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조금만 있으면 개나리가 노란색의 자태를 뽐내기 시작할 터이다. 과거의 그때도 개나리가 꽃눈을 틔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방황은 시작되었는데 하필이면 학교에서 중책을 맡아 제대로 방황을 즐길 수가 없었다. 잠깐 어디 다녀올께, 말 한 마디 없이 훌쩍 떠나면서 얼마나 미안하든지. 그치만 그렇게 가슴에 바람을 넣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어. 그 망할, 개나리가 지천으로 흐드러지기 직전이었거든. 개나리는 꽃눈이 보였다 싶으면 다음날 바로 흐드러지니까. 그리고 개나리의 노란 색깔은 내 피를 흥분시키니까.

훌쩍 떠나 목적지를 정한 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오빠네 고향 집. 오빠는 남자이지만 여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렇다고 호모도 아닌, 어정쩡한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냥 친구였다. 아무때나 불쑥 찾아가도 되고, 아무때나 있을만큼 있어도 눈치주지 않는 그런 친구같은 존재. 오빠에게 불쑥 전화 걸어서 "몇 년만에 전화하지? 근데 나 좀 쉬고 싶어. 오빠."  "그래? 그럼 놀러 와. 푹 쉬다 가."

버스를 타고 가다 가다 차 오른 쪽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동해 바다. 도로 바로 옆이 바다물로 꽉 차 있다. 미리부터 겁이 난다. 아이고야..무슨 바닷물이 도로 바로 옆까지 차 올라와. 아이고..무서워. 흑. 시커멓고 철썩거리는 동해 바다의 위용에 절반은 즐기고 절반은 쫄아서 터미널에 도착해 시골버스로 갈아탔다. 한참을 들어가는데 시골 버스는 동네 사랑방이었다. 시장에서 닭을 사서 버스에 오른 할매 덕분에 버스 안은 꼬꼬댁 신나는 소리와 할매들 와장창 수다 소리에 귀가 멀 정도다. 신호등도 없이 길가에 사람만 보이면 버스는 내리고, 할매가 나 여기 내릴래, 하믄 아무데서나 내려준다. 이거는 버스가 아니고,자가용인가요? 

드디어 도착했다. 백암 온천. 무슨 수련원도 보이고, 백암 온천 밑 조그만 마을이 오빠네 동네. 동네를 휘 둘러보니 깨끗하고 괜찮다. 오빠네 엄마는 신이 났다. 불청객이 왔는데 반찬이 한 상 가득이다. 아주 커다란 생선을 쪄서 봄나물이랑 무쳐서 주신다. 찐 생선은 처음인데, 비리한 거 싫은데, 먹어보니 어? 맛있다. 아구아구 먹는데 옆에서 오빠네 엄마는 당신 입에 넣지도 않으시고 생선가시를 발라서 내 숟가락 위에 얹어 주신다. 나도 엄마 있는데. 울 엄마도 있는데 괜히 눈물이 울컥, 나려 한다. 맛있게 먹고 설겆이를 하려고 하니, "아이고, 색시. 손에 물도 묻히지마. 그냥 곱게 있어. 아무 일도 안 해도 돼." 장년한 아들에게 간만에 여자가 찾아오니 오빠네 엄마는 무척 좋은가 보다. 오빠의 성 정체성을 알 길 없는 오빠네 엄마에게 내가 뭐라 할 말도 없고, 오빠와 나는 그냥 싱긋 웃는다. 

하룻밤을 자고나서 오빠는 근처에서 유명하다는 무슨 동굴 탐험도 시켜주고, 동해바다 구경도 시켜줬다. 저녁에는 백암온천 앞 또랑가에 나오는 뜨거운 물에 발도 담그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집에 와서는 좋은 음악을 듣자며 뭘 틀어주는데 들어보니 과연 좋다. 오빠, 누구 노래야? 전경옥의 혼자 사랑. 아..좋다. 음악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으며 웃다 울다 그렇게 밤을 보냈다. 다음날엔 오빠가 혼자 여행을 추천해준다. 여행이라고 왔으니 혼자 다녀봐야되지 않겠니. 정 무서우면 따라가주고. 월정사 가는 길이 그렇게 좋다는 오빠의 추천을 듣고 버스길에 올랐다. 왼쪽길로 낭떠러지가 끝도 없이 나 있는 길을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버스에 앉아서 스릴만점을 만끽하며 기절 직전에서야 월정사에 도착했다. 혼자서 길을 걷고 혼자서 절을 둘러보고 혼자서 밥을 사 먹고 혼자서 하루를 온종일 보내고 돌아왔다. 

다시 오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입구 고개길에 미술관이 서 있는 게 문득 보였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며 아저씨~ 내려요~ 소리를 쳤다. 내려서 미술관 앞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문을 스윽 열고 들어갔다. 인심좋은 아주머니가 계셨다. 조용한 미술관. 작품들을 실컷 구경하고 아주머니와 수다에 따뜻한 차도 한 잔 얻어마시니 속이 든든하다. 오빠네서 하루를 더 자고 이제 짐을 꾸려 떠나려 하니 오빠 엄마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고작 며칠 묵었는데 못 가게 하신다. 어머니~ 다음번에 제가 알바해서 어머니 약, 우편으로 보내 드릴께요~ 어머니~ 아프시지 말고 오래오래 사세요~ 다음에 또 놀러올께요~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학교에 오니 난리가 살짝 났다. 그러나 내 기질을 이해해주는(?) 친구들에게 조금만 혼이 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제 개나리를 봐도 그저 두근거리는 정도로 안정도 되었다. 굵직한 행사는 끝이 났지만 끝도 없는 회의 등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여행을 다녀온지 일주일인가 한 달인가 지났을 무렵이다. 집에서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데 가슴에 무슨 점..같은 게 보인다? 뭐지? 가렵지도 않은데 뭐가 났네. 뭐지? 꺄악...어루러기..닷! 마침 얼마전 학교에서 배웠던 게 기억이 났다.  어루러기. 곰팡이균 감염에 의해 생기는 것. 더러운 곳에서 생활하믄 옮을 수 있다.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도 쉽게 걸릴 수 있다. 으악! 

오빠네 엄청 더러웠던 집이 문제였나보다. 비염이 심하다 못해 아예 코가 막힌 오빠와 오빠네 엄마는 냄새를 맡지 못하니 집에 더러운 게 있어도 잘 모르셨다. 그래서 이불에서 오래묵어 퀘퀘한 냄새가 났더랬다. 그 이불을 몇 일간 덮고 잤더니 이래 곰팡이꽃이 폈나보다. 내 몸에 핀 곰팡이꽃. 좀 신기했다. 이틀간 지켜보며 틈나면 가슴을 들여다보며 구경을 하다가 이놈이 자리를 잡을까 살짝 겁이 나서 병원을 들렀다. 의사샘이 보시더니 다행히 아직 자리를 안 잡았다고 연고만 처방을 주신다. 그리고도 안 나으면 그때는 먹는 약을 써보자시는데 다행히 일주일만에 가슴에 핀 곰팡이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아직까지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올해도 약속처럼 봄이 왔고 개나리는 하루아침에 피어나겠지. 개나리를 생각하니 나는 왠지 오래전 내 가슴에 잠시 살았던 곰팡이꽃이 생각났다. 외로운 나를 살짝 위로해주고 갔던 곰팡이꽃.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할 곰팡이꽃. 나 역시 너를 대환영해주지는 않았지만, 너와 있는 일주일간은 신기한 경험이었어. 사람 몸에 꽃이 피는 느낌. 나중에, 한참 나중에 다시 내 몸에 꽃이 핀다면 그때도 역시 너겠지. 그때 우리 다시 만나자. 안녕, 곰팡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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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9 2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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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2 1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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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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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1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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