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서유럽 -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쏜살 문고
밀란 쿤데라 지음, 장진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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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서유럽 -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밀란 쿤데라 | 장진영 옮김 | 쏜살 문고 | 민음사

이상하다. 뭔가를 예견한 글은 그 전파속도가 현저히 빠르거나, 아니면 상대적으로 느리다. 이 글 역시 내게는 그러하다. 다 알면서도 말하기 힘든 진실을 에둘러 말하거나, 진정성 있는 무엇을 전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 진정성이 다른 의미로 훼손되는 느낌... 그래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진실의 상념, 아니 그 시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온통 널려있는 느낌이다.

강대국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변방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비행기로 인해 여정의 길이가 짧다면 하루, 길면 삼일도 안되어 네 나라가 곧 내 나라가 될 수 있는 지금에도 우리는 서로의 영토를 탐하면서 야금야금 먹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방송에서 7광구란 것에 대해 들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협약에 의해 공동 개발하고자 했던 천연자원의 보고, 유전이 있을 지도 모를 그곳... 그 7광구가 시간이 흐르면 조만간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소유로 국제적 약정에 의해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7광구는 영화로만 봐서 그 의미를 알지, 원래 본래의 존재를 잘 몰랐던 나로서는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그 영토가 우리 관할이었지만 본디 개발 비용 등의 막대한 자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일본과의 협약을 통해 공동 개발코자 했다는 것... 그리하여 공동으로 시추선을 띄우고 나름 탐사를 위해 애썼지만 그 성과가 빨리 안 나온 고로 일본은 조기 철수를 했다는 것 말이다. 7광구, 사실상 어떤 자원이 숨겨진 보고의 땅인 그곳이 사라질 위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만일 그곳을 우리와 손을 잡지 않고 따른 세력, 호시탐탐 이곳을 엿보고 있는 중국과 손을 잡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한다. 만일 중국과 손을 잡고 그곳을 개발한다면 대만과도 가까워지는 셈이니 대만의 불안은 아마 가속화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돌고 돈다. 그리고 하나를 결정하더라도 헛되이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책 [납치된 서유럽]은 밀란 쿤데라의 연설문이다. 꽤나 격정적인 그의 연설을 통해 거대한 나라들에 둘러싸인 약소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설움을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점은 우리나라를 생각나게 했고, 더 지엽적으로는 현재 나라 없이 난민 신세로 떠돌고 있는 로힝야족을 생각나게 했다. 그곳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산다고 해서 그곳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지금이 아니다. 사실 땅과 하늘에 실금이 어디 있는가? 만물에 주인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인간은 하늘에도, 땅에도, 바다에도 줄을 쳐놓았다. 그리하여 그곳을 넘어오면 총과 칼로 위협하고, 몸뿐만 아니라 그 정신마저 소유하려 안간힘을 쓴다. 체코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체코어... 밀란 쿤데라는 가장 민족적이고 지엽적인 것의 세계화를 말한다. 그 다양성을 말한다. 결코 강대국에는 흡수되지 못하는 민족성을 말하고 있다.

과연 러시아에 통합되면 그 민족이 위대한 슬라브족이 되는 것일까? 과연 러시아에 통합되면 위대한 러시아 문학에 한 발을 담근 것인가? 저자는 말한다. 모든 것은 소멸의 길을 걷는다고 말이다. 말하자만 문화의 실종이다. 천안문 사태가 떠오르고 급기야는 분서갱유라는 급진적 사상의 통합 책마저 떠오른다. 이 일이 과연 남의 일인가? 지난 일인가? 우크라이나의 절멸을 부르짖는 러시아의 행보는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쿤데라의 연설은 바로 지금, 현시점을 향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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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창 탐정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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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창 탐정

나카야마 시치리 장편소설 | 문지원 옮김 | 블루홀 6

그러면 모두를 구할 수 있어?

349 페이지

과연 나카야마 시치리다. 아니, 새로운 시리즈의 새로운 탐정이 과연 역대급이라 할만하다. 인면창 탐정이라니... 시치리가 아니고선 이처럼 대담한 캐릭터를 창조할 작가가 또 누구인가? 그리고 이처럼 시니컬하고, 명석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파는 가슴 아픈 말을 잘하는 캐릭터라니... 그것도 자신에서 기생하는 생물이 바로 그 숙주에게 말이다.

책을 덮고서도 계속 읽고 싶어졌다. 특히 인면창 탐정의 말을 계속 듣고 싶다고나 할까? 숙주의 입장에서는 다소 고통스럽겠지만 미쓰기와 연신 주고받는 그 티티카카는 단연코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기생하는 입장에서 모든 정보는 바로 그 숙주에게서 나오지만 숙주의 기억력은 몹시도 짧아서 그 모든 지혜와 지식은 오로지 기생하는 이에게 흡수된다. 여기에서 인면창 탐정의 기가 막힌 추리가 나온다. 바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기억력을 백 프로 활용해서 말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몹시도 단순하다. 오랜 시간 고리타분한 방식을 고수하면서 가부장적 사고에 익숙해진 한 기업의 오너가 죽으면서 남겨진 유산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살인사건을 보면 누가 가장 큰 이익을 얻게 되는지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마도 그 가문에서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끔찍한 진실이 나오게 된다. 복자에 관련된 사연들이다. 왜 그 당시에 지체장애아를 복자라고 칭하고 유독 아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게라도 해야 키울 수 있었던 환경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체장애아를 지체장애로만 보고 타지에 유기하거나 양육을 의무를 게을리하면 그것도 천명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필연적인 양육의 이유를 만들어야 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대를 이어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근친상간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소설 속 화자인 상속 감정사 미쓰기가 혼조 가문에 도착한 즉시 그다음 날부터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는 과연 복신인가 역병 신인가? 혼조 가문의 변호사인 히라기의 입장 변화는 참으로 재미있다. 미쓰기가 몰리브덴 광산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그는 미쓰기를 역병신이라고 말한다. 바로 미쓰기가 옴으로써 혼조 가문이 들쑤셔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미쓰기가 사건의 발단이었을까? 소설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는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혼조가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이 트라우마로 작용해서 바로 현재의 결과가 일어난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인물이 죽은 마당에 지난 일을 반성하거나 뉘우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비극이 미쓰기의 도착과 맞물려서 문제지만 말이다.

난 미스기야말로 혼조가의 복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미쓰기에게 기생하는 인씨에 의해서 세상 밖으로 드러날 뻔한 혼조가의 추악한 진실이 덮어졌으니 말이다. 마지막 인씨가 말한 모두를 구한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죽은 사람이든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든 그 모든 이를 구할 수 있는 것,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덮어버리는 것,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그저 한 가문의 비극으로만 치부될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그 구함을 미쓰기와 인씨가 이뤘으니 말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묻어버리는 것이 스스로를 구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다시 깨닫는다.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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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 세상을 읽는 데이터 지리학
제임스 체셔.올리버 우버티 지음, 송예슬 옮김 / 윌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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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제임스 체셔, 올리버 우버티 지음 | 송예슬 옮김 | 윌북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애플망고가 많이 재배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최고 북단으로는 파주에서도 애플망고가 재배된다고 하니 말이다. 애플망고라 함은 고급 과일로도 잘 알려져 있고 비교적 타 과일에 비해 비싼 과일로도 알려져 있는데 아열대성 기후에서나 잘 자랄 법한 그 망고가 우리나라에서 재배된다니... 물론 아직은 시설 재배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 달린 기사는 이러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아열대성에 들어섰고, 경북 등지에서 사과 생산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지구가 위기다. 아니, 바로 인간이 위기이다. 이 책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은 바로 그런 보이지 않는 위기를 보이는 데이터, 통계로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래도..? 이렇게 보이는데도? 앞으로 대비를 하지 않을 건지? 지금 기후 위기로 인해 지구는 멸망 몇 초전인 최후의 시계로 향하고 있고, 시시각각 호수는 말라서 사막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은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화염을 들고 총기를 들고 일어선다.

근례의 사건으로는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족 탄압을 데이터적 수치로 볼 수 있다. 로힝야족이 미얀마 땅에 정착한 시기는 무려 천년도 더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얀마 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 미얀마는 더욱이 쿠데타로 인해 치안 불안 국가가 되어있다. 미얀마 군인들은 로힝야족의 거주지를 무차별 공격하면서 그들이 난민이 되길 더욱더 부추기고 있다. 로힝야족이 난민촌을 더 안전하게 느끼는 이유는 당연한 것이다. 미얀마는 로힝야 족이라는 집단을 아예 인종청소의 수준으로 탄압하고 있으니 말이다. 파괴 정도로 구분한 로힝야의 거주 지역과 그들이 사는 난민촌 위치를 지도로 추적해서 보니 가히 놀라웠다. 난민촌은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포화상태로 변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이 쏟아부은 어마어마한 폭탄은 어떻게 지구를 파괴했을까? 미국 대통령의 음성을 녹음한 녹음본은 그 처참한 상황, 충격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무조건 날릴 수 있는 걸 죄다 그곳으로 보내 다 부숴버리자고 말한다. 범위나 예산의 한계는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전쟁이 길어지자 닉슨 대통령은 폭탄을 캄보디아에까지 투하할 것을 지시한다. 베트남 전쟁 이후 캄보디아 내전 때 심은 지뢰를 포함한 미 폭발물로 지금까지 2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아직도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그 악몽이 되풀이된다. 무려 340만 번 가까이 전투기가 비밀리에 출격되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지뢰와 폭탄이 베트남 땅과 캄보디아 땅에 아직도 묻혀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을 통해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광범위하게 데이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에필로그부터 함께 읽기 좋은 책의 목록까지 이 책은 친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꼭 알아할 보석 같은 데이터의 힘이 이 안에 숨겨져 있다.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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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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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에라스무스 |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어리석음의 신이야말로 위대하다. 책의 제목을 본 순간 그 우신의 위대함을 이해할 것 같았다. 왜냐면 이 세상 도처에서 어찌 보면 반쯤 미쳐있지 않고서야 살기가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어쩌면 시대를 앞서 간 사상가이자 풍자가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원래 어리석음의 바탕이 된 인간의 삶 자체를 그야말로 명쾌하고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말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결혼에 대한 부분이었다. 결혼에서 우신의 역할이란 서로를 사랑스럽게 보이는 역할을 한다. 결혼 전 서로의 일들은 모두 감춰둔 채로 말이다. 개차반으로 살았더라도 상대방에게서는 진실한 여자와 남자로 보이게 한다.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합쳐질 사람들이 과연 누가 있을 것인가? 아마 기겁을 하면서 서로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누구는 물론 결혼한 후에도 기꺼이 도망을 치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재앙 같은 인생일지라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신 덕분이라는 말... 그야말로 공감한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시련의 연속이다. 우선 나도 알지 못하는 부모에게도 태어나야 한다. 그 부모가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이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떤 부모는 짐승보다 못한 이도 있으니 그야말로 복불복의 삶이다. 그리고 고된 학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귀가시간을 보면 가히 밤 10시는 기본인 것 같다. 무슨 학원을 그렇게 많이 다니는지 눈이 팽팽 돌 정도이다. 그렇게 가르쳐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저만 아는 사람이 될 확률도 많은 것도 문제이다. 모두가 다 자기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있으니 나중에 부모는 찬밥이 된다. 그나마 찬밥이라면 모르겠지만 존재의 이유를 끝없이 갈망하며 하루 종일 오락과 소비로 이렇다 할 경제적 자립이 없는 어른으로 자라는 자식을 두는 것은 더욱더 큰 문제이다. 재산 축내면서 부모의 등에 찰싹 붙어서만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으로 오호라 통재이리라...... . 아마 우신이 없었더라면 이런 삶 속에서 누가 일분일초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나마 빨리 잃어버릴 수 있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어리석어서 이런 유한한 삶 속에서 간헐적 기쁨을 그나마 누리는 것 아니겠는가? 우신에 대해 찬양할 일이다.

선생에 대한 우신의 지혜 역시 놀랍다. 저자는 말한다. 학교란 생각을 팔아먹는 상점 또는 학생들을 짓찧어 가루를 만드는 방앗간이자 형장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선생은 우신 덕분에 최고의 인간이 된다. 형장에서도 우두머리 격인 사형집행인이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모른다.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을 갉아먹으면서도 교육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체벌도 서슴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우신의 시대였다. 선생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지루하고 썰렁한 시를 읊조려도 칭송하는 관객이 존재한다. 칭송하지 않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는 누군가가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무척 대단하다고 착각한다. 역시 우신이다. 우신이 없었더라면 선생이란 애초에 사라질 직업군이었다.

아... 우신의 시대여... 당신을 향한 예찬은 인간의 멸종까지 계속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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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 지혜 (국내 최초 스페인어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6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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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 김유경 옮김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자 그라시안은 사람은 운보다 미덕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지독히 운은 없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이토록 주옥같은 명언들을 남겼음에도 그의 말년의 모습은 초라했으니 말이다. 교회의 허락 없이 책을 출판하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고 교수직까지 해임됐으며 계속해서 감금과 감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라시안의 시대에는 교회의 말이 곧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책에는 오히려 종교적 언급이 거의 없는데 내 생각에는 아마 이것이 그에 대한 교회의 오해의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생각한 근본, 근원적인 삶의 방법과 투쟁에 교회에서 내세우는 권위와 실체 없음은 오히려 그의 학문에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가늠해 본다. 결국 그라시안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겪다가 그의 나이 57세에 숨을 거둔다. 하지만 교회에서 그의 저서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나 보다. 이렇게 버젓이 현대에까지 전해져왔으니 말이다.

1601년에 태어난 이의 저작물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다 소용되는 말이라는 것이 놀랍다. 시대를 떠나서 사람이 사는 일이란 비슷한가 보다.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또 사랑하고 존경하고 믿으면서 얽히고 다시 풀어지면서 한 세상을 산다. 그라시안이 말하는 주제들은 지금도 유용한 인간의 처세술이라 할 만하다. 유머가 살아가는 데 상당히 중요하는 말, 그리고 스스로의 작은 실수는 용서해 주라는 말, 좀 거리가 있는 관계가 오히려 오래간다는 말 등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것 중 가장 재미있었던 대목은 혼자 미치는 것보다 다수와 제정신인 것이 낫다는 대목이었다. 혼자 제정신이라면 미친 사람 사이에서는 미친 이가 될 수 있다는 것,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인간관계에서 천진난만한 솔직함은 자기 집안에서까지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 솔직함이 단순함이 되거나, 현명함이 교활함으로 변질돼서는 안된다는 저자의 말은 깊이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라시안의 글들은 결코 개인의 영리와 성공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선 사람이 돼라 한다. 미덕을 갖춘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성숙이 곧 사회의 성숙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 한 사람 수신제가를 한다면 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라시안의 글들은 바로 그 개인의 수신제가를 말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고 수신제가를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치국평천하는 저절로 따라올 테니 말이다.

요즘같이 시국이 심란한 때를 본 적이 없다. 한 달, 하루 매일이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그리고 더욱이 얼마 전에 일어난 대형사고까지 말이다. 국가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성숙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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