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들
신주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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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들

신주희 소설 | 자음과 모음

삶이란 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열심히 발을 저어서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삶과 생존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어찌 보면 세상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끊임없이 목표가 있다. 그리고 그 목표 설정을 이루지 못하면 게으르다고, 삶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질책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느덧 빚쟁이가 되어있다. 하루 하루는 이루고 싶은 목표가 아닌 이뤄야 하는 목표들로 빼곡하다. 그 틈에서 달력에 동그라미 혹은 십자표를 한다. 매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 그 죽음의 골을 재빨리 당기고 싶어 하는 듯, 우리는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싶어 한다.

허들의 주인공인 나는 매일 유서를 쓴다.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되뇐다. 어릴 적부터 아들에게만 모든 것을 쏟은 가정 내에서의 부당한 위치, 커서 스스로의 유학을 결정하지만 그것도 온전하지는 않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그녀는 조금의 돈이라도 (물론 아버지의 부탁으로) 되찾기 위해서 아버지와 채권자와 채무자의 위치로 만난다. 사촌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뿐인 집을 외숙모에게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던 형편, 스스로 같은 처지라고 여기고 동정했던 언니가 편안하고 안온한 삶을 위해 거짓을 선택하기로 했을 때의 먹먹함 등등의 소회를 그녀는 이제는 돌아가시고 없는 어머니를 향한 편지글 형식으로 풀어놓는다.

매일매일이 원치 않는 허들을 넘는 것이 일상이라면 어떻게 살아갈까? 하지만 일상이라는 것이 요즘은 그러한 것 같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은 해봐야 하지 않느냐면서... 각종 SNS에 올라오는 모든 것을 따라 하려는 삶... 그들이 사는 것들, 그들이 먹는 것들, 그들이 가는 것들을 답습하고 그 허들을 넘지 않으면 스스로 도태되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스스로가 만든 것일 뿐인데 말이다.

요즘 나는 배우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배워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이제는 배움의 종류를 좀 달리하고 싶다. 사회적 잣대와 기준에서의 배움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것들... 알고 보니 세상엔 어리석은 배움도 많았으니까... 사실상 안 배워서 좋은 것들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나, 어서 빨리 벗어나고픈 순간이 오면 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허들의 주인공처럼 매일 숨을 참고 유서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날 것을 되새긴다. 그러면 어느 정도는 마음이 편해진다. 삶이 괴로울 때는 그 생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 생이 길어서인 경우가 많으니까...... . 지금 사라질 것을 안다면 내게 높게 다가오는 삶이라는 허들도 사실상 별것이 아닌 것이 되리라... 어차피 넘어야 할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허상이었을 뿐... 텔레비전도 끄는 순간 모든 것이 조용해지듯이, 휴대폰 역시 끄는 순간 남의 일상 엿보기가 멈춰지는 것처럼, 오히려 그때 진짜 넘어야 할 나라는 허들이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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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처 마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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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처 마틴

윌리엄 골딩 | 백지민 옮김 | 민음사

오랜만이다. 이처럼 읽기 힘든 책은 말이다. ㅎㅎ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으로 읽어내려가야겠다. 한번 읽었으면 그냥 흘려보내야 했다. 그래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느낌이랄까?

소설 전체가 핀처 마틴의 주마등이라는 것은 아는 것은 꽤 뒷부분에서였다. 그만큼 소설은 그의 의식과 무의식, 상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오가면서 독자에게 제정신이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독자에게 현실감각이 오는 순간은 핀처 마틴이라는 캐릭터를 벗어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결말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꽤 불만을 표시했다고 들었다. 극중 진도준이라는 캐릭터를 응원하고 그의 나름대로 복수에 대한 통쾌한 결말을 바랐는데 결국 윤현우의 꿈이었다고 말이다. 사람마다 판단하기 나름이겠지만 난 드라마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윤현우의 일주일 남짓의 시간이 진도준으로 산 17년이었다는 설정은 꿈이 아니라 왠지 꿈의 현실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찌해도 진도준은 결국은 윤현우 였으니 말이다. 이는 윌리엄 골딩이 말한 핀처 마틴이 죽음에 걸리는 시간과도 유사한다. 바로 영원이라는 시간... 핀처 마틴이 죽기까지의 시간이 영원히 걸린다는 골딩의 말은 끔찍하기도 하고, 인간 정신이란 것이 무엇인지 사유하게도 한다.

골딩은 핀처 마틴을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불쾌하고 못된 인간으로 만들겠다고 했으나 후에 평론가들이 인간의 모습이 뭐 다 그렇다고 했다고 한다. 골딩은 이 말을 무척 흥미로워했다고. 골딩이 만들고자 했던 핀처 마틴은 유독 그와 닮아있다. 아마도 골딩은 핀처 마틴에게 자신의 약하고 악한 모습을 투영했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에게 영원과도 같은 주마등을 선물한 것이 아닌가?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잘못들을 그 시간들을 통해 사죄하고 반성하길 바랐던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 주마등 같은 순간을 통해서 살고자 하는 집착 그 자체가 오히려 삶을 방해하고 오랜 시간을 고통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소설 속 핀처 마틴의 캐릭터는 인간성에 있어서 몹시도 타락한 인물이다. 그는 강간도 서슴지 않게 저지르고 반성하지 않으며 심지어 마음을 먹는다면 살인까지 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살인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아쉬워하고, 변명하기까지 한다. 핀처 마틴이 말하는 주석 상자 속의 최후의 구더기... 어쩌면 그는 다른 구더기들을 먹고 성공해서 최후의 일인이 되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세상사는 그런 거라고, 만사가 먹고 먹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살고자 했다. 최후의 구더기도 결국은 잡혀 죽고 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세상에는 유독 스스로에게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의 고통에 그들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치를 떠는 그런 부류.... 그에게는 자신의 몸이 전부이다. 자신의 세상이 전부이다. 그 외에는 없다. 누구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 따위는 아마 사치일 것이다. 하지만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 또한 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죽는 일부터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핀처 마틴처럼 영원한 주마등으로 고통받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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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인간혐오자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5
몰리에르 지음, 김혜영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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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혐오자

시카고플랜 005 | 몰리에르 | 김혜영 옮김 | 미래와사람

단숨에 읽어내려갔던 몰리에르의 인간 혐오자... 읽을수록 왜 나의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지 모를 일이다. 나도 한때는 이런 인간 혐오자였다. 물론 지금도 어느 정도는 남아있지만.. 하지만 이제는 약간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나의 부족함을 볼 줄도 아니 남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고나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인간 그 자체를 좋아하거나, 좋게 보는 성향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극중 주인공인 알세스트에 감정이 이입되면서도 동정이 갔다.

몰리에르의 희곡 [인간 혐오자]에는 뚜렷한 인물들의 성격들이 나온다. 우선 알세스트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내 생각에는 유독 한 사람에게만은 예외인 듯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필랭트...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맞출 줄 안다.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있고, 비판도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알세스트를 이해하는 내가 보기에는 극중 등장인물 중 가장 제정신 같다고나 해야 할까? 그리고 그가 연모하는 여인인 엘리앙트가 있다. 그녀는 알세스트의 성격을 좋게 보고 그를 좋아하지만 알세스트에게는 사랑에 빠진 여인 셀리맨이 있다.

시종일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희곡 [인간 혐오자]... 극중 본인들은 괴로울지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들에게는 묘한 풍자의 느낌이 있어서 무척 재미있었다. 특히 알세스트와 오롱트의 소네트에 대한 이야기는 압권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생각에도 오롱트의 그 소네트는 무척이나 형편없었지만 그 형편없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이야기하는 알세스트와 누가 보기에도 아첨하는 듯한 필랭트의 평가는 웃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알세스트의 악평에 빈정이 상한 오롱트가 후에 한 일들은 정말이지 속 좁은 남자란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었다.

아무래도 알세스트의 짝은 셀리맨이다. 셀리맨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알고 보면 알세스트와 같은 인간 혐오자이다. 그녀에게 딱 맞는 완벽한 인물은 없다. 알세스트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어찌 보면 알세스트와 셀리맨이 사람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하지만 스스로에 대해서 만일 누가 그런 판단을 한다면 아마도 참을 수 없어하는 성격이리라...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이에게는 그 결점이 유독 커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 결점은 장점에 비하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는 후에 엘리앙트가 사랑에 빠진 연인의 특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잘 나타난다.

또 한 가지 이 희곡에서 볼 만한 장면은 바로 셀리맨의 무절제함을 친구로서 직접 충고하러 온 아르지노에의 등장이다. 셀리맨과 아르지노에는 누가 먼저라도 할 것 없이 서로에 대한 힐난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처음에는 우정으로서의 충고가 후에는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붉히게 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지는 장면... 특히나 여기서 셀리맨의 말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ㅎㅎ

아마도 최종적으로 이 극의 승자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필랭트와 엘리앙트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혐오를 견디다 못해 먼 나라로 떠나려고 하는 알세스트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자는 아마 필랭트 뿐일 것이다. 필랭트의 말처럼 세상이 변하려면 사람들이 아예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 결점으로 인해 철학을 수행하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는 필랭트의 말은 다시금 곰곰이 인간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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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우샤오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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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우샤오러 장편소설 | 강초아 옮김 | 한스미디어

살면서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론화되어야 하지만 아직도 그렇지 못한 불편한 진실들이 있다. 바로 성에 대한 문제, 특히 여성들의 성문제이다. 만일 성인 여자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 여자아이의 일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공론화되기도 쉽지 않고, 그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미스터리는 작가 우샤오러가 스물세 살 때 본 다큐멘터리로부터 출발한다. 영화 공부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된 미국 다큐멘터리 [패밀리 어페어]... 한 아버지가 딸들을 어린 시절부터 성폭행하는 이야기를 담은 다소 패륜적이고 끔찍한 다큐멘터리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비극적인 점은 그 딸들은 성폭행의 가해자를 오히려 걱정하고, 그중 한 명은 오히려 아빠가 밤에 찾아오길 기다렸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들의 성기는 장난감으로 치부되어왔다. 할머니들이 흔히들 고추를 보고 장난을 치면서 한번 달라 하고, 여름 내내 어떤 남아들은 집에서는 성기를 노출해놓고 다기기도 한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성기에 대해서는 모두들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냥 소중히 해야 한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이야기를 해줄 뿐이다. 여자아이의 성기는 남자아이의 성기와 다른 취급을 받는다. 남아들의 성기는 장난감이지만 여아들의 성기는 스스로가 지켜야 할 그 무엇인 것이다.

소설은 판옌중의 두번째 아내인 우신핑의 실종에서 시작한다. 판옌중에게는 상처가 있다. 전 결혼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알지 못했던 면을 본다. 바로 폭력성이다. 아내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아내의 다소 잘못된 의사소통 방식에서 오는 오해 등등으로 인해 어느 날 판예중에게 아내가 물건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아내의 입을 닫기 위해서 그는 물건을 던지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 장면을 딸아이가 보게 된다. 이러한 상처가 있는 판옌중에게 우신핑은 어떤 구원의 존재였다. 사랑해서가 아닌 옆에 있는 존재, 외로움을 달래줄,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존재로 우신핑은 판옌중에게 딱 맞는 짝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신핑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내에게는 그가 알지 못한 과거가 있었다. 하나 둘 아내의 과거를 풀어가면서 그녀를 둘러싼 이웃들의 다소 엇갈린 증언들을 들으면서 소설은 독자를 책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과연 피해자와 가해자란 누구인가? 그리고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일까? 왜 사회는 그것을 강요하는가? 여성은 왜 자신의 몸과 성에 대해 말을 못 하게 됐는가? 등등의 새로운 의문점이 들게 한다.

작가 우샤오러가 책 말미에 남긴 작가 후기는 감동적이다. 그녀는 말한다. 여자 주인공들의 얼굴을 지켜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자신의 얼굴을 돌려주는 일, 소녀에게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하고 그 감정을 끝까지 들여다보게 하는 일... 피해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피해자를 손가락질한다. 평소 옷매무새를 좋게 하지 않고 다녔다거나, 그를 좋아했다거나, 꼬리를 쳤다거나 등등 이유를 갖다 대면서 피해자가 느꼈을 수치와 고통에 찬물을 끼얹는다. 우리 사회 지도층이 생각하는 성폭력에 대한 인식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파가 좌파보다 성에 대한 문제가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돈으로 잘 해결을 봐서 그랬다는 누구의 이야기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샤오러는 말한다. 여성들은 모두 자기만의 성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타인이 그들을 위해 이렇다, 저렇다, 이러해야 한다, 저러해야 한다 하면서 그들만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옳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이야기를 공론화하고 완성시켜야 한다. 모두 자신의 얼굴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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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7
에피쿠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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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

에피쿠로스 |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쾌락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이 나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좋은 곳을 구경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한때 등등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육체적인 쾌락은 진정한 쾌락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진정한 쾌락이란 무엇일까?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시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가 쇠퇴하던 시대였고, 알렉산드로스가 이끌던 마케도니아가 세계를 통일했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시민들의 삶은 피폐했으며, 궁핍한 시절이었다. 이런 시대에 왜 그는 쾌락을 말해야 했을까? 이 책을 읽으니 에피쿠로스는 자연과학, 원자론, 우주론 등등의 철학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학문을 늘리기에 열심인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으로 그에게는 적도 많았다. 감히 신과 대적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인간이라면 의당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가들 등등은 아마도 에피쿠로스에게 모진 말을 하면서 그의 학파를 반대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키케로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폭풍처럼 로마를 집어삼켰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철학을 비하하고 비판했다. 내 생각에 에피쿠로스의 쾌락론은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평생을 전쟁으로 고생하고, 먹을 것도 풍족하지 못한 시대에서 태어나서 고생만 하다가 죽어가는 삶은 그가 생각하기에는 선이 아니었다.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를 말했다. 그는 진정한 쾌락이란 바로 정신적 방황과 육체적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칭했다. 그것이 바로 아타락시아를 뜻한다. 그가 말하는 아타락시아는 절대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거나, 좋은 곳을 구경하거나, 행여 연인 간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아니었다. 에피쿠로스는 평생을 작은 빵 한 조각에 물 한 모금으로 하루 식량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배고픔이 해결되니 그것으로 족하고 마음 또한 평온하다고 말이다.

얼마 전에 재벌 3세들이 대거 마약으로 적발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극단적인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다가 절망으로 빠진 사례이다. 육체적 쾌락이 극대화된다면 그것은 고통뿐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다 보면 질리고, 더 이상 먹기 힘든 것처럼, 마약으로 추구되는 육체적 쾌락의 결말은 고통으로 회기 된다.

에피쿠로스는 아마도 그가 살았던 당시 수많은 악플에 노출된 사람이리라... 신에게 반기를 듣다고 다들 여겼을 테니 말이다. 19세기 근대에서 에피쿠로스를 계승한 학자는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그는 자유론을 통해 남녀 불평등을 이야기했으며, 자유론의 첫 장에는 이 책은 내 것이 아니라 그녀의 것이라는 다소 애틋한 말을 남겼다. 에피쿠로스의 영향력은 후에 공리주의로까지 미쳤다. 나의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을 그 속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사람들... 공감의 능력인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들은 정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는 [방랑자여, 여기는 그대가 머물 좋은 곳]이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고, 쾌락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고통을 멀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구는 이미 모든 인류가 나눠갖기에 충분한 음식과 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곳에서 독점함으로 피가 안 돌듯 물자가 돌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한곳에서 충분한 음식이 남는다면, 다른 한곳은 부족한 것이다. 제로섬 게임처럼 말이다. 스스로가 오늘날 부유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닌, 그 부유로 인해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2023년이 되는 것은 어떠할까? 그렇다면 충분히 밥 한 공기, 따뜻한 잠자리만으로도 아타락시아 늘 느끼면서 감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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