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집에서 토끼를 키운 적이 있었다. 학교 앞 노점상들이 부화기로 부화시킨 따뜻한 병아리들을 종이 박스에 담아서 팔고 있을 때였다. 요상한 색깔로 물들인 녀석들과 온전한 색깔 그대로인 녀석들이 뒤섞여서 미약한 소리로 삐약삐약 우는 종이 박스 앞을 지나치는 건, 열 살이 채 못 된 여자아이에겐 하루 중에서 제일 힘겨운 시간에 해당되었다. 멀리서 삐약 소리가 들리면 도로를 횡단해 길 건너편으로 가고야 말았다. 그저 마음 속으로 누군가 빨리 저 추위에 오돌거리며 떨고 있는 병아리들을 데리고 가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말이다. 손이 야무지지 못해 동물을 키우는 걸 잘 하지 못하는 나는 결국엔 오래도록 팔리지 않아 비실거리는 한 마리를 사고야 말았다. 그러나 비실거리던 병아리는 모이도 겨우 삼키더니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같이 샀던 또래 친구들은 그 병아리들을 잘 키워 중닭으로 만들어놓았다. 중닭이 동네를 퍼득거리며 뛰어다니는 꼴을 보고 기가 죽은 나는 그 뒤로 학교 근처에서 병아리 소리가 들리면 아마, 귀를 막았나보다. 그때 마당 한 켠 토끼장엔 여전히 토끼가 살고 있었다. 작고 앙증맞게 삐약거리던 병아리와 달리 토끼는 컸고, 빨간 눈은 무서웠고, 토끼장에서도 푸다닥거리며 위협을 해서 근처에 가질 못했다. 어느날 밤 엄마는 토끼장을 천으로 둘렀고 밤새 시끄럽더니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오니 토끼장이 치워져 있었다. 토끼가 새끼를 낳다가 스트레스로 새끼들을 죄다 물여죽여서 놀란 엄마가 토끼를 팔아버린 사연은 한참 나중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토끼의 묘>에서는 병아리처럼 토끼 사육이 유행이다. 아니,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병아리처럼 쉬 죽지도 않고, 삐약대는 등의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제공하지 않고, 사육이 간편하지도 않고, 냄새까지 참아야하는 토끼 사육은 어느새 '유기'라는 은밀한 유행으로 뒤바뀌었다. 하루아침에 파견근무가 정해진 남자는 파견나온 도시의 공원에서 유기된, 혹은 자유로운 토끼를 발견하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아파트로 데리고 간다. 토끼를 키우기로 한 것이다. 편혜영은 왜 애완동물로 토끼를 선택했을까. 애완동물로 효용가치가 있을 듯 하지만 결국에는 유기할 만한 목록을 생각해보았다. 역시나 토끼가 제일 윗순위겠다. 동화책에서 그림으로 충분히 익숙해진 동물인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그리고 언제라도 야생으로 복귀해서 인간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라면 토끼만한게 없을 테니까 말이다. 파견근무가 끝난 남자는 주워온 토끼를 다시 공원으로 데리고 가서 유기를 한다. 물론, 토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원으로 사라진다. 토끼에게는 인간이 주는 먹이를 먹는 사육보다는, 자연 속에서 천연의 먹이를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먹는 '유기'가 더 고마울테니.
사육되다가 하루아침에 유기되는 토끼마냥 현실에는 실지로 유기견을 비롯해 유기동물들이 무척 많다. 어떤 나라에서는 뱀을 포함한 파충류까지 마구 유기를 하는 바람에 동네 주택가에서 이런 유기동물들을 발견하고 경악한다는 기사도 요새는 종종 들을 수 있다. 동물들의 이런 '유기'와는 다르지만 직장을 가진 남자는 하루아침에 낯선 소도시로 '파견'을 왔다. 파견은 개인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얼마든지 대체인력이 있으니 말이다. 회사에서 근무를 해보진 않았지만 정규직 혹은 비정규직으로서의 회사근무와 또달리, 낯선 공간으로의 파견근무는 사람에게 또다른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나 생각이 든다. 신유목민 개념이 도입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지만, 두 발로 걷는 사람이니 어디든지 갈 수 있다지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공간이동이 아닌, 회사업무의 효율을 위한 사람의 부품화 개념의 일종인 파견은 너무나도 '피동적'인 느낌이 강하다. 파견을 나온 남자는 물론 업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왠지, 업무를 소홀히 하거나 혹은 업무를 엉터리로 한다한들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생긴다. 나 아니면 이 일은 안돼, 의 자기존중이 들어가는 고유업무가 나 말고 누구라도 상관없는, 그저 그 자리만을 지키면 되는 자기비존중의 평범한 업무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나 자신의 존재가 평범해지다못해, 있으나마나한 지경으로까지 가버릴 소지가 있다. 그래서 남자는 소심하게 테스트를 해본다. 일부러 통계치의 합계를 엉터리로 만든 서식을 작성해보았으나 아무에게도 오류를 지적받지 않았고 그 일은 되려 남자의 진을 빠지게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후배가 파견을 나온다는 '통보'를 받았고 후배의 첫출근날 남자는 토끼를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월급은 제대로 나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물론, 자기를 파견시킨 세상에 대한 응분의 표시가 전혀 아니다. 이미 스스로의 존재가 세상의 흔해빠진 굴러다니는 나사 정도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내는, 역시나 세상이 자기 하나쯤 없이도 잘 돌아간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겪는 이 성장기적 충격은 누구나가 한 번쯤은 겪을 것이다. 그 충격을 겪고나면 '나 하나 없이도'가 진화해서, '나 하나로 인해' 변할 수 있는 세상, 이라는 명제로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대부분 알게 된다. 편혜영은 사내의 생각과 행동에 '진화'를 넣지 않는다. 그저 소심한 '변화'를 넣어볼 뿐이다. 지금 세상에서 이런 진화가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일까. 그렇지만,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닌 듯하다. 만약 불가능하다 여겼다면 편혜영은 아예 이런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편혜영은 개인의 이런 진화가 불가능에 가까울만큼 어려운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이를 글로서 사람들과 공감하고픈게 아닐까. 아니 본인 스스로도 이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방편으로 글을 쓰고 있는게 아닐까. 하드보일드한 글 속에 숨은 따뜻함이 느껴지는건 그래서일까. 현실의 갑갑함을, 숨막힐 듯 반복되는 동일성을 끈질긴 집중력으로 지속적으로 파고드는 작가의 글에 감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