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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 Sentimental Travel
최갑수 지음 / 예담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텐데 / 최갑수 ㅣ 달 ㅣ2010>를 통해서 알게 된 시인 '최갑수'
그 책 속에는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 올리게 하는 장소가 소개되었다. '서울 청파동 만리시장길'
청파동은 내가 한 살 때에 이사를 한 곳이다. 높은 축대가 있는 집이었는데, 이 집은 아버지가 땅을 사서 지으신 집이다.
아버지가 소유하셨던 최초의 집인데, 그 집을 지을 당시에 집을 짓고 아직 축대를 쌓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 높은 언덕 위에 예쁜 꽃이 피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나는 아장 아장 걸어가서 그 꽃을 만지려고 하다가 아래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놀란 엄마가 뛰어 왔을 때는 이미 나는 그 아래로 떨어지고...
그런데 운명처럼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아래에 계시던 아저씨가 나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아주 높은 곳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그 높이는 아마도 4~5 미터는 되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서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해 5월까지 살았으니, 나의 성장기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을 책에서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최갑수의 <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텐데 >에서는 청파동에서 만리 시장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곳은 엄마따라서 가끔씩 가던 곳이기도 했고, 그 길의 갈림길에 효창공원이 있어서 여름날에는 가족들이 산책을 가던 길이기도 하다.
지금은 낙후한 청파동, 효창동이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서 일본식 가옥과 정원이 딸린 운치있는 집들이 많은 동네이기도 하다.
<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텐데 >에 실린 사진 중에서
나의 독서편력은 이 책을 계기로 '최갑수'의 글들에 꽂혀 버리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 나도 시인처럼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
그러나 그 외로움이 싫다기 보다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독인 것같은 그런 느낌.
그 고독 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것만 같은 생각.
미움도, 불만도, 불행도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감정들일 것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난, 그의 책들을 한 권, 한 권 읽어가게 되는 것이다.
< 사랑을 알 때까지 걸어가라>를 읽었고, 이번에 <당분간 나를 위해서만>을 읽었고....
또 < 당신에게, 여행을>을 읽으려고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최갑수 시인 (1997년 문학동네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의 포토 에세이이자 감성 에세이들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원래 사진찍기를 좋아했을까?
'인생이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일간지와 잡지사에서 일하게 되는데, 우연한 기회에 여행전문기자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프리랜서 여행작가이다.
카메라라고는 만져 보지도 않은 그가,
여행이라고는 떠나 본 적도 없는 시골 촌놈이,
여행전문기자가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우연이었던 것이다.
" 내 손에 카메라가 쥐어진 것은,
내가 길 위에 서게 된 것은,
내가 그 음악을 듣게 된 것은,
내가 너를 만나게 된 것은....." ( 작가 소개글 중에서)
시인의 글은 시인다운 감성이 뚝뚝 떨어진다. 사진은 눈에 확 들어오는 사진이라기 보다는 초점이 맞지 않은 듯, 아니면 비에 적은 듯, 은근하게 다가오는 그런 사진들이다.
그래서 그의 책을 한 권만 읽었어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언젠가 이 책을 읽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의 내용도, 구성도 비슷비슷하다.
그래도 독자들은 그런 그의 책에 중독이 된 듯하다.
<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은 2007년 3.30에 초판 1쇄에 들어갔는데, 2012년 8.17일에 벌써 초판 25쇄이다.
책제목부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아닐까?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우리에게 이 말은 '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 아닌가.
내가 지금 당장 '나를 위해서만' 이란 생각을 행동에 옮긴다면, 우리집은, 내 직장에서의 업무는...
당장 지구가 'all stop' 할 것같은 이 불안감.
그러나 그건 기우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역시 나도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 아직도 그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 우리 모두는 정말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다가올 불행한 날들이 두려워졌을 정도니까
그런 날들이 우리 기억 속에 분명 하루쯤은 존재하고 있다.
그 하루의 향기가 불행한 날을 잊게 만든다. " (p. 47)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가오는 지독한 외로움.
마음이 푹 꺼질 것만 같은 슬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져야만 했던 아픔.

"목련이 피고 짐은사랑과 꼭 닮았더라.
툭툭 꽃망울 터트리며 환하게 피다가
검은 꽃잎 낭자하게 뿌려놓고 지듯
사랑도 그러하더라.
필 때는 담장 너머 아득한 거리에서 피다가
질 때는 발에 질끈 밟히며 걸음을 서성이게 하더라." (p. 137)

시인의 사진처럼 흔들리면서도 외롭지만 외롭지 않고,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그런 감정.
그래서 이 책은 읽으면서 '생각에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센티멘탈해지는 책이라고 표현하면 적확할까?
"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어야 하는 것만큼 센티멘탈한 일은 없어," (p.27)
그리고 더 확실한 것은 저자 자신은 '여행중독자'인 것이다.
" 여행은 아스피린처럼, 파스처럼, 잘 만든 문장처럼, 불후의 재즈처럼, 연애의 입술처럼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 덜컹거리는 열차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든, 버스 안에서 졸든, 비행기 창문으로 뭉게구름을 바라보든, 낯선 도시의 여관방에 홀로 남겨져 빗소리를 듣든, 바닷가를 헤매든, 깊은 산속에 버려졌든, 다만 이곳에 있지 않음이 그에게는 곧 여행이었고 행복이었다. 여행은 삶의 진짜 속살을 보여주었다. " (p. 196)

" 당신은 왜 여행을 떠나나요?
누군가는 사랑을 버릭 위해
누군가는 남루한 삶을 견디기 위해
누군가는 깨달음을 위해
누군가는 밥벌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누군가는 지구의 사랑과 평화를 위해
그러니까 이 세상의 여행자가 모두 100 명이라면
여행을 떠나는 데는 100 가지 이유가 있는거야.
그런 질문은 참아주길 부탁해. " (p. 265)
시인은 말한다.
이 책에 '실린 것들은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라고.
독자들에게 이 책에 실린 것들이 아주 사소한 우연이었으면 좋겠다고, 음악이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행복이었으면 좋겠다고...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무리 큰 슬픔도, 큰 아픔도 모두 내려 놓을 수 있을 것같으니, 독자들에게는 행복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