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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자신의 속에 가득찬 기쁨, 슬픔, 뿌듯함, 억울함 등의 감정을 타인에게 표출하고 싶고 공감받고 싶어한다. 타인의 이야기만을 주구장창 들어야된다면 그것만으로 힘이 들어 녹초가 될 것이다. 내 직업 또한 타인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되는 경우인데 오후 정도되면 녹초가 되어 손님이 하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다. 하루에 들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면 듣고싶어도, 아니 들어야해도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그럴때는 어쩔 수 없이 건성으로 듣는 척 할 수 밖에 없는데, 주인공인 '나'는 신기하게도 낯선 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를 무척 좋아해 병적이다 싶을 지경까지 다다른 사람이다. 참 요상한 사람이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의 여러 주인공들 중 특히 나오코의 이야기에는 '개'가 나온다. 언제나 기차 플랫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어슬렁거리며 다니고 있는 시골의 한적한 역과 인근의 따분한 거리들이 나오는 이야기. '나'는 어쩜 나오코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버린걸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면 나오코도 '나'에게로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늘어놓을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나'처럼 이야기를 얼마든지 잘 들어줄 수 있겠다.
그런 나오코가 어느날 죽었고, 방황하던 '나'는 나오코가 말한 플랫폼에서 개를 보러 갔다. 결국 개를 플랫폼 끝에서 끝까지 다니게 한 '나'는 이제 나오코를 잊을 수 있을까. 소설 속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연인이거나 짝사랑의 그녀 나오코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살고 있는 '나'는 이제 어떤 희망으로 살아야할까. 막막한 그에게 쌍둥이 자매가 다가온다. 눈을 떠보니 침대 양 옆으로 누워있는 쌍둥이 자매. 어쩜 환상인듯 '나'의 옆에 존재해줬던 쌍둥이 자매 덕에 나는 용기를 내어 '개'가 있는 플랫폼을 보러 갈 수 있었을까. 쌍둥이 자매는 이름조차 남에게 말할 것이 안되며, 옷도 그다지 갖춰입지 않으며, '나'의 퇴근 후부터 출근 전까지 같이 시간을 보낸다. '나'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줘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며, 죽어가는 '배전반'의 장사를 지내러 저수지에 가기고 하며, 골프코스를 돌며 떨어진 공을 줍기도 했다. '내'가 쌍둥이 자매와 보낸 시간은 그런 것들이었다. 치유의 시간은 그런 시간들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쌍둥이 자매에게 위안을 얻었을까. 쌍둥이 자매들과 함께하던 언젠가부터 '스페이스십'을 찾으러다니고 있었다. 독자들는 '내'가 나오코와 만난 시점이 1969년이라는 것만 알고 그 이후의 시간은 알지 못한다. 다만 1년 뒤인 1970년에 제이스 바에서 스페이스십이라 불리는 모델로 핀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70년의 겨울에 드디어 핀볼의 주술에 빠져 오락실에서 스페이스십(그녀)와 열애하듯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열애가 식듯 스페이스십은 어느날 오락실이 망하면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멀쩡한 도넛 가게가 생겼고, 거리는 오락실이 있었다는 과거조차 모르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나'역시 적당히 핀볼을 그만두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데 나는 왜 갑자기 '스페이스십'을 찾는걸까. 그녀가 '나'를 부르는 걸까? 아니면, 나오코가 '나'를 부르는 걸까. '나'는 그야말로 막무가내로 그녀를 찾으러다녔다. 그리고 결국 찾게 된 그녀는..차갑고 넓은 공간에 시체처럼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있으면 안되었다. 그녀는 살아서 사람들의 환호소리를 들으며 움직여야했다. 그러나 차가운 공간에 송장처럼 존재하는 그녀를 보며, 그제서야 '나'는 뭔가를 느낀다. 그녀를 이제 보내야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나'는 그녀를 보내는 의식을 치르면서 내 속에서 여지껏 보내지 않았던 나오코까지 같이 보내는 걸까. 그녀와 함께하던 차가움이 옮겨져 심한 몸살을 앓던 '나'는 열이 내리면서 어떤 시절과 이제 정말 이별이라는 걸 느낀다. 그리고 이제 쌍둥이 자매도 '나'에게서 떠난다. 환상처럼 '내' 곁에 존재했던 쌍둥이 자매는 언젠가 어딘가에선가 다시 막연히 만나는 존재로 바뀐다. 그렇게 '나'의 20대 초반이 지나간다. 그렇게 생의 한 순간이 지나간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생의 한 순간을 보낸다. 보내고 싶지 않는 그 무엇을, 가슴 속 깊이 가지고 있던 그 무엇을. 어느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모두 그렇게 보내게 된다. 사랑하던 사람을, 젊음을, 꿈을.. 그게 무엇이 되었던간에 이별의식을 제대로 치르는 건 중요하다. 나는 이 책이 소중했던 그 무엇과의 이별의식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무엇과 이별을 해야할 날이 다시 또 올때,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 다음에는 '나'의 친구인 '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