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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라크네 - 정여울이 만난 방송, 드라마, 책, 사람들
정여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1월
평점 :
# 책의 비평을 넘어, 미디어 비평으로.
정보를 알 수 있던 미디어가 부족했던 시기에는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였지만, 미디어가 넘치는 시기에는 어떤 사안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또다른 사건을 터트려, 정보의 과잉을 통해 권력을 유지한다. 우리가 보는 뉴스가 공정해야 하는 이유와, 신문이 공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암묵적으로 당연시하는 기준의 잣대가 뉴스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평론이라고 하면 문학평론이 가장 큰 권위를 차지했는데, 인터넷과 다양한 매체의 출현으로 그 권위가 상실되고 있다 생각한다. TV, 드라마, 영화 등 일상에서 쉽게 볼수 있는 프로그램 제작자의 함의와 내용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때론 더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저자는 다양한 미디어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엮어, 현대사회의 삶과 풍경을 읽으려 한다.
# 지적이며, 권위적이지 않고, 공감하기 쉬운 저자의 글들.
저자의 메세지는 철학적이지만, 저자가 사용하는 소재들은 일상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일상을 살며 잊기 쉬운 꿈은「베토벤 바이러스」를 통해, 지식인을 바라보는 시선은「눈의 여왕」으로 이야기한다. 현란한 외양 뒤 권태와 고독, 대화로 슬픔을 웃는 살풀이의 상상력을 개그 프로그램「사모님」으로 이야기한다. 돈이 되지 않고, 난해한 용어가 많아 다가가기 힘든 철학이다. 철학과 인간 사이에 놓인 넓은 강을 저자가 짠 카페트를 통해 바라보다보면. 철학에 이야기에 성큼 다가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의 글은 읽기 쉽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곱씹어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높다.
비평자가 가지기 쉬운 권위의 색채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 자신이 경험했던 소재들을 통해,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하면서도,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깊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생각할 수 있는 사안들이 많다. 단순히 웃고 즐기면서 넘어가는 이야기들 속에, 삶에 대한,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담겨있다. 비평가들이 휘두르기 쉬운 날선 검을 저자는 따스한 애정을 담긴 칼로 사용한다. 위독해서 떨쳐야 하는 수술대의 의사처럼 냉철하게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상처와 고통을 아파하며, 그 모습 그대로 바라보며 칼을 사용한다고 할까. 팬클럽회원의 맹목적인 추앙이 아닌, 따스한 시선이 글에 묻어있음이 느껴져, 오래오래 곱씹으며 저자의 글에 빠져들었다.
#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매혹적인 글.
드라마와 영화를 제외한 저자가 선택한 책은 쉽게 도전하기 힘든 책이다. 『비극의 탄생』, 『분서』, 『남자의 탄생』,『탐史』등 인문학 책도 많다. 그의 글을 읽으면, 당장이라도 책을 읽어보고 싶게하는 매혹적인 글 솜씨를 지니고 있다.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는 이상,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비평을 하지 않는, 침묵으로 지키는 것이 제일이라 생각하는 저자의 비평관은 김병익씨의 관점과 닮아있다. 친구를 소개받을 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소개했을 때 낯선이를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듯이, 글에 빠져 기대를 가지고 읽다가 예상과 다른 책을 만나기도 했다. 책을 읽지않았었던 시절에는, 저자의 글이 광고처럼 판매를 위한 홍보글이라 치부했겠지만, 작품을 읽고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사회와 삶의 풍경에, 비평의 대상을 도구로 활용하는 듯 보였다. 보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때론 현미경으로, 어떤때는 망원경, 안경이 되어, 시점이 이동과 적절한 초점을 가진 렌즈로 사회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관점에서 글을 써야하는지 많이 생각하게 해 준 책이였기에, 하루면 읽을 수 있는 책을 나흘간 책을 붙들고 찬찬히 독대하듯 다시 읽었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용서할 수 없는 것들에게」라는 제목의 <고맙습니다>라는 글을 읽고, 2년 전에 종영된 프로그램을, 1회부터 16회까지 보았다. 경쟁과 돈이 많은 걸 해결해주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많은 풍경들, 걱정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따스한 마음들, 세상을 원망하고 까칠하던 이의 마음의 빗장을 풀어헤치는 모습들, '에이즈'가 주는 심정적 공포와 편견, 마음에 둥지를 튼 죄의식은 살아남은 자에게 그대로 전이된다는 것을, 가해자의 죄의식과 피해자의 피해의식은 미안하다는 한 마디 말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삶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조금씩 벗어나야 한다 이야기하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잊고 살았던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드라마를 다시 만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동안 그가 읽고, 보고, 느꼈던 매체의 대상과 함께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다음 책은 『은유로서의 질병』과 『타인의 고통』이다. 많은 이들이 격찬하고, 칭찬하는 책도 나와의 인연의 끈이 닿지 않으면 쉽게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봄이가 친구들의 냉대와 어른들의 편견과 공포에 힘겨워하지 않게하는 힘을 『은유로서의 질병』을 통해,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미지로 학습하다보니 무뎌지는 감정적 둔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타인의 고통』을 통해 찾을 계획이다. 작가와 작품이 아닌, 사회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비평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