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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편지 - 유목여행자 박동식 산문집
박동식 글.사진 / 북하우스 / 2009년 1월
평점 :
# 그래, 떠나고 싶었다.
가끔은 일상에서 일탈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관계에 지치고, 자유롭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아지트에서 잠시 숨을 쉬곤 한다. 이렇게 잠깐 현실에서 멀어지는 도피가 아닌, 꾸준하게 일정한 거처를 옮기는 여행은, 일상의 쳇바퀴를 느낄 수 없기에 매력적이다. 대신 익숙한 공간이 아닌, 낯설고 다른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얻는게 있으면 잃는게 있다고 할까. 나만을 위한 공간과 시간과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듯이, 떠난다는 것 역시 안락한 한 곳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대신에 얻는 급부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떠나고 싶지만, 일상의 늪에서 헤어나기 힘들 때, 떠났던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한다. 나를 잊어버리고, 그가 보여주는 풍경과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상상이라는 마차를 타고, 여기저기 떠나는 느낌이다. 그래, 떠나고 싶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노을의 풍경,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눈으로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기에 낯선 사람들, 지구라는 공간에서 똑같은 아침과 낮을 보내는 사람들의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 따스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던 책.
여행에세이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승부가 갈린다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낯설고 먼 이방인인 외국인도, 외국이 매우 적은 타지에서는, 말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쉽게 친구가 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디랭귀지등을 이용해서 천천히 즐겁게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손가락이 석류처럼 패인 아이의 손가락을 보고 눈물짓고, 학교에 가기 위해 등교전에도 일을 해야 하는 아이의 생활과 짝짝이 슬리퍼와 고된 일을 슬퍼하며, 함께 수레를 밀어주고 함께 비를 맞아주는, 마음 따듯한 시선을 가진 저자의 글에서 나오는 감수성이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상에서의 탈출을 통해, 특별한 날을 기억하는 일의 의미와 죽음, 인연 등 다양한 주제들이 여행중의 에피소드와 함께 깊이있게 다가온다.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게 살았던 곳의 차이와 풍경을 보여주기보다는, 같은 지구 안에서 다른 생활을 살고 있는, 하지만 인간적인 교류가 가능한 그들의 삶의 풍경속에 들어간 이의 따스한 글이 묻어 있어 좋았던 책이었다. 여행에세이를 너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살뜰하고 도타운 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화려하고 세련된 차를 가진 이가 가난하고 허름한 여행자를 도와주기보다는 가난하고 잃을게 없는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모습은 한국 역시,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돈과 물질이 자신의 삶을 채우는 그 크기만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공간까지 차지해서 나눔을 힘들게 한다. 유목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여행의 즐거움과 슬픔, 단상들이 5개의 테마로 나뉘어, 41편의 편지의 이름으로 담겨있었다.
여행을 꼭 떠나야만 한다는 글귀는 없지만, 지금 숨쉬고 있는 이곳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여행자는 하루 식사와 숙소, 만남마저 불확실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당연하게 느껴지는 여유의 틈 대신, 긴장과 감수성이 극대화된다.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여행, 경험임을 에세이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무언가를 보기 위해 가는 것을 만남이라 하고, 이별하기 위해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을 떠남이라 한다. 저자는 여행을 현지인과 현지풍경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 생각하기 보다는, 익숙해진 풍경들과 작별하는, 헤어지기에 슬프지만,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고, 버릴 수 있기에 행복한 마음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이 풍성해지는 일이라 이야기한다. 현실에 메인 이는 일상 속에서 안도와 행복을 찾지만, 떠날 수 있는 이는 떠났기에 자유로워질 수 있고, 떠남으로서 더욱 정착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 일정한 시기를 두고 떠남으로써, 떠남의 행위에 안주하는 삶, 다양한 여행의 풍경 중, 내가 택하고 싶은 여행의 스타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여행 프로그램으로 많은 이들이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닌, 내 스스로 결정하고 테마를 정해 떠나는 여행. 시행착오도 많지만, 정보도 부족해서 곤란함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런 여행을 원한다. 훌쩍 떠난 후, 현지에서 엽서를 쓰고, 지인들에게 마음을 담아 우표를 붙여 보내는 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저자의 글과 함께 담겨진 사진은, 글로 만나는 상상속의 공간을 세부적으로 꾸밀 수 있는 힘을 불어주었다. 사진 덕분에 에세이를 통해 여행을 떠났다는 일이 생생해졌다. 살아숨쉬는 듯한 사진과 마음을 움직이는 글, 저자라는 이름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행을 함께 다녀온 기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