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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 부를 위해 미술작품을 모으지 않는다.
미술을 잘 모르지만 페기 구겐하임이란 이름은 알고 있다. 『그저 좋은 사람』이란 책을 번역한, 예술가 겸 번역가인 박상미씨가 쓴 『뉴요커』란 책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처음 번역하고 싶었던 책이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이었다. 번역도 마치고, 출판사와 연락할 즈음, 이미 판권이 다른 출판사에 넘어갔음을 알고 망연자실한 일화로 페기 구겐하임을 기억한다. 어떻게 미술의 문외한인 그녀가 멋진 컬렉터로 변화하게 되었는지 자서전이 친절히 알려준다. 무언가에 미치도록 빠진 사람은 멋지다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일상의 행복 대신, 미술에 흠뻑 빠졌던, 특히 새로 두각을 나타낸 현대미술의 중심지 미국에서 큰 족적을 남긴 그녀의 삶을 대면했다.
# 예술에 빠지기까지, 솔직한 고백이 인상적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는 과정들은 남에게 보이기 쉽지 않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결혼을 결심하는 과정과 그녀가 사랑에 빠졌던 남성들이 예술가였다는 행운을 받았다. 미술에 관심이 없던 그녀가 예술가와 사랑에 빠지면서, 하나씩 미술을 접하게 되었고, 그 열락에 빠져,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미술품을 사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일을 평생 지속한다.
그녀의 주변을 스쳐갔던 예술가들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인상적이다. 그림을 보고, 화가의 삶에 대해 궁금해 하는 편이 일반적인데, 자서전을 통해, 페기의 눈에 비친 예술가의 성격을 떠올리며, 그들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옷을 살 욕망을 줄이고, 비싼 차는 팔고, 싼 차로 바꾸며, 자신을 수도사처럼 금욕하면서, 하루에 한 점씩 예술작품을 사모았던 열정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한 권의 멋진 책을 만나, 그 다음 책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에 비해 예술작품은 고가의 과정이지만, 한 권의 책을 얻기위해, 다른 욕망을 포기해도 좋을만큼, 그 책과 대화하는 시간의 즐거움을 알기에, 그녀의 열정의 시간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였음을 짐작하였다.
세계대전의 위협속에서도 하나씩 그림을 모았던 그녀의 삶이 유년시절부터 베네치아에 머물 때까지 이어진다. 한 남자의 아내로 영영 남아있지않고, 많은 예술가와 교류하여, 예술가들을 후원했기에, 좋은 그림들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기회도 선사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공간에 머무는 과정 사이에, 많은 만남과 에피소드가 있음을 책을 통해 배웠다.
# 후원자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다.
무엇보다 눈길이 갔던 부분은 세금 면제나, 나중에 부를 증식하기 위한 재테크의 방법으로 미술작품을 모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술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해서 예술작품을 모으는 열정에 반해, 끝까지 한 호흡에 읽었다. 앨프리드 H.바가 정의한 후원자란 단순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예술작품을 모으ㄴ른 수집가나 예술가를 돕고 공공 미술관을 설립하는 자선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예술가 모두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적절한 수단을 동반하여 그런 감정을 행동화할 의지를 지닌 사람이란 의미에서 페기는 후원자에 걸맞는 이라는 생각을 했다.
재벌 총수일가가 매입한 미술품이 문제가 되어, 뉴스와 세간의 사람들의 입에 올랐던 일을 기억한다. 소박하게 사는 월급쟁이가 평생 돈을 모으더라도, 미술품 한 점을 살 수 없을만큼 큰 액수의 미술품을 보았을때, 이제 미술이 작품으로서의 가치보다, 돈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주목받는 시기가 되었음을 느꼈다. 지금의 고가에 팔리는 고흐 작품을 보며, 그림은 예술가가 그리고, 돈을 컬렉션이나 부자들이 버는 건 아닌가 하는 편견이 있었다. 이 땅에 사는 예술가들이 풍족한 생활이나, 좋은 후원을 넉넉하게 받아 예술작품을 만들기 보다, 생활고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그림에 대한 열정을 쏟더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많았던 사실을 책을 통해 만났던 기억들이 편견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페기와 같은 후원자들이 많아진다면, 문화의 강국이 되는 일은 멀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잘 키운 예술가가 만든 그림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놓고 작품에 매진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길을 많이 열어주는 일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페기의 자서전을 읽으며,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예술가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과 중동, 아프리카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있을텐데, 언젠가는 유럽중심을 뛰어넘는, 컬렉터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이가 남긴 자서전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살아있었다면, 꼭 한 번 만나보길 소망했을만큼, 멋진 여성을 알게 되었다. 그녀 덕에, 그녀가 모은 작품들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