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에 나오는 약사 헨리 키터리지에게는 아침마다 출근하는 아름다운 길이 있다. 매일 같은 코스인데도 길 옆에 늘어선 무성한 나무들에 행복해하며 운전하는 헨리의 모습에 나도 따라 벙긋거렸다. 나도 내 출근길에서 그런 코스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시골소도시에 사는데다 집과 직장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깝다. 걸어서 십여 분, 차를 타면 고작 몇 분. 신호등도 많이 걸려봐야 두 번이다. 헨리의 출근길 느낌이 살짝 나는 코스가 그나마 있는 곳은 집에서 강다리를 건너 강변길을 따라 달리는 1여분이다. 그 1분 정도의 시간에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강바람의 시원함을 느끼며 잠시 행복해하다보면 어느새 꺽는 길이 나온다. 꺽는 길에서는 저 멀리 분홍 간판의 약국이 보이는데 그럴때면 괜한 두근거림이 생긴다.  

그 꺽어지는 길 모퉁이에 이층집이 있었다. 작년 봄까지 있었던 이층집은 주인이 바뀌자마자 헐렸다. 멀쩡하던 집이 하루아침에 헐려서 허허벌판이 되어 버렸고, 이내 잡초들이 무성해졌다. 그 집의 뒷집과 옆집들은 헐린 집 때문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속살을 보이게 되었는데 한동안 애인이 찾아오지 않아 관리를 하지 않았던 여인네 마냥 여기저기 흐트러진 데가 곳곳에 보였다. 담 곳곳에는 페인트가 벗겨졌고, 앞집에 가려 그늘에서만 존재하던 공간들에 피던 곰팡이들은 햇볕에 바스라져 여기저기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다. 매일 출근길에 빈 모퉁이를 힐긋 쳐다보곤 했는데, 어느 날엔가부터 빈 공간에 아주머니들이 햇볕가리개 모자를 쓰고 옹기종기 앉아있는게 보였다. 아주머니들이 저기서 뭐하시지? 궁금함이 점점 커져가던 어느날, 약국 단골이신 서씨할머니가 마침 그곳에 계신게 아닌가. 

"어머니~거기서 뭐하세요?" 
 창문을 살짝 내려 인사를 드리며 내다보았다.
"아, 약사. 이제 출근하는가. 나는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아이가. 상추도 심고, 고추도 심고, 옥수수도 심고, 감자도 심었다야."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목에는 수건까지 둘러 제법 농사꾼 티가 나는 서씨할머니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허리를 한 번 펴고, 손으로 허리를 툭툭 치신다.
마침 그날 오후에 서씨할머니가 약을 타기 위해 약국을 들렀다. 잔뜩 호기심이 생긴 나는 토끼처럼 귀를 열어두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새로 바뀐 주인이 집터를 싸게 사긴 했는데, 흉가같은 집이어서 험악한 집기운을 상쇄시키려고 한 삼년간 토지를 묵힌다는 것과, 주인이 어차피 빈 공간이니 동네 사람들에게 공짜로 빌려주어 농사를 짓게 해줬다는 것과, 여러 명이 공간을 같이 나누어서 모종을 사서 재미나게 심고 있는 중이라는 것까지 들었다.
"그런데 집기운은 왜 그렇게 안좋대요? 출근길에 보니까 그쪽만 어두침침한 것이 좀 그렇긴 했어요. 이번에 건물을 싹 들어내니 해가 쨍하니 들어오니 참 좋더라구요."
"그럼~ 그 집이 왜 흉가냐하면 말이지. 전전주인도 그 집에서 자살했어요. 전주인도 그 집에서 또 자살했다 아이가. 한동안 그 집에는 아무도 안 살았제. 그런 집을 내놔도 누가 사나. 계약성사단계까지 갔다가도 내막을 알고는 다들 취소한다아이가. 이번에 집 산 주인은 엄청나게 싸게 샀제. 대신에 한 삼년정도 묵힐 생각을 하구 말이지."
서씨할머니는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손으로는 연신 쉿! 흉내를 내며 목소리를 작게하며 소곤소곤 말씀하신다.
"아. 네. 농사를 지어서 그 기운으로 흉가의 기운을 없애는 의미군요. 덕분에 어머니가 신났네요? 농사도 다 지으시구 말이죠. 근데 허리도 안 좋으신데 무리하게 농사 짓지는 마시고, 좀 느긋하게 하셔요. 수확철 되면 저희도 조금 나눠주시구요." 
취미삼아 작게 농사를 지으면 주위 사람들이 더 군침을 흘린다더니, 내가 딱 그짝이다.
"하모하모. 내가 약사는 꼭 나눠줘야제. 감자 몇 알이 나올란고. 하하하" 

서로 안면으로 물건들을 팔아주는 시골의 경우, 자식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부모들이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안경점을 개업했는데 약사가 안경을 쓰니 다음 번에 바꿀 때는 우리 아들에게 좀 가서 팔아줘 등에서 업종만 바뀐 말을 종종 듣는데 서씨할머니의 아들은 정수기사업을 했다. 서씨할머니가 약국의 고객으로 오면서 몇 번이나 정수기를 갈아달라는 말을 해서 일 년쯤 지났을 때 한 번 갈아주었다. 집까지 합해서 무려 세 개나 바꿔주었다. 서씨할머니는 무척 고마워했고 나는 서로서로 도움 주고받는 시골상거래의 법칙을 깨달은 듯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서씨할머니는 다시 고객의 위치로 온전히 돌아가서 이것저것 요구를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정수기를 언급하면서 서씨할머니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서로의 요구에 대해 밀고당기기를 하던 우리는 대화 말미쯤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듯 화제를 돌려 세상사는 이야기들을 두루 훑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서씨할머니는 항상 웃고 다니시는 스마일할머니신데 관절이 많이 상하셔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신다. 날이 궂은 날에는  날궂이를 해서 여기저기 빠짐없이 쑤셨고, 집 밖이라도 나올라치면 지팡이를 짚고서 겨우겨우 한 발씩 떼서 나와야했다. 그러다 날이 풀리고 몸이 조금 회복된다 싶으면 강을 따라 조성된 강변길을 운동하신다. 모자를 쓰시고, 다리가 흔들려 휘적거리면서도 친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운동하시는 모습을 오가는 운동길에 나도 몇 번 봤다. 아픈 와중에도 자식 정수기사업홍보까지 하던 서씨할머니는 올해 몸이 점점 안 좋아져 작년처럼 농사를 짓지 못했다. 다행히 수술을 해주겠다는 곳이 나타났다면서 도시로 수술을 하러 떠난 서씨할머니는 떠나기 전, 빨리 몸이 좋아져서 작년처럼 농사를 조금이라도 지어봤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말했다. 수술을 무사히 마쳤지만 아직 집안에서 자리보전 중인 서씨할머니가 빨리 쾌유해서 길모퉁이집터였던 곳에서 미니농사를 짓는 모습을 다시 봤으면 좋겠다. 아, 작년에 농사는 잘 지었냐고? 할머니 예언대로 감자 몇 알을 건지는게 고작이어서 한 번 삶아먹고나니 남는게 없더라는 말을 작년 가을쯤에 넌지시 들었다. 나는 요근래 이사를 해서 출근길이 바뀌어 한동안 길모퉁이 작은 밭을 구경하지 못했다. 그러다 엊그제 볼 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잠시 봤는데 작은 밭에는 고랑이 이쁘게 파어져 있었고, 모종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고추 모종도 보였고, 상추도 보였고, 쑥쑥 자라나는 옥수수 줄기도 보였고, 기타 이름모를 것들이 새파랗게 하늘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1-06-29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6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