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계지는 읽지 않은 소설의 대담? 평론? 대화? 아하, 좌담! 등을 읽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책을 사서 보게 꼬드기기도 한다. 나는 포커스라고 적힌 꼭지에 나오는 소설의 좌담을 읽다가 결국 두 소설 다 질러버렸다.
편혜영, 천운영. 둘은 책을 낸 시기도 비슷하지만 연보도 비슷한 점이 꽤 있다. 태어난 년도부터 비슷하고, 서울 출생에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다녔고, 2000년에 같이 등단했다. 서울예대라..나도 한때 서울예대를 가려고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문예창작과 같은 데는 있는 줄도 몰랐고, 실용음악과를 가려고 준비를 하다가 실기시험 전전날에 손을 다치는 참극을 겪는 바람에(?) 다행히! 가지 못하고 약대를 갔던 과거가 있다. 서울예대는 그래서 내게는 가지 못한, 가보고 싶었던 그런 동경의 학교였는데 그런 동경의 학교를 이 둘은 다녔다. 80년대의 치열했던 선배들의 역사와는 달리 90년대의 학교는 치열이 그림자를 남기고 떠나는 시점이었고, 치열에 느끼는 죄의식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계절이었다. 유독 예민한 문학도 및 예술가들은 그러나 그 시절에도 죄의식을 여전히 느끼면서 또한 예술과 죄의식의 분리를 꿈꾸는, 양가적인 생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 시절에 문창과를 다녔던 이들은 다른 공간과는 달리 문학만 꿈꾸어도 되는 공간인 서울예대가 좋을 수 밖에 없었겠다. 아니, 그런 멋진 공간이 있었다니..
'문예창작과 스타일'이라는게 있나부다. 어떤걸 의미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를 나오면 거기 특유의 글쓰기가 글에서 느껴지나보다. '문학'이란 걸로 강의를 하기도 한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하는 천상 이과 출신인 나는 '문학'으로 토론을 하는 것도 아직까지 신기하기만 하다. 저런데서는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할까..좀 궁금하다. 좌담의 사회를 보신 류보선씨는 이 두 작가의 한때 선생님이셨다고 한다. 학부때의 사제간이 이렇게 시간이 흘러 작가와 사회자로 만나다니. 이것도 재미있는 관계들로 보인다.
나는 좌담 중 편혜영에 해당되는 것만 우선 읽었다. 좌담을 읽다가 재미있어서 책을 질러놨으나 책이 도착하는 시간까지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좌담을 읽었는데 읽지 않은 소설, 모르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흥미진진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문득 좌담이란게, 멋진 테이블 위에 셋팅된 정갈한 접시들 위에 놓인 맛깔나는 요리의 실물을 찍은 '사진'같은 것일까란 생각을 했다. 이제 나는 편혜영의 소설이 도착하면, '사진'과 실지 요리의 차이가 어느정도인지 알게 되겠다.
좌담 뒤에는 평론가의 평론이 붙어있다. 평론가 양윤의는 편혜영을 이해하는 힌트를 살짝 준다. '부췌' 부록과 군더더기를 합친 말이지만, 부록과 군더더기 의미를 고스란히 실지로 활용한 탓인지 부췌란 단어는 그 용례까지도 군더더기가 되어버렸다. 편혜영의 이번 작품 <저녁의 구애>에서 숨어있는 부췌를 찾아내봐야겠다. 부췌같은 인물들이 유독 많이 나오는 이 소설은 어쩜 현대인의 자화상 같겠다. 지금 당장 나 하나 빠져도, 고스란히 돌아갈 것만 같은 이 세상. 어마어마한 이 세상의 하나의 부속물 같은 나. 거대한 비행기에서조차 부속물 하나의 '부재'로 비행을 중단하는 사태가 생기기도 하는데 어마어마한 이 세상은 얼마나 완벽한지 '나'란 존재같은 부속물은 얼마든지 없어도 잘 돌아갈 터이다. 그런 희미한, 그러나 저변에 늘 깔리는 불안을 항시 가지고 있는 현대인의 일상을 반복되는 변주로 그려냈다는 작품. 왠지 기대가 된다. 소설은 작가가 세상을 해석하는 나름의 답안을 내어놓는 것일수도 있겠다. <저녁의 구애>는 그런 느낌이 물씬 난다.
천운영의 소설 <생강> 역시 주문을 해놓긴 했으나, 이 사람의 소설은 읽고나서 좌담을 나중에 읽어볼 생각이다. 그렇게 방향을 달리해서 소설을 읽으면 어떤 차이가 날까. 뭐가 더 재미있게 소설이 읽힐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