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부터 화학이 제일 어려웠다. 수능에서도 화학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이것과 저것이 반응을 해서 새로운 물질이 생긴다는 원리 말고는 도통 이해가 안되었다. 1mol(몰)과 1mol(몰)이 반응해서 어쩌고 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별세계의 이야기들이었는데 다행히 위안인 것은, 화학을 잘 하는 동기 중 수학을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학에는 자신있었기에 화학에 심하게 젬병인 나를 조금은 위안삼을 수 있었을까. 대학 4년동안 화학은 내게 골치거리였는데 다행히 졸업하고 나온 약국가에서는 실지로 쓰이는게 별로 없었다. 통으로 된 시럽을 소분해서 조제해야하는 경우, 역가계산을 해서 전자저울로 잴 때 말고는 화학이 거의 쓰이질 않았다. 역가계산은 이런거다. 15그람짜리 가루약으로 30그람(cc)짜리 물약을 만드는 경우, 역가는 15 나누기 30으로 해서 0.5라고 보면 된다. 만약 내가 10cc짜리 물약을 원할 경우 역가를 곱하면, 5그람이 나오고 나는 가루약을 5그람만 재어서 물을 붓고 10cc짜리 시럽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약국가에선 아이들 약에나 화학이 필요하고 어른들 약에는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했더랬다. 나이든 어르신들은 이빨도 시원찮아지고, 위장기능도 떨어지면서 어느순간 알약을 드시는 것도 힘에 부치신다. 청년, 장년의 과정을 거치면서 노년에 접어들면 기저귀도 새로 차고, 말도 어눌해지듯, 알약도 이제 못 드시고 가루약으로 만들어드셔야한다. 식도로 음식을 아예 못 삼키시는 어른들의 경우 목에 관을 삽입해서 그곳으로 유동식도 주입하고, 약도 넣어주기때문에 가루약으로 지어달라는 노인의 경우 그냥 입으로 드실건지 관으로 주입해서 드실건지 물어봐야한다. 관으로 주입하는 경우는 그냥 먹을 때보다는 아무래도 좀더 부드럽게 갈아야되기 때문이다.
어제 오신 순자할머니는 사지 멀쩡하신 젊은 할머니시다. 다만 얼마전 사고로 팔에 깁스를 하셔서 양팔을 다 못쓰시는 것 뿐인데, 매번 드시는 당뇨약을 드시기가 힘이 드신다고 걱정하신다.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있을 당시 병원에서 처방 나오는 약을 가루약으로 한번 드셨더니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면서 다른 종류의 약이긴 하지만 당뇨, 혈압약 등도 가루로 갈아주면 안 되겠냐고 상담을 하신다. 조금 번거로운거 말고는 딱히 안 될 이유가 없어서 알약을 종류별로 세어서 믹서기에 넣었다. 윙윙. 믹서기가 약을 분쇄하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돌다가 멈춘다? 어. 이거 왜이래? 급히 믹서기 뚜껑을 열고 봤더니 약이 서로 뭉쳐서 초록색의 쑥떡 가루처럼 덩어리져 있었다. 날이 흐려서 그런가. 약수저로 믹서기에 붙은 덩어리를 떼어내서 새로 돌렸다. 윙윙. 또 돌다가 멈춘다. 이거이거..약효에는 별 이상이 없으니 가루약을 약포지에 모두 넣어서 지어준 다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믹서기 뚜껑 칼날에 붙은 가루약은 마치 껌처럼 들러붙어 칼로 긁어도 긁히지 않고, 몇시간이고 물에 담궈놔도 떨어지지 않는다. 당뇨가 생기면 보통 합병증으로 신경통이 같이 오는데 이 신경통약으로 주로 쓰는 약 중에 치옥트산이라는 게 있다. 다른 당뇨약이나 혈압약, 위장약 등은 기존에 갈았을 때 별 이상이 없었고, 유일하게 의심가는 한 가지가 바로 이 녀석이어서 치옥트산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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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 lipoic acid(치옥트산, 상품명으로 치옥타시드 등이 있다)는 금속화합물(철&마그네슘을 포함하는 제제, 우유(칼슘함유)등)과 동시에 복용했을 때 체내에서 불용성 착체를 형성하므로 동시 복용하지 않는다. 만약, 이약을 아침식사 30분 전에 복용하였다면, 철과 마그네슘제제는 점심이나 저녁에 복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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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치옥트산이 복용시에만 마그네슘이나 칼슘같은 금속화합물과 동시복용을 주의해야 하는게 아니고, 실지 금속과도 킬레이트(불용성 착체, 녹지 않는 착화합물)를 형성하는 거였구나. 킬레이트는 녹지 않고 단단하게 이빨에 붙어 있는 치석과 같은 거라 생각하면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칼날에 닿았다고 킬레이트가 되는거지? 아..그러고보니 닿기만 한게 아니고 알약을 갈면서 고열이 생겼을테고 그 고열 때문에 치옥트산이 금속 칼날과 반응을 한거로구나. 위 속에서 소화되면서 반응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구나. 아하.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내 결론을 믿지 못했기에 예전에 같은 직장동료였던 똑순이 윤약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똑순이 윤약사는 치옥트산을 갈아본 경험도 없지만, 영민한 두뇌로 내 말을 잘 이해해서 요점정리를 딱딱 해주었다. 그리고 칼날에 붙은 치옥트산 가루는 이미 킬레이트를 형성했기에 떨어지지도 않고 먹을 수도 없지만, 다른 부분은 좀 덩어리가 져도 먹어도 될 거 같다고 말을 해준다. 여기서 나의 소심증 발동! 실은, 나는 이미 순자할머니네 댁에 전화를 넣었다. 처방받은 병원에 전화를 걸어 순자할머니 보호자 격인 남친할아버지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냈고, 다시 순자할머니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덩어리진 약은 아무래도 찝찝하니 드시지 마시고 새로 약을 지어드린다고 전화를 넣었더랬다.
나는 치옥트산만 빼고는 죄다 다시 갈아서 가루약으로 만든 다음, 약포지에 하나하나 나눠 담았다. 치옥트산은 이제 믹서기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절단기로 잘게 잘라서 따로 약포지에 나눠 담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순자할머니와 남친할아버지가 내방하셨고, 당신 때문에 거듭 약을 짓게 된 것을 무척이나 미안해하셨다. 당신께서도 비싼 약인줄 아셨기에 아까워서 어쩌누, 하시면서 연신 고개를 숙이고 죄송해하셔서 무척 민망했다. 나는 순자할머니에게 받은 십만원어치의 덩어리진 약을 과감히! 약 수거함에 넣었다. 나의 경험 미숙으로 환자가 덩어리진 약을 먹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면서, 다음 번에는 치옥트산을 절대 갈지 않으리라는 비싼 경험에 만족하면서. 그리고 칼날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놀라면서, 킬레이트 착화합물을 약국 안에서 접하게 된 신기한 경험에 키득거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