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티스야, 잘 가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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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에 여고생 3명이 왔다. 그중 한 명은 엄청 뚱뚱했다. 겨울 교복을 입었음에도 허리라인을 넘어서 삐져나온 살의 느낌을 알 수 있었고, 교복 치마 밑으로 드러난 다리는 코끼리 다리 그 자체였다. 나는 경악에 찬 눈으로 덩치를 슬금슬금 쳐다봤다. 덩치는 성격이 무척 좋은지 이 친구를 중심으로 친구 관계가 형성되는 게 느껴졌다. 여고생들은 주로 약국에 니베아나 챕스틱 등의 립글로스를 사러 와서는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온갖 걸 구경하다가 가곤 한다. 이 친구들도 예외는 아닌데 덩치가 이 립글로스 색깔 좋다, 라고 하면 와하고 붙어서는 지네들끼리 키득거린다. 그러다 덩치가 다른 곳으로 가면 또 따라다니면서 소란스럽다. 실컷 놀다가 계산을 끝내고 약국을 나가는 세 명 중 덩치를 유심히 보았다. '저 정도면 한 백 키로 나가나? 음..못해도 팔십키로는 나가겠지? 아유..뚱띠..살 좀 빼지. 숨 쉬기도 힘들텐데 말야. 살이 많으면 소아당뇨도 오기도 쉽고, 어쩜 혈압약도 이십대부터 먹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입고픈 이쁜 옷도 못 입을텐데 말야. 집에서 관리 좀 안 해주나?'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그리고 <아틀란티스아, 잘 가>를 펴들었고, 책 속에 나오는 뚱뚱한 아이 경실이를 만났다.  


경실이는 주로 식사를 밖에서 해결한다. 엄마 아빠가 모두 살아있고, 집이 부자임에도. 요새 얘들이 김밥나라 등에서 식사를 해결하듯 말이다. 부산 사는 울 조카들도 엄마 아빠 다 일 나가시니 지네들끼리 김밥나라 가서 저녁을 종종 시켜먹는 걸 봤더랬다. 물론 경실이는 엄마가 일을 하진 않지만 어른들 세계의 잡다한 사정 때문에 집에서 차려주는 밥을 잘 먹지를 못한다. 그래서 엄마가 손에 쥐여준 돈으로 주로 찐빵집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다행히 경실이는 찐빵을 무척 좋아한다. 팥 자체를 싫어하는 나는 진빵을 한 번도 제대로 먹어 보질 못했다. 달콤한 찐빵의 소가 그렇게 좋다는데 나는 그렇게 찐빵이 싫다. 간혹 속이 보이지 않는 빵이 보여 호빵인줄 알고 한 입 배어물었다가 팥이 들어있는 찐빵이면 입에 물었던 걸 고대로 뱉어 버릴 정도로 나는 찐빵을 싫어한다. 그래서 경실이가 좋아하는 찐빵을 찐만두로 바꾸어 읽어봤다. 그랬더니 경실이가 노발대발이다. 찐빵은 먹으면 배 속에서 별이 떠다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양파 속등이 들어간 찐만두는 별이 될 수 없다고 내게 호통을 쳐댄다. 찐빵을 계속 먹으면 살이 더 찐다는 걸 아는데도 중단하지 못하는 아이, 경실이. 찐빵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 찐빵을 먹으면서 위안을 받는 경실이. 경실이에게 찐빵의 존재는 단순히 먹는 음식 이상이다. 먹으면 뱃속에 별이 떠다닐 수 있는 음식. 그런 음식이 내게도 있었을까. 
  

경실이에게는 찐빵 말고 또 하나의 위안이 되는 존재인 일기장이 있다.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일기장. 현실의 뚱뚱하고 못 생긴 자신이 싫어진 경실이는 일기장에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미미를 사용한다. 일기장의 주인공은 경실이가 아니라 미미이다. 현실의 경실이가 울고 있어도, 거짓말을 해도, 일기장의 미미 탓이 아니다.일기장 속의 미미는 이름처럼 아름답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런 대체품은 청소년기를 겪는 이에게 누구나 하나씩 있거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감춰놓을 수 있는. 그건 일기장이 될 수도 있고, 절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다른 그 무엇일 수도 있다. 그 일기장 속에 경실이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이복언니 이야기도 적고, 딴 살림 차려 집을 나간 아빠 이야기도 적고, 상상 속의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도 했다. 현실에서의 독서클럽 친구들에게는 전혀 하지 못하는 말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아이스박스에서 꺼내놓은 색깔이 선연하게 다른 두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녹아 서로 섞이듯 사건들은 서로 섞이게 마련이고 비밀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친구들은 알지 못하는 일기장 속의 비밀 이야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경실이 입에서 튀어나와 한 방울이 섞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조금씩 조금씩 섞이어 간다.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좋았다. 뚱뚱하고 못 생긴 얼굴 때문에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엄마의 눈물에도 선뜻 다가가 위로를 해주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되고, 든든한 오빠라고 생각하는 찐빵집 오빠가 아픈 걸 알고도 걱정은 되지만 찾아가보리라는 마음을 먼저 먹지 못하고, 늘 주춤주춤, 뒷짐만 지면서 속으로만 걱정하는 이 연약한 소녀의 황량한 바람이 부는 마음에서 따뜻한 눈물같은 한 방울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 한 방울은 이윽고 친구들의 꿈과 서로 섞여 무럭무럭 자라다 크나큰 위기를 맞게 된다. 친구들은, 경실이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 꿈꾸어 오던 그 무언가를 누군가가 비웃거나 타박을 주게 된다면, 나의 꿈이 누군가에 의해 발가벗겨져 웃음을 사게 된다면, 내 꿈을 누군가가 오해해 전혀 다른 무엇가로 바꾸어놓아 공개를 해버린다면, 꿈이 협박을 당한다면, 이로 인해 다시금 외톨이의 심정을 느끼게 된다면 당신은, 우리는, 어떻게 할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언젠가 꾸었던 꿈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은 그 꿈들이
숨죽이며 누워 있는 지층일지도 모릅니다.
그 꿈의 지층을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가장 강렬했던 때,
그때의 얼굴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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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5 1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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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 1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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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 0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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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 1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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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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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 1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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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 0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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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 1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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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9 15: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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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2 0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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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4: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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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2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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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0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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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4: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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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0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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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1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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