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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 거친 세상, 독특한 상상력으로 이겨내게 하는 박민규의 힘.
바람이 차다. 마음 한 켠을 서늘하게 만드는, 차가운 기운이 박민규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기분이다. 전작 단편집 『카스테라』를 통해, 거대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견디는 힘을 알려줬다면, 이번 단편 모음집에서는 따스함이 묻어있지만, 현실의 어둡고 쓰린 부분을 바로 볼 수 있는 서늘함이 보인다.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우울하게 느껴지는 삶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게 된다.
어렸을 적, 꿈많던 시절 아이들과 함께 보물을 숨겨놓았던 상자를 꺼내보는 데에서 시작하는 <근처>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보물상자를 찾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소재가, 박민규의 상상력을 만나면,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속물적인 우리의 모습과, 남아있는 연민, 그리고 애틋한 마음이 섞여, 과거의 흔적을 찾았다 생각하지만, 결국 찾았는지 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18편의 단편집은 LP의 형식을 꿈꾸었던 작가의 바람처럼, Side A와 B 두 권으로 묶였다. Art book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표지와 앨범 설명의 글은, 처음은 그냥 작품으로 읽고, 두 번째는 작가가 누군가를 위해 헌사한 이를 생각하며 다시 읽게 한다. 아버지를 위해 쓴 『누런 강 배 한 척』의 글에서는 그냥 읽었을 때의 아련한 마음에, 그 연유를 알고 나니, 마음이 더 서글퍼졌다.
인생을 알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몰라서 고생을 견디고,
몰라서 사랑을 하고,
몰라서 자식에 연연하고,
몰라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실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 65p
# 눈여겨 보지 않은 비주류의 인간들을 사회로 올려보내다.
성공을 꿈꾸고, 경제적 부를 위해 노력하는 세상이다. 함께 즐겁게 살기 보다, 나만 잘 살기 위해, 게임의 룰을 익히고, 게임의 룰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이가 넘치는 세상이다. 나만, 너를 밟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경쟁의 원리를 회사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연애하고 살아야 한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외치는 사회에 숨쉬고 있다.
주류에서 밀려난 이들이 박민규 작가의 책에서는 잘 보여서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너무나도 못생겨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를 위해 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처럼,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덫에 빠져, 꿈이 있다면, 변리사를 목표로 도전하는 이벤트 행사의 직원이 나오기도 하고(「굿바이 제플린」),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정을 그린 「낮잠」도 있다. 살고 싶어서, 다리 위에 올라가 하소연하는 남자와, 그를 설득해서 내려보내야 하는 경찰관의 이야기를 그린 「아치」의 등장인물을 보며, 보려하지 않아 더 춥고 힘든 사람들을 소설을 통해 만나, 지금 현재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 아까워서, 두고두고 읽고 싶어지는 책.
맛있는 음식과 맛 없는 음식이 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먼저 먹는 편이다. 늘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음식을 먹고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 내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을 먹더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책은 반대로 좋은 책은 아껴두고 두고두고 읽는 편이다.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읽기 싫어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책이 있다. 무엇보다, 한 편 한 편 읽다보면, 끝이 다가오는 것이 싫어, 주춤주춤 책장을 넘기고 싶지만, 휘리릭 글을 읽고마는 책도 있다.
읽다보면,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지금 따뜻한 방안에서 책을 읽는 이 시간에도, 다양한 환경에서,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틀에 박히지 않은, 하지만, 틀에 박힌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 살고 있음이 보인다. 사회의 문제를 무겁게 다루지 않아 읽는 일이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운은 길게 남아,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한 명씩 생각났다. 바쁘다는 핑계로 소식이 끊어졌던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늘한 작품의 기운에 마음이 외로워졌기 때문인지, 조금 더 넓게,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바라보는 시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인지는 흘러가는 시간이 좀 지난 후, 다시 작품을 읽고, 되물어 봐야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