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시대를 기억하다 - 사회적 아픔 너머 희망의 다크 투어리즘
김명식 지음 / 뜨인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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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시대를 기억하다

사회적 아픔 너무 희망의 다크 투어리즘 | 김명식 지음 | 뜨인돌

여행하면 어떤 여행이 떠오르는가? 나는 항상 여행이 이상했다. 쉬러 간다고 하면서 여행 후가 더 피곤한 느낌, 아마도 많이 경험해 봤을 것이다. 여기 왔으니, 저기도 가봐야 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고, 또 주말이 끼면 숙박비는 어떠한가? 요즘은 호텔이니 펜션이니 독박 풀빌라니... 너무도 많은 옵션이 있고, 게다가 값은 비싸다. 한번 여행이란 것을 갈라치면 각오를 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여행은 떠남이다. 낯설게 하기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낯설게 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또한 여행이 아닐까? 그리고 여행이 꼭 먹으러 가고, 좋은 경치를 보러 가야 하는가? 사진을 남기러 떠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사진조차도 핸드폰 사진첩에 남아서 언제고 사라질 텐데 말이다.

현대는 새로운 여행법이 필요하다. 최근에 텔레비전에서 다크 투어에 대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생소했다. 왜 다크란 말에 투어를 붙이는 것일까? 혹여 거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유족들은 자신들이 괴로웠던 공간 그 자체가 여행지처럼 느껴지는 것에 반감을 갖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여행지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참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나 재해의 현장을 돌아봄으로써 그것을 기억하는 것, 바로 그 기억이 유족이 그리고 희생자들이 바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크 투어리즘을 부르는 다른 말로는 블랙 투어리즘 혹은 그리프 투어리즘이 있다고 한다. 국립국어원에서 역사교훈 여행이라 지칭하고 있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재난 현장이나 참혹한 역사적 현장을 둘러보는 일은 경건하게 여겨진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여행이라고 해서 꼭 들뜰 필요는 없다. 이런저런 순간들이 여행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직까지 팽목항을 가보지 못했다. 어떤 곳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 그 사건은 현재도 진행형이니... 또 우리는 얼마 전에 그런 공간을 또 얻게 되지 않았던가... 이태원... 이제 이태원 세 글자는 더 이상 외국인 거리나 힙한 거리가 아닌 많은 젊은이들이 압사당한 참혹한 공간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같다.

책 속에 나온 공간 중 인상 깊은 곳이 바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과 지상의 서소문 역사 공원이다. 그곳에 노숙인 예수라는 작품이 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인근에서 얼어 죽은 노숙인을 기리기 위해 그의 작품에 직접 축복하고 교황청에 설치한 작품이다. 이미 여러 나라에 설치가 되었다고 한다.

벤치에 노숙인이 누워있다. 그는 머리 위까지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유독 발만 나와있다. 그 발 한가운데 보이는 상흔... 예수님의 십자가 상흔을 연상케한다. 성경 마태 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숙인 예수가 놓여있는 벤치 주변에 실제 노숙인이 있는 현실 역시 존재하는 것...

가고 싶은 여행지가 너무 많이 생겼다. 무슨 무슨 관광지가 아니라, 제주도 4.3 평화공원 내에 있는 비설, 오림 터널공원, 매헌 시민의 숲, 그루네발트역 17번 선로, 분서 기념 도서관 등 등 아...... . 이제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머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발이 기억하도록 애쓰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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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7
에밀 졸라 지음, 강충권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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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2

에밀 졸라 | 강충권 옮김 | 민음사

요즘 내가 기다리는 요일이 있다. 바로 금, 토, 일이다. 새삼스럽게 휴일을 왜 기다리는지 ㅎㅎ 하지만 다름 아니라 그날 유일하게 보는 드라마가 방영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바로 요즘 시청률 20퍼센트로 향해간다는 그 드라마...[재벌집 막내아들]이다. 나름 현실과 비교가 되고, 이미 시 시절을 지내온 사람으로 어떻게 그려지고, 주인공이 의지를 가지고 앞날을 통쾌하게 헤치고 가는지 나름 공감하면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그 드라마에 달린 댓글을 보면 좀 가관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재벌집 막내아들을 국밥집 좌파 아들로 바꿔야 한다는 댓글도 있고, 땀 흘려서 일한 돈을 왜 자식에게 물려주면 안되는 거냐?라는 댓글까지... 대한민국은 미묘하게 갈라져 있는 듯하다. 목소리 큰 사람들의 댓글은 바로 그 균열이 큰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말이다.

왜 노동자는 주인이 되지 못하는가? 왜 꼭 재벌이 나오고, 검사가 나와야지만 먹히는 소재가 되는가? 이 드라마는 노동자도 나오고, 재벌도 나오고, 검사도 나오고, 더군다나 주인공 막내아들은 재벌의 옷을 입고 태어났지만 그 태생의 뿌리를 잊지 않는 소위 말하는 좌파적인 캐릭터이다. 이 책 역시 노동자가 주인공인 탄광촌의 현실을 다루었다. 아마 책 그대로의 내용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졌다면 잘 안됐을 것도 같다. 노동자와 자본가만 있으니 말이다. 재벌, 법조인, 출생의 비밀... 뭐, 그런 양념을 좀 더 추가한다면 모를까 싶다.

최근 화물연대 파업으로 연일 뉴스가 시끄럽다. 소위 정부는 화물연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업무 개시명령을 시행함으로 그들의 요구에 협상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맞는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파업에의 강경 대응으로 인하여 정부 지지율이 상승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타협할 꺼리조차 되지 않는 것인가? 안전 운임제란 화물 차주에 대한 적절한 운임 보상으로 과속, 과로, 과적 운행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 취지의 선량함은 충분히 와닿는다. 안전 운임제의 유효기간은 올해 말까지다. 각종 규제나 효력이 일정 시간이 되면 사라지는 것이 일몰제인데, 바로 그 안전 운임제의 일몰제 폐지를 요구하는 것이 화물연대 파업의 이유이다. 왜 이렇게까지 반대해야 하는 것일까? 안전 운임제에 대해 효과를 보고 실효를 거뒀으면서도 굳이 이것을 폐지하겠다는 속셈은 뭐, 뻔히 보인다.

제르미날에서 나오는 자본가들의 속셈... 4부 7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부르주아 자본은 어딘가 신비로운 장막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이 아사지경인 사람들의 생명을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의 동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아무리 먹어도 계속 배고파하는 미노타우로스... 결국 욕망은 먹을수록 더 배 고픈 법이란 말인가? 현실의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는 과연 누구일까? 고전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상 이치를 발견하는 것은 참 통쾌하지만 한편으로는 변함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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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지음 / 온더페이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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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지음 | 온더페이지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아프다. 그 그림들은 그녀의 아픔을 말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녀의 생명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프리다에게 그림이란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아마 의미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찾는 것이 사치이지 않았을까? 그림은 바로 그녀 그 자신이었으므로 말이다.

10대 시절 그녀에게 찾아온 큰 시련은 프리다 칼로를 말하는 하나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녀의 그림 속 자화상들이 바로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니까 말이다. 전차 사고로 인해 그녀는 가슴에서부터 골반뼈로 쇠가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 있던 한 사람, 바로 친구 알레한드로... 원래 그는 사고의 그 버스를 타지 않고 다른 버스를 탔다고 한다. 먼저 온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칼로가 양산을 놓고 오는 바람에 내렸다가 다시 타게 된 거라 하니 아마 사고는 어떤 운명이 아니었을까? 아마 프리다는 그 일로 인해 알레한드로가 스스로의 운명과 엮이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1928년에 그녀 나이 21살 때 바로 그 사람을 그린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프리다 칼로 그녀 자신이다. 어쩌면 그녀는 알레한드로를 그녀와 비슷하게 그림으로써 그 둘의 운명이 한곳에 있음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칼로는 이 그림을 완성한 후에 다시 숨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45살이 되던 해 작품을 꺼내 새로운 서명을 했다. 영원한 친구의 모습을 사랑을 다해 그렸다고 말이다.

또 하나의 사건이라면 아마 디에고와의 만남이리라... 디에고와의 만남이 그녀에게 축복이었는지 저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 스스로는 축복으로 여겼음이 틀림이 없다. 그녀는 그를 너무도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물론 그 둘의 사랑을 지켜보는 제3자들은 불안 불안했지만 말이다. 결국 디에고의 바람기는 그녀의 동생에게까지 손을 뻗게 되고 그 둘의 관계에 충격을 받은 프리다는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이때에도 디에고를 잊지 못한다. 정말... 왜..라고 되묻고 싶을 만큼... 이 정도 상처받았으면 이제 그를 놓아줄 만도 하건만... 결국 1939년 그녀는 디에고와 이혼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이후로 다른 분위기의 화풍이 펼쳐진다. 어느 정도 자유로운 모습이 엿보이기도 하고 훨씬 더 주목받는 작품들은 내놓게 된다.

다시 생각해 보니 디에고란 인물은 프리다 그녀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짓을 해도 용서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의 전형을 프리다 칼로는 잉태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내보내서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비록 그녀 자신이 그의 가시 돋친 피부에 상처 입을지언정...

책 말미에 실린 그녀와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 조명에 대한 내용 역시 흥미로웠다. 마르크스주의의 위대함이 병자까지 건강하게 할 만큼 대단한 것이라는 그녀의 작품... 이로써 또 한 권의 책에 흥미가 생겼다. 좀처럼 손이 가지 않던 자본론이 갑자기 프리다로 인해 흥미로워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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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트레이 귀공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미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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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트레이 귀공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이미애 옮김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15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단 한 가지를 더 얻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내어놓는 사람... 어쩌면 어리석은 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야망이 큰 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역시 둘 다이겠지.. 야망이 크고 어리석은 사람,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을 과연 뭐라고 할까? 모든 것을 갖추고도 욕망에 이글거리는 눈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이, 한순간의 재미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날려버릴 용기? 가 있는 사람.. 그들이 유독 아끼는 것은 바로 하나, 스스로의 목숨이다. 죽음만을 두려워하는 벌벌 떠는 존재들...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 죽음이 집행유예된 상태이지만 그들에게는 현재의 시간, 쾌락이 선사하는 바로 지금 순간만이 유일하고 또 영원하다.

책 [밸런트레이 귀공자]에서 집사 매켈러가 말하는 껍데기라는 부분... 아, 정말 공감한다. 그 자신이 리처드슨의 소설 [클러리사]를 낭독하는 귀공자의 재주에 감탄하지만 그가 모든 예술작품들은 한 번도 그 자신에 결합되어 생각하지 못하는 공감 능력이 결여됐다고 판단하는 부분은 경악스러웠다. 모든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언변과 잘생긴 용모의 소유자, 순발력과 재치 등의 인간이 갖출 수 있는 모든 이점을 갖추고도 그에게 없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남들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래서 매켈러는 귀공자가 판지를 붙여서 만든 인간 같다고 했을까? 가면의 얼굴을 한 번 치면 텅 빈 공간이 드러날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고 그가 말하는 데, 이 비어있는 부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간혹 이해 안 되는 일들이 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전쟁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총을 겨누고 자신이 가진 땅을 확장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희생을 강요하거나 요구한다. 책 뒷부분의 해설을 참고하자면 아마 저자가 말하는 빈 공간은 문명의 빛을 전달하여 원주민을 교화하겠다는 인도주의적 이념으로 무장한 채 아프리카에 간 식민주의자 커츠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텅 빈 인간은 소리도 요란하다. 그들은 항상 시끄러운 꽹과리를 두 손과 양 발에 걸치고 온갖 것들을 다 끌어모으고 말도 되지 않는 것들에 스스로 의미를 붙이면서 정쟁만을 일삼는다. 그것이 그들은 유일한 생존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밸런트레이는 동생 헨리에 대한 처절한 복수와 증오심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다름이 아닌 스스로 결정하고 그가 만든 것이다. 사실 그의 방황은 그 자신의 선택이었다. 듀리스디어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명은 봉기에 가담해서 반역자의 편에 서고, 한 명은 조지왕에게 충성하는 길을 택해야 하는데 아무도 밸렌트레이에게 반역에 가담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자라는 이유로 그가 남아있길 바랐다. 하지만 이 역시 그의 선택이 아닌가? 정치적 이유가 아닌 순전히 부를 축척하고픈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서 말이다.

스티븐슨이 창조한 사악한 천재 밸런트레이...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허무하고도 어리석은 일들에 낭비하는 사람들... 미워하는 일에 시간을 쏟는 일만큼 어리석고도 불행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것만큼 생의 저주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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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카즈무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2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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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카즈무후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12

이 사람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동 카즈무후]는 예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사실을 다룬다. 책을 읽으면서도 왠지 기시감이 드는 것은 최근의 한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장동료가 자신의 아내의 성폭행 한 줄 오해하고 그다음 날로 찾아가서 흉기를 휘두른 사건이다. 후에 자신의 아내와 그 동료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이미 한 가장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했으므로 말이다. 그런 의심의 싹은 과연 어디서 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은 과연 언제인가?

책 [동 카즈무후]에서 주인공은 절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의심의 눈동자를 외부로만 돌린다. 자신의 아내 카피투, 그리고 친구였던 에스코바르... 왜 그는 스스로의 의심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책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역시 의심하게 한다. 정말 카피투가? 정말 에스코바르가? 실로 교묘하게 써 놓은 마샤두의 걸작이 아닐 수가 없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카피투가 친구였던 에스코바르의 장례식에서 흘렸던 눈물과 눈빛, 바로 그것이 의심의 시작이자 하나의 트리거로 작동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에서 느껴지는 친구 에스코바르의 무언가... 아마 이것은 그에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을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 벤치뉴의 시선에서 씌었다. 그의 아내 카피투의 말도, 그의 친구 에스코바르의 변명도 없다. 아내는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변심에 말문을 닫았으며 친구 에스코바르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오직 그에게 증거는 아들이었다. 아들 에제키에우의 모습만이 그에게는 불변의 진리다.

오늘날에는 정확한 유전자 검사가 있으니 이를 가릴 수가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검사가 없었으니 오직 생긴 대로 판명했을 따름이다. 사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나라 소설 중에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화자는 생식능력이 상실됐는데 이를 숨기고 결혼을 한다. 곧 이은 아내의 임신... 화자는 아내가 낳은 아기가 자신의 핏줄이 아님에도 발가락이 닮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인가? 서양에서는 다른 점을 찾기 바쁘지만 동양에서는 비슷한 점을 억지스럽게 찾아낸다. [동 카즈무후]의 주인공 벤치뉴는 밀어냄을 택했다. 그의 의심은 아내를 밀어내고, 아들을 밀어냈다. 그는 그 덕에 후련하고 속 시원했을지 모르나 그 외의 사람들은 불행했다. 특히 타지로 쫓겨나 외롭게 죽은 아내 카피투를 생각하면 그의 행동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 수 있다. 반면 김동인 소설 속 화자는 스스로에게 장막을 쳤다. 스스로 잘 못 안 거라고, 진실조차 외면하는 방법을 쓴다. 그 결과 스스로는 곪아버렸을지 모르나 외부로 그 상처가 삐져나오지는 않았다.

에제키에우란 선지자 에스겔의 포르투갈 식 이름이라고 한다. 에스겔서에는 이런 대이 있다고 한다. 부모의 죄는 아이들에게 대물림 될 수 없으며 스스로의 죄는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춘기 시절의 벤치뉴, 변호사 시절의 벤투 산치아구, 그리고 마지막 의심과 분노의 시절인 동 카즈무후... 과연 어떤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이었을까? 그가 진정으로 살고자 한 시절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과 가까웠을까? 삶의 모습은 결국 스스로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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