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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 시, 마음에 무늬를 새기다.
일상을 살다보면, 끊임없이 일에 치여, 마음에 점 하나 찍을 여유가 없어진다. 반복되는 일 속에 감정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며칠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서로 얼굴을 붉히고, 그러다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우울해지는 일이 반복해지다 보면, 한동안 하늘을 쳐다 볼 여유 없이, 그냥 일에 치여, 시간에 쫓겨 하루하루 살았음을 깨닫는다. 개그프로에 웃고, 드라마에 대신 마음을 맡긴 채 지나버리는 일상에 빠지다 보면, 하루에 마음에 무늬를 새길 기회는 사라진다.
시집을 읽는 이유는 마음에 시인의 목소리를 따라읽다보면 생기는 무늬를, 가슴에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달콤한 연애시에서는 사랑의 감정세포가 만들어낸 하트의 무늬가 자리잡는다. 세상의 부조리를 외치는 시에서는 날이 바짝 선 대나무 무늬가 만들어진다. 아픔을 감싸안으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에서는 동그라미 하나가 마음에 들이찬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시인의 목소리에 마음을 빈 도화지로 만들어 시인이 외치는 글 하나하나에 떠오르는 느낌을 마음의 붓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
배를 채우는 일은
뜻밖의 밑줄들을 지우는 일이겠습니다만
식사를 마칠 때까지
여자도 나도 반찬 그릇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밑줄」, 28-29p
역전 식당에 사람들은 붐비고, 자리에 앉은 나는 모르는 여자와 합석을 하게 된다. 서먹서먹 앉아 있는데, 종업업은 동행인 줄 알고 반찬을 한 벌만 가져다 준다. 낯선 이와 함께 하는 첫 순간이 얼마나 서먹하고 어려운지, 짧은 단어와 글은 영상보다 더 많은 그림을 보여주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찬란」, 34-35p
아름다운 장면 위주로 사진을 많이 찍는다. 예쁜 꽃이 활짝 피었을 때, 야경의 불빛이 아름다울 때,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있을 때 등 다시 보았을 때,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순간 위주로 사진을 찍게 된다. 순간의 한 장면에 주목하지 않고, 꽃이 피기 전에 겪었을 겨울의 공간에서 봄의 따스한 기운으로 흙을 뚫고 나오는 순간에 주목하는 시인의 시선이 좋았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찬란이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사건들을 찬란의 시선으로 보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바라봤던 시선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시는 시인이 혼자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남긴 시가 독자의 마음에 들어와 하나의 꽃으로 피어났을 때 완성된다 생각한다. 좋은 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로 읽고 싶은, 자꾸 읽고 싶어지고, 다시 생각하고, 찾게되는 시가 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마음 속에 가득차 있던 스트레스와 우울의 감정이 사라졌고, 두 번 째 만났을 때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세 번째 읽게 되니, 시인이 그려내는 그림과 내가 느낀 감상을 함께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시집을 읽고 나니, 창밖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바라본 창밖의 풍경에는 물러나는 겨울의 기운과 조금씩 다가오는 봄의 기운이 함께 공존해 있다. 그냥 지나쳤던 꽃들과 나무들도, 마주치지 않지만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왠지 남이 아니라 느껴졌다. 지인이 생각나 문자를 보내고,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었다. 2주동안 삶의 방향이 변했던 지인의 앞날을 응원하고, 그동안 달라졌던 내 마음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인과 나누었던 일방적인 대화가 즐거웠기에,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사랑의 온기를 나누는 일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생각한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를 피하게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가 우리에게 필요한지 『찬란』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보았다. 『끌림』이라는 산문집에 끌려, 만나게 된 시집이다. 산문도 좋지만, 시인의 시도 그에 못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