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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 시간의 숲에서 고대 중세 근세의 문화영웅을 만나다
최정은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5월
평점 :
# 친구가 추천하는 친구와 사귀듯이, 알게 된 책.
한 권의 책을 알게 되어, 읽게 되는 일은 누군가와 친해지는 과정과 흡사하다.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다 친해진다 말하기 어렵다. 계기가 필요하다. 어렸을 적에서는 자연스레 같은 환경에 지내는 계기로 친해진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마음 속의 결정에 의해 그 사람과 친해지거나 책을 읽게 된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라는 책을 즐겁게 읽다, 디지털 유목민의 탄생이라는 짧은 평론의 글이 좋아서, 책을 읽기로 결정했다. 광고 카피에서 나오는 인생을 즐기라는 달콤한 유혹과 달리, 유목민의 느낄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책임까지 냉혹하게 그려냈다는 글과 사물의 가치는 우리가 그 사물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성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우리가 버려야 할 가치를 통해 결정되는 것은 아닌지라는 글을 읽고, 직접 책을 읽어봐야 겠구나 결심했다.
# 트릭스터, 규칙을 깨며 규칙을 만들어 가는 자.
미술사학을 전공한 저자는 소중한 친구에게 서양의 전체 역사 혹은 미술사를 바라보는 잣대가 되는 유용한 개념을 하나 설명해야 한다면, 무엇을 말해줄까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가 찾아낸 개념은 데코룸이였다. 적절함과 적합함으로 번역되는 데코룸은 어떤 장에서 생활할 때 적절하고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데코룸에 대해 연구하던 그는 경계의 안과 밖 사이에서, 규칙을 깨어가며,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는 트릭스터를 발견하게 된다. 미치광이나 바보로 표현되는 그들은, 조롱의 대상이거나, 경계의 대상인 트릭스터는 욕망의 절제가 아닌, 극한을 추구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트릭스터를 모른다고 해서, 일상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트릭스터를 알게 된다면, 고대와 중세, 근세까지 서양에서 전해내려온 규범의 틀이 어떻게 깨어지고, 만들어졌는지, 현대의 영화와 소설, 애니메이션 등의 미디어에서 그 규범이 어떤 시선으로 정의되어 있는지 엿보게 된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데코룸과 트릭스터를 즐겁고, 재미있는 앎의 기쁨의 시간으로 만들어 준 건, 저자가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현대에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작품들 덕분이었다. <유브 갓 메일>과 <오만과 편견>을 통해, 사회적 지층 변화에 대응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초상을 알게 되었고, 상실은 또 다른 만남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포카혼타스>를 통해, 살아가기 위해 다른 문명을 선택해야 하는 이의 갈등과 제국주의의 재생산의 위험을 이야기한다.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신분이 아닌 그들의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도 알려준다.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통해서는 인간의 규범과 동물의 규범 모두를 깨어가며, 갈등할 수 밖에 없는 두 경계의 인물들을 구해내고, 치유하는 아슈타카의 여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치유하거나 구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천공의 성 라퓨타와 디오니소스와 할리퀸을 통해서는 경계를 넘어, 스스로 문제를 내고 스스로 해결하는, 제꾀에 속아 자신을 망치는 트릭스터의 모습도 보여준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왕따와 희생양을 만드는 폭력, 소수인에 대한 학살의 내면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모방하려는, 주류에 휘둘리려는 욕망에 빠진 사람들의 내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행과 대세라는 말이 자연스러울수록, 미디어와 보여지는 모습에 의해 모방하고, 그를 통해 안주하려는 의존적인 사람들의 마음이 깃들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판화와 조형물을 통해, 지배계층의 질서를 위한 룰을 지키려는 모습에서, 놀림받었던 바보와 농부에 대한 조롱의 판화와 글들에서, 경계를 넘으려고,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고 시도했던, 독일농민운동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이러한 조롱에는 ’다른 것을 나쁜 것으로’바라보는 타자를 재단하는 시선과 목소리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My Fair lady>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꽃파는 아가씨는 히긴스 교수의 교육에 의해 귀족과 다를 다 없는 행동과 규범을 익히지만, 그녀는 히긴스 교수에게서 귀족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이미 세계운 세계를 알아버린 그녀는 귀족도 될 수 없고, 꽃 파는 아가씨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규칙에 대해 이해한 뒤 비로소 자유로워진 그녀는 자신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고, 히기슨 교수의 한계를 이해하게 되며, 그의 잘못도 옹렬함도 감싸주면서, 진짜 숙녀의 품격을 얻게 된다.
탈식민지화 된 자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자기번식의 화폐에 욕망에 빠져,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열쇠를 줄거란 생각을 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수록, 많은 영향력을 행할 수 있는 시대, 자본의 게임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자본 없이도 즐겁게 생활 할 수 있는,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마음에서부터,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규칙이 더 많이 가진 이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할 수 있을만큼 불합리를 감수해야 하더라도, 주어진 삶을 기쁨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살아남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책이지만, 100만이 넘는 비한민족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다양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곱씹어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혼혈과 소수인에 대한 차별이 일상화된, 장의 질서를 오인할만큼, 우리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건 아닌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초등학교 다닐적만 해도, 마을에 한 명씩, 바보가 있었고, 장난도 치고 돌아주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격리와 수용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책을 읽다가, 바보처럼,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다가, 많은 것을 가진 이에 의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린 누군가를 생각했다. 원칙과 상식을 미친듯이 열망한 그 덕분에, 지금 한국 사회에 지배층의 규범의 현실이 어떠한지, 어떤 꿈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절실하게 느낀다. 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서문에 나온 지은이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본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미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을, 주어진 조건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을. 어떤 종류의 바보와 미치광이 들은 사회에 소금이 된다는 것을. ... 사회가 씌운 관계의 굴레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자는 위반에 따르는 오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려는 노력이 어떤 상황에서는 적합한 반면 다른 상황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각각의 행위들은 특정한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는 찬미되나 다른 순간에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낙인찍히고 단죄되고 좌절된다. 여기에는 법과 묶인 위반, 욕망 추구의 극한이라는 현대철학이 직면하는 문 존재가 바로 트릭스터이다.(12-1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