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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 이야기에 빠져, 더위를 잊다
무더운 여름, 뜨거운 열기에 두뇌의 움직임도 움추린다. 여름이 다가오면 추리소설을 챙겨 읽는다. 추리소설은 범인의 살인사건들 매개로 하여, 저자와의 치열한 심리와 두뇌싸움을 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두뇌의 움직임을 필요해, 더위과 함께 생각하면 어색하다. 매우 잘 짜여진 이야기에, 마음이 동해 빠져들면, 더위의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더위를 잊게 된다.
'베일'이라는 제목에 끌렸다.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소설이 관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진 않는다. 다만, 타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하는, '역지사지'의 기회는 제공한다. 상식선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 뒤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존재한다. 더위를 잊고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심연의 어두운 마음과 만났다. 내 안에 베일처럼 숨겨진 본성의 흔적에 고민하였다.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 한 순간의 실수,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불러오는 결과들.
첫 편째 중편 '천제요호'는 한 장의 편지로 시작된다. 사내는 여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글로 대신하겠다는 편지를 남긴다. 사내는 그가 저질렀던 살인의 경위와 그녀를 만나기 전, 지금의 자신을 만든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게 된 원인으로 사내는 어린시절 코쿠리상 게임을 지목한다. 히라가나를 쓴 종이 위에 동전을 올려두어 질문을 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게임에 빠져들게 된 사내는 사나에라는 앞일을 예측하는 귀신과 대화에 빠진다. 친구의 죽음을 예언이 현실로 되자, 죽음이 두렵던 사내 야기는, 사나에와 몸을 바치는 대신, 건강한 생명을 받는 거래를 승낙한다.
몸을 다치게 되자, 상처의 자리를 금속과 이상한 것들이 채운다.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지만, 그의 외모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몸으로 변했다.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하던, 야기는 끝없이 방황하며, 목숨을 버릴까도 생각하지만, 사나에와의 거래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교코에 집에 온 후, 2층 방의 어린 아기 히로시와 교코에 의해 삶의 희망을 얻게 된 야기는 집세를 내기 위해, 교코의 오빠의 친구가 경영하는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교코의 오빠의 친구는 사람들에게 못된 짓을 하기로 유명했고, 야기는 오빠의 친구와의 갈등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미스테리한 일들이 일어나고, 교코의 오빠는 살해된 채 발견된다. 교코에게 야기의 편지가 도착한다.
살인사건을 야기가 저질렀음을 괴로워하며, 자신이 돕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거라고 자책하는 교코에게, 야기는 많은 이야기를 통해 그녀의 생각을 변하게 한다. 보여지는 사실과 사건 뒤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있음을 알게되었다. 빙산의 일각처럼, 보이는 사실 뒤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진실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나니, 사실만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일이 인간에게 가장 잔인한 외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그가 이해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을 때에도, 그의 입장에서 차분하게 생각하고 납득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납득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납득의 결과를 찾아가는 과정들이 인간 사이의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는 사실을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은 들려준다.
# 화장실의 5명의 낙서꾼들이 낙서를 통해 서로 소통해간다. 그리고 벌어지는 사건들..
두 번째, 중편은 독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장실에 써넣는 낙서를 인터넷 게시판의 리플처럼 다는 놀이처럼, 화장실의 벽이라는 공간에 익명의 이름으로, 5명이 교류한다. 지나치게 바른, 정자의 글씨로 낙서를 해서는 안된다고 쓴 이는, 여러가지 사건을 일으키고, 사건을 짐작하는 일만 가능했던 다른 이들은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학창시절에 한 번쯤, 경험해 본 사건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정교한 추리소설로 다시 태어난다. 긴박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과, 반전, 마지막에 그들의 정체를 밝혀지는 과정에 빠지다 보면, 무더위를 느낄 기운이 없다.
합리적 사실과 이해가능한 상상력이 잘 만난 소설이다. 뜬구름 잡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일상속에서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과장된 사건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든 사회의 풍경을 돌아보게 된다. 혼자 느낄 때는 외로움과 두려움이지만, 함께 맞서면, 두려움을 잊어내는 힘이 생긴다. 작은 손길하나가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된다. 누군가의 위험을 구해주는 생명을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되기도 한다. 사건들은 참혹하지만, 인간 사이에 발생하는 유대는 따뜻했다. 무섭고 따뜻했던, 상충된 감정들이 만남이 독특했던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