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져 둘의 만남 후(혹은 만남 전이라도) 허수경은 그 터질듯한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저녁 직전> 

집으로 선뜻 들어설 수 없는 마음
강으로 간다
강가에 서서 먼 날을 되돌려
오늘인 듯 내일인 듯
목숨을 걸고 꽃피웠던
어제인 듯 추억한다

우리 그날 비닐우산으로 노을을 가려 쓰고
그 안에서 웃었지?
레이스 달린 양말을 신고 학예회에 나온
우리들의 영혼이
비닐우산 아래 그리고 우산을 감싸 안고 있었던 노을처럼 다사로웠지?
아아, 얼마나 우리는 웃겼니?
삶으로 머리칼을 묶고 죽음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도 모자라
세기 밑을 흐르고 있는 물 아래 잔돌처럼 힘차게 다시 엎드리고 있자, 했지?
잔잔한 물꽅들을 열어보자, 했지?
그러지 않았니? 연인아,
....

  

나는 허수경을 잘 몰랐다. 방송인 허수경만 알았으니 뭐. 내가 허수경을 알게된건 최근작인 빨간 표지 시집을 접하면서다. 시집은 너무나 강렬해 리뷰를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했다. 결국 육 개월이 지나서야 뭔가를 끄적여놨지만 여전히 허수경의 시집은 두터운 퇴적층 아래 상당 부분이 묻혀 있어서 나에게 매번 '발굴'의 기쁨을 선사한다. 빨간 시집에서 발견한 한 편의 시, <저녁 직전>. 그 시는 동기간의 우정, 재회의 기쁨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닌 듯도 했다. 갸웃거리던 나는 <모래도시를 찾아서 >를 읽고서야 '발굴'해낸 것이다. 그녀의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ㅅ이 독일로 왔다. ㅎ(허수경)이 서울에 살 적 ㅅ과 ㅎ은 가끔 같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ㅅ이 이 바다 바깥에 없을 때 ㅎ은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았다. F라는 도시에서 ㅅ과 ㅎ은 그 도시의 강변을 거닐었다. ㅅ이 ㅎ에게, "너, 전에는 그렇게 노래도 많이 알고 자주 부르더니", 했다. ㅎ은 ㅅ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 없이 노래가 어디 있니, 라고. 문득 ㅎ은 ㅅ의 옆모습을 슬금거렸다. 10년이라는 세월 가운데 ㅅ은 어제 ㅎ이 서울을 떠날 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
ㅎ은 그리고 언젠가 ㅎ이 시인이었던 적이 있다는 것을 10년 동안 무슨 두부를 베보자기에 가두어놓고 물기를 짤 때처럼 끙끙거리며 손에 쥐고 있었다. 강변에서 아주 오래된 노래를, 가사도 이미 잊어버린 노래를 ㅅ과 ㅎ은 흥얼거렸다.
 
   

 

나에게도 몇 년간 보지 못한 친구가 있다.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그 친구는 나에게 오지 못하고, 나는 그 친구에게 가지 못한다. 친구의 얼굴을 못 본 지가 하도 오래 되다보니 막상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지 종종 상상해본다. 허수경은 그 상상의 시간을 10년을 보냈고, 보상처럼 머나먼 타국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 절정의 기분을, 터질 듯한 마음으로 허수경은 시로 썼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내가 허수경의 시를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도 절반은 된다. 그러나 허수경의 에세이를 읽기전에 <저녁 직전>을 접하면서 나는 이미 허수경이 오랜간 그리워하던 동무를 만났으려니, 아니 만나지는 못했더라도 절절이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낯선 나라의 강가에 흐르는 물에 띄웠겠거니, 생각을 했다. 시는 읽는 자의 것이라, 했으니. 그런 마음을 시를 읽으면서 이미 전해받은데다가 에세이에서 그 근거를 찾았으니 나로써는 그저 확신의 마음이 들 뿐이다. 그리고, 설령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다. 강가에서 그리운 이를 추억하는 그 마음이 예뻐서, 그 시가 나를 움직인 거니까) 에세이를 통해 그 마음을 알고 난 뒤에 다시 바라본 시는 조금 더 반짝거렸다. 그래, 이렇게 흐르는 마음이 '시'를 쓸 수 밖에 없게 하는구나.

한때 시상이 철철 넘치는 순간이 내게도 잠깐 있었다. 강둑이 터지듯 밀려나온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나는 시를 끄적였다. 일 분만에 뚝딱, 오 분만에 뚝딱. 자랑질도 여기저기 했다. 누가 봐도 얼치기임에 분명한데 말이다.그때 나는 표현하지 않을 수 없어 시를 쓰고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느꼈다.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쓸 수밖에 없어서 쓰는 것 말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주고간 '선물'같은 풍부한 감정. 난 이 감정에 푹 빠졌다. 헤어나오기 싫었다. 그래서 고무풍선에 실바람 들듯이 꽉찼던 그 감정이 조금씩 작아지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다급했다. 다시금 채워넣고 싶었다. 이전의 내 속에서는 분명 없던 감정이었기에 나는 외부에서 타인에 의해 나에게 유입된 감정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다시 주입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일련의 행위들이 있었음에도, 처음과 같은 방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은 되려 더 건조해졌고 바스라졌다. 아니, 싹 가셨다. 

난 후회했다. 차라리 두번째 방식을 시도조차 하지 말 걸. 그럼 조금이라도 감정이 남아 있을텐데. 폐경기 여성의 건조해진 질 벽 마냥 뻑뻑하기만 한 내 감정이 낯설었다. 괴로웠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고 다시 뺏어가는거야? 그럼 왜 나에게 그런 감정을 주고 간거지? 대상도 없는 하늘에 대고 욕을 했다. 괴로운 시간이 흘렀고, 책조차 시들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금 접어든 <모래도시를 찾아서>에서 허수경의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보고서야, 순간 뭔가 떠올라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빨간 시집을 펴들고서야, 그제서야 나는 알았다. 김곰치의 <빛>에서 읽은 이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요, 누구나 천 개쯤의 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해봐요. 시를 읽고 감동할 때, 하나의 방에 불이 들어오죠. 감동이 다하면 불이 꺼져요. 방은 그런 거에요. 감동, 사랑, 깨달음의 방이죠. 불이 켜지면, 내부를 볼 수 있어요. 이런 방, 저런 방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돼요. 어떤 불행한 사람은 이백 개 정도 방의 불을 켜보고 죽어요. 어떤 사람은 오백 개, 칠백 개, 인생을 참 잘 산 사람은 모든 방의 불을 밝혀보고 죽겠죠. 생애 최고의 순간에는! 천 개의 방 모두에 일제히 불이 들어오죠. 아!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시를 쓰고 싶었던, 아니 '시'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표현하고파 애달았던 내 속의 터질 듯한 감정은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이다. 어느날 나에게 찾아든 그 감정은 실은 내 속에 오랜간 숨어져 있어 내가 발견해주길 기다리던 것이었다. 김곰치의 마음의 천 개의 방은 김곰치의 것이고, 허수경의 천 개의 방은 허수경의 것이고, 내 마음의 천 개의 방은 나의 소유였던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선심쓰듯 주었거나, 너무나 반짝반짝 빛이 나서 그 사람의 방을 내가 몰래 훔쳤거나, 내지는 같이 지내다보니 향기 묻듯 내게 조금 묻었거나 등이 아닌, 온전한 나만의 방인 것이다. 충만한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도 내 방이요, 사막의 뜨거운 햇볕 아래 퍼석거리는 모래 마냥 건조한 것도 내 방인 것이고 내 마음인 것이다. 그걸 알게 되고서야 난,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얻고자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누구에게나 시인의 방이 있고, 누구나가 작가의 방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된 사람은 그 방의 불을 환히 밝힌 사람이지만, 시인이 되지 않은 일반인 역시 그 방의 불을 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난 시인은 부럽지 않은데 시인의 불 밝힌 방은 좀 부럽다. 내가 아주 잠깐 느꼈던 그 충만하게 흘러내리던 감정을 가진 시인의 방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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